원조 ‘잘생쁨1’? ‘사람 좋음’의 대명사? 무슨 수식어를 붙일지 고민하다가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오만석. 무슨 수식어가 더 필요할까. 매체와 장르를 넘나들며 끊임없이 새롭고 또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는 놀라운 배우를, 이번에는 한예종 연극원 연기과의 교수로 만났다. 숱한 인터뷰를 해 왔을 그에게 도대체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까 걱정으로 보낸 밤이 무색하도록, 상쾌한 즐거움으로 가득찼던 만남을 되새기며 그의 답변을 정리해 보았다.

교수로서 학생들을 만나게 되어 마음가짐이 달라진 부분이 있으실까요?
좋은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겼어요. 교직에 들어섰지만 외부 활동을 계속 이어 나갈 생각이에요. 교육과 현장이 이어질 수 있도록 제가 중간 역할자로서, 학생들이 현장에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정보와 노하우를 제공하고 이끌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단점보다는 장점을 이야기해 주려고 하는 편인데 학생들한테 칭찬을 많이 하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연극원 연기과 친구들은 이미 중·고등학생 때 칭찬을 많이 받아서 칭찬이 익숙할 거예요. 그렇지 않은 평에 익숙하지 않을 테니 균형을 잡아 주려고 해요. 더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이야기해 주려고요.

카메라 연기 수업을 하시는데요, 어떻게 진행되나요?
영상 연기와 무대 연기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에서 출발해요. 무대에서 연기를 평가 받고 같이 이야기하듯이 영상도 어떻게 효과적으로 접근하고 연기할 수 있을지 함께 공부하고 있어요. 학생들이 직접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서 연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요. 카메라, 붐마이크 같은 장비를 놓고, 실제적 현장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적응하는 실습을 한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연극원 재학 당시 제16회 정기 공연 〈이(爾)〉(1999)에서 공길과 장생으로 분한 배우 오만석(좌)과 이선균

카메라 연기와 무대 연기의 가장 큰 차이점은 뭘까요?
얘기가 되게 길어지는 건데. 쉽게 이야기할 수가 없어요. 일단 학생들이 카메라 앞에서 날것의 연기를 보여 주면 살아 있다고 많이 오해해요. 대사만 외우고 상황만 인지해서 그때그때 순간의 감정을 표현하면 마치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것인 양 착각할 때가 있는데, 한 장면을 반복 연습하는 무대 연기처럼 카메라 연기도 그런 반복 연습과 훈련이 필요해요. 어느 순간 폭발적인 에너지보다는 매우 일정한 질량의 좋은 연기를 반복해서 보여 줘야 해요. 무대에서는 멈출 수 없지만 카메라 연기는 수없이 많은 멈춤이 있어요. 그때마다 꾸준한 에너지가 필요해요. 편집에 대한 이해도 반드시 동반되어야 하고요.

연극원 1기 출신이시잖아요. 그 시절 한예종의 모습이 궁금합니다. 여전히 비슷한 점, 아주 많이 달라진 점이 있을까요?
다른 학교에 비해 여전히 교수님들과 학생들 사이, 선후배 사이 상하 관계 위계질서가 강하지 않은 자유로운 분위기가 이어지는 것 같아 반가운 마음이에요. 그때는 전공 수업 이외 모든 교양 수업은 대부분 연극원 전교생이 같이 들었어요. 전체 학생 수가 더 적었거든요.
다 함께 모여서 해결해야 하는 과제도 많았고 협업이 좀 더 활발했던 것 같아요. 장면 발표를 할 때 극작과 학생이 연출을 한다거나, 연출과 학생이 무대미술을 준비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역할 바꾸기도 많이 했어요. 한편으로는 막막하기도 했어요. 선생님들도 결과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부담이 있으셨을 거고, 우리들도 선배가 없다 보니 사회에 나가서 직접 부딪칠 때 잘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많았어요. 초반에는 졸업 후 현장에서 무시를 받은 적도 있었고 약간의 배척 같은 것도 있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어요. 이를테면 좀 더 선호 대상이 된 것 같아요.

