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뜸도 흐느낌도 없다. 낭랑한 가운데 정갈함과 깊이가 느껴진다. “즐겁되 난잡하지 않고, 슬프되 비통하지 않다”는 우륵(于勒)의 감상이 이러했을까. 전통예술원 음악과 민의식 교수의 연주는 그 자체로 가야금과 닮아 있다. 시대와 공명해 온 그의 삶 또한 마찬가지다. 민의식 교수는 인터뷰 내내 전통예술원 학생들을 일컬어 ‘우리 아이들’이라 칭했고, 학생들을 최고로 만드는 게 자신의 역할이라 말하면서도 아이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말했다.
가야금 연주자의 길을 걷게 된 계기를 들려주십시오. 교수님이 생각하시기에 가야금이 가지고 있는 힘은 무엇인가요?
제가 태어난 충청북도 영동은 우리나라 3대 악성 중 한 분인 난계 박연 선생님의 고향입니다. 영동은 국악이 많이 활성화됐었어요. 10월이면 열리는 난계국악축제의 영향이 컸죠. 그런데도 당시의 보수적인 인식으로는 남자가 가야금을 한다는 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부모님이 반대하시는 것을 중학교 때 국악 동아리 선생님께서 “이 아이는 음악성이 있다, 사람들이 좋아할 음악인이 될 것이다” 설득을 해 주셨어요. 그 뒤 국립국악고등학교로 진학하고, 전국학생국악경연대회 나가서 최우수상을 받고, 서울대학교에서 보다 심화된 공부를 하고 KBS 국악 관현악단에서 연주 활동을 하다가 한예종까지 오게 됐네요. 세월을 따져 보니 50년입니다만 지금도 나름대로 열심히 악기하고 친해지고 있습니다. 가야금이 언뜻 듣기에는 약하고 작게 들리지만 파장, 그러니까 여음으로 이어지는 특성이 있거든요. 은근하게 오래 이어지는 맑음과 시대적 흐름에 맞게 꾀해온 다양한 변신이 있었기에 1000년을 넘는 시간 동안 귀하게 전승되어 오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지금 시대에는 18현, 25현 개량 악기도 필요하기 때문에 아이들한테 둘 다 가르치지만은 가장 기본이 되는 정악가야금과 산조가야금은 12현 전통 악기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청소년 국악 관현악단, 영동군 난계 국악단, KBS 국악 관현악단 등 다수의 악단에서 악장 및 자문위원, 예술감독으로 활동하신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1980년대 중반까지 우리 국악에는 유스오케스트라단 같은 게 없었어요. 순회 연주나 앙상블 연습할 수 있는 환경이 서양 음악 하는 사람들에 비해 많이 뒤져 있었죠. 가까이 있는 선생님들, 뜻 맞는 연주자들하고 청소년들이 무대에 설 기회를 제공하자고 의기투합해서 1988년에 청소년 국악 관현악단을 창단하고 제가 초대 악장을 지냈어요. 여기저기 다니면서 예산을 따 오고 우리 사비도 들여 150명 정도를 뽑았었는데 그때 내 나이가 30대 초예요, 후배들은 20대 후반이고. 더 어린 후배들이 목말라 하는 점을 해결해 주려고는 하지만 우리도 뭐가 있어야지, 그때는 돈이 없어 가지고 강원도 산골의 초등학교를 빌려서 합숙을 했어요. 교실에서 열댓 명씩 재우다 보니까 모기한테 뜯기지 벌레한테 물리지, 그런데도 즐겁다고 훈련했죠. 저녁에는 밖에 불이 다 꺼지니까 차들 가져다가 아이들 가운데에 라이트를 모아 놓고 기분 맞춰 주고 했었는데. 거기서 배출된 인원들이 지금은 좋은 연주자, 선생들이 돼서 국악계에서 많이 활동들을 하고 있어요. 국악인 후배들이 마음 놓고 훈련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줬던 건 내가 인생을 살면서 가장 잘한 거라고 지금도 얘기해요.
KBS 국악 관현악단은 1985년도에 각계각층의 노른자 연주자들만 뽑아서 만들어졌는데, 창작 음악 집단이라 서양 음악처럼 지휘자가 있고 작곡가들에게 새로운 곡도 많이 받았어요. 저는 악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행정과 연주를 같이 하게 됐죠. 1년에 120회 정도 연주를 했고 특히 TV와 라디오로 송출이 많이 돼서 대중에게 국악을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했어요. 그곳에서 보낸 17년은 제가 음악적으로 가장 많이 발전했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올해로 30주년을 맞이한 난계국악단에는 악장으로 있다가 10년 전부터 무보수로 예술 감독을 맡고 있는데, 영동군이 전통 예술을 기반으로 한 문화 콘텐츠의 고장으로 거듭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전통예술원 개원 20주년 기념 앙상블 페스티벌 (2017)
악장 역임 중 30개국에서 초청 공연을 통해 국악을 소개해 주셨는데, 가야금 연주를 접한 외국 사람들의 공통된 반응이 궁금합니다.