학생 오만석은 어떤 학생이었나요?
2학년 마치고 이게 내 길이 맞는지 엄청난 고민을 했어요. 재능이 없다고 느껴졌어요. 어떤 캐릭터를 맡아서 연기하든 거짓말 같고. 대본을 읽으면서 충동을 느끼고 그 충동을 더 쌓아올리고, 분석하고 찾아내서 표현하는 즐거움이 대학 입학 전에는 컸는데, 대학 들어와서는 제가 너무 한심한 거예요. 저희 동기는 32살부터 19살까지 나이대가 다양했거든요. 제가 나이 든 역할을 하는 것과 그들이 나이 든 역할을 하는 게 어린 나이에 얼마나 차이가 심했겠어요. 그런데 또 저랑 같은 나이인데 리어 왕 같은 노역(老役)을 기가 막히게 해 내는 친구가 있어요. 쟤는 어떻게 저걸 하지? 난 왜 안 되지? 생각해 보면 좌절한 만큼 노력을 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그렇게 방황하다가 군대에 갔는데 군대는 감정을 숨기고 참으라고 하잖아요. 학교에서와 상반된 생활이 오히려 도움이 됐어요. 얼마나 연기하고 싶었겠어요. 군대에서 연극사 책, 희곡을 더 많이 읽었어요. 복학하니까 억눌려 있던 게 터져 나오는 느낌이었어요. 대본을 읽어도 울컥하는 충동들이 자연스럽게 와닿더라고요. 2학년 때까지는 문제 학생이었고요, 3학년 때부터는 열심히 하는 학생 정도였을까요?

뮤지컬, 연극, 영화, 드라마 등 매체와 장르를 가리지 않고 활발히 활동 중이십니다. 현재 〈오월의 청춘〉 촬영으로 바쁘게 보내고 계시기도 하고요. 나아가 야구단과 축구단 운영도 하고 계시고 이제 교직 생활도 하시게 되었는데요, 이러한 종횡무진 활동의 에너지 원천이 궁금합니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겠다고 마음을 먹어서 그런 건 아니고요, 즐거워요. 에너지 원천은 즐거움에서 와요. 즐겁지 않으면 굳이 할 이유가 없죠, 그 많은 일들을. 축구단도 그렇고 야구단도 그렇고 드라마, 뮤지컬, 연극, 영화 다 색다른 즐거움이 있어요. 학교 수업도 나름의 즐거움이 있고요. 즐거움이 피곤함을 이겨요. 아직까지는. 매체와 장르는 균형감 있게 하려고 해요. 드라마 했으면 뮤지컬을 하고, 그 다음은 가급적 연극을 하고 그런 식으로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으려고 스스로 다그치는 면이 있어요. 실제로 도움이 많이 돼요. 영상 연기에만 익숙해지면 전체적인 흐름에 약해지는 경향이 있는데 공연을 하면 그게 채워져요. 반대로 드라마를 하면 연극에서 부족했던 부분이 채워지기도 하고요.

대표작을 몇 개만으로 압축할 수 없을 정도로 필모그래피가 빼곡한 배우이면서, 연출 작업도 꾸준히 해 오셨습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겠지만, 참여하셨던 작품 중 가장 애착을 갖고 계신 작품을 알고 싶습니다.
늘 지금 하고 있는 작품에 가장 애착이 가요. 지금은 드라마 〈오월의 청춘〉이네요. 저는 현실적인 편이라서 최고 관심사가 언제나 지금 하고 있는 일이거든요. 지금 하고 있는 드라마와 지금 수업하고 있는 학생들의 상태. 그 친구들이 어떻게 수업 준비를 해 올지 궁금해요. 안 해 오면 많이 실망하고 속상하지만 겉으로는 티 안 내려고 노력해요. 한 주간의 기분이 수업이 있는 화요일, 금요일에 좌지우지되곤 해요. 나이가 더 든 후에 이 질문에 다시 대답을 한다고 가정한다면, 제 인생의 변곡점이 된 작품을 꼽을 거예요. 뮤지컬 〈헤드윅〉, 연극 〈이(爾)〉, 드라마 〈포도밭 그 사나이〉가 되겠네요.

연출은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극작에는 관심 없으세요?
무대미술과에서 제작하는 공연이 있었는데 저한테 연출 의뢰를 했었어요. 또 후배들이랑 워크숍을 준비했는데 그걸 어느 연출가분이 보시고 저한테 계속 연출을 했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그렇게 뮤지컬 〈즐거운 인생〉 초연 연출을 맡게 됐고, 자연스럽게 〈내 마음의 풍금〉, 〈톡식히어로〉, 연극 〈트루웨스트〉랑 〈3일간의 비〉까지 하게 됐어요. 기존 연출가분들이 많이 응원해 주시고 권유해 주셨던 덕분이에요. 아직까지 극작은 제 능력 밖인 것 같아요. 아까 카메라 연기 이야기를 했잖아요. 대충 대사 외우고 머릿속에서는 이렇게 하면 될 것 같은데, 하지만 그래서는 절대 디테일하게 연기가 안 나오거든요. 글쓰기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머릿속에서는 맴돌지만 구체화시키기는 아직 힘들어요. 일정량의 습작으로 어떻게 쓰는지 파악하고 고쳐 보고 그런 훈련을 해야 하는데. 번역이나 각색은 많이 했던 편이지만, 극작은 아예 창작이잖아요. 그것까지는 아직 좀 능력치가 모자란 것 같습니다. 매진해서, 언젠가는!

공연계를 비롯한 문화예술계가 여러모로 안녕하지 못한 요즘을 보내고 있습니다. 안녕을 유지하기 위해, 슬럼프를 이겨내는 교수님만의 방법이 있을까요?
매번 작품 할 때마다 저는 슬럼프예요. 난 왜 이거밖에 안 되지? 더 못 찾지? 여기서 더 못 가지? 그렇지만 마치고 나면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이 추억이 돼요. 그리고 관객분들이 그 장면이 너무 좋아서 두고두고 생각날 것 같다 그런 이야기를 할 때 감사해요. 시간들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구나 하는 만족감이 들어요. 지금의 안녕하지 못함은 코로나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물리적으로 해결할 방법이 워낙 적잖아요. 힘든 이 상황에서 생각지 못하게 얻게 되는 즐거움이 있다면 억지로라도 그걸 해서 상쇄시키려 해요. 억지스럽기는 하지만 ‘내가 요즘 집에 일찍 들어가니까 가족들과 좀 더 시간을 보내는구나.’ 같은 정신적인 위로랄까요. 시간이라는 걸 길게 보고 현재는 그 프레임 중 아주 찰나라고 스스로 믿는 것. 그런 정신수양 아니고는 현실적으로는 어떤 방법도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주변 공연 제작자들, 영화 제작하는 분들 상당히 힘들거든요. 시기상으로는 하고 싶지 않은 작품도 있기도 한데 그들이 어려운 걸 아니까 모른 척할 수가 없어요. 쉬고 싶기도 한데. 저도 작품을 할 때 왜 해야 하는지 당위성을 스스로 찾아야 더 즐겁게 할 수 있을 거 아니에요. 지금 제 당위성은 “나로 인해서 저 사람이 좀 더 힘을 얻는다면 해야지.” 그거예요. 조금씩이라도 도울 수 있는 게 있으면 돕고 싶어요.

선배로서, 선생님으로서 학생들에게 당부하고 싶으신 점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경쟁에서 자유로웠으면, 조급함과 성급함을 조금 내려놓았으면 해요. 주변 동료들에 비해 나만 뒤처지는 것 같아 불안해하면 성급함에서 오는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경우가 생기거든요. 지금 당장은 느끼지 못하더라도 분명 성장해 나가고 있다는 것을 믿고 경쟁이나 결과에 나를 맞추지 말고 좀 더 길게 봤으면 좋겠어요. 배우는 어떻게 보면 정년이 없는 직업이잖아요. 세상의 눈으로 봤을 때 인기를 얻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게 결코 앞서 나가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고, 배우의 인생을 길게 보고 오래갈 수 있는 선택들을 했으면 좋겠어요. 기다릴 줄 알고 성급해하지 않을 수 있는 내공을 쌓을 필요가 있지 않나 싶어요. 그러면 기회는 무조건 옵니다. 확실히 옵니다. 확신해요. 연기하는 즐거움이 피곤함을 이긴다면, 에너지가 된다면 언젠가는. 많이 봤어요. 강신일 선배님, 김뢰하 형님도 그랬고 제 동기인 장혜진 배우님, 진경 배우님도 그렇고요. 본인의 길을 묵묵히 가고 있다면 기회는 분명히 와요.

스스로 어떤 배우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항상 제 단점이 보여요. 아직도 부족한 게 너무 많아서 부족한 배우라고 생각하고요. 어떤 사람으로 보이고 싶냐고 묻는다면, 도전에 인색하지 않은 사람으로 남고 싶어요. 뭐든 기회가 왔다면 물러서지 않고 도전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고 싶어요. 어떤 장르이건 작품적으로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낄 때 거기서 물러서지 않는 배우다, 그렇게 기억되고 싶어요.

하고 싶은데 아직 들어오지는 않는 역할이 있나요?
요즘은 악역 위주로 많이 하고 있어요. 오늘도 촬영 갔는데 후배들이 와서 “어제 그 눈빛 너무 무서웠어요~” 그러더라고요. 현장에서 엄청 농담하고 장난치다 슛 들어가면 바뀌는 스타일이에요. 행복하고 즐거운 걸 좋아하는 사람인데 반대되는 악하고 무서운 걸 하다 보니까 재밌는 걸 좀 하고 싶어요. 코미디 같은 거. 하고 싶은 역할은 감사하게도 다 해 봤던 것 같은데…. (연구실 벽면 액자를 가리키며) 여기 〈갈매기〉 공연 사진이 있는데, 그때 〈갈매기〉 오디션과 〈햄릿〉 오디션이 같이 있었어요. 〈갈매기〉 무대에 섰지만 햄릿에 미련이 있어요. 나이가 있어서 못 할 수도 있는데. 햄릿 같은 셰익스피어 작품의 주인공 역할을 해 보고 싶어요. 아니면, 리차드 3세는 아직 할 수 있으니까 그런 작품이라든지? (웃음)

내년이면 한예종이 30주년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학교가 나아가길 바라시나요?
조심스러운 부분이긴 한데 학교가 사람으로 치면 기성세대, 좋은 면에서 남들의 기준이 된 거잖아요. 거기에 잘못 안주하다 보면 오히려 도태되는 속도가 빨라질 수 있다는 염려가 있어요. 다시 한 번 다른 이들이 하지 않는 시도를 한다거나 열정적으로 무언가 더 깊게 파고드는 선택과 노력들이 필요한 때가 오지 않았나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제 자신에게도 되묻고 있어요. 수업 진행 방식도 다양하게 바꿔 가면서 새로운 길을 제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하지 않을까요? 스스로 깨우치고 새롭게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는데 그 방법을 찾는 게 학교의 숙제이자 학생들의 숙제이자 또 저의 숙제인 것 같아요. 제가 느끼기에 학생들 자체도 입학만 하면 뭔가 이룬 것 같은 생각을 하는데 그게 상당히 위험해요. 학교는 새로운 출발이지 결과가 아니거든요. 우리는 새로운 출발점에 있다는 것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해요.

글 박예슬 사진 박정우 영상 안정민
1 잘생김과 예쁨을 합친 신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