서양 음악은 평균율 조율과 사이클이 정해져 있지만 우리 전통 음악은 관악기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가야금의 경우 한 줄 한 음에서 음이 4도까지 자유자재로 변화합니다. 여음, 비브라토에 반해서 가야금에 관심들을 많이 가져요. 음정이 움직이면서 떨리니까 독특하다고 그러죠. 제가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어떤 평론가는 연어가 퍼덕인다는 표현을 쓰더라고요, 생기가 있어 보인다고. 사실 국악은 국내보다도 해외에서 사랑을 더 많이 받아요. 우리가 추임새가 있잖아요, 연주할 때 잘하면 “잘한다!” “얼씨구!” 어느 날 미국에서 연주를 하는데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공연 중에 갑자기 “원더풀!” “브라보!” 막 이래요. 자기네들한텐 그게 추임새지. 끝나고 나서 기립박수를 받고 커튼콜을 몇 번씩 해주는데 마음이 짠하더라고요. 우리가 국악을 자꾸 들려주면 서양 작곡가들도 공부를 하면서 작곡 패턴이 바뀌어요. 앞으로는 외국 연주자들이 우리 국악을 더 잘 연주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올 거라고도 생각해요. 우리 음악을 세계에 홍보하는 전도사가 되게끔 많이 노력할 거예요. 우리 음악이 한국에만 머물면 안 되거든요.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발매한 〈환타지랜드: 평창의 아침〉도 그런 뜻을 갖고 제작하게 됐어요.
창작 무용을 위한 음악부터 전통요, 동요, 캐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망라한 ‘슬기둥’ 창단 멤버로 1집부터 7집까지 음반 녹음에 참여해 오셨습니다. 창단 계기 내지는 포부를 들려주십시오.
슬기둥은 1985년도에 만들어졌어요. 당시 용인에서 하는 여름 축제가 있었는데 거기 담당 PD가 국악에 관심이 많았어요. 절 찾아오셔서 순수 전통 음악이 아닌 일반인들도 좋아할 수 있는 국악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하셔 가지고, KBS 국악 관현악단에 있는 선배, 후배, 뛰어난 연주자들과 작곡가들 여럿 섭외를 한 뒤 기타, 피아노 같은 서양 악기랑 신디사이저까지 다 집어넣고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됐죠. 클래식이나 대중가요, 영화 음악을 국악으로 연주하고, 전통 무용 음악, CM송, 민중가요 같은 것도 하고. 당시에는 국악 실내악단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슬기둥이 무척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던 것 같아요. 한동안 방송가에서 우리를 섭외하려고 많이 쫓아다녔는데, KBS 다니면서 슬기둥 활동하랴, 학교 강의 나가랴, 30대 때는 거의 잠을 못 잤어요. 지금도 내가 다시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슬기둥에는 애정이 많이 가요.
전통예술원 개원 초기부터 함께하셨습니다. 당시의 학교생활을 들려주실 수 있나요?
제가 여기 온 2001년도만 해도 우리 학교가 대학교인지 고등학교인지 애매하게 인식이 돼서 학부형들이 우려를 많이 했어요. 저도 망설이다가 주변에서 독려를 많이 해 주시고 해서 왔는데 처음에는 너무너무 힘들더라고요. 초대 원장님이 집에를 못 가게 했어요. 아침 8시 반에 학교에 와서 밤 10시, 11시에 파김치가 돼서 나가는 거예요.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선생들이 그랬어요. 매주 회의하고 늦게까지 학생들 지도하고, 퇴근하면 전화해서 들어오라고 하고, 토요일에도 나와야 되고. 학교 건물도 그때는 컨테이너라서 옆에서 전화하는 소리, 커피 끓이는 소리 다 들렸어요, 강의실도 없어서 나눠 쓰고. 우리도 그렇지만 학생들은 더 불쌍했지. 그런데 그런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전통예술원이 발전을 했던 것 같아요. 연희, 무용, 음악과가 다 같이 모여 만든 창작음악극 〈영원한 사랑, 춘향이〉도 그렇고, 한예종은 선생들과 학생들이 의기투합해서 역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생각을 해요.
〈환타지랜드: 평창의 아침〉 (2018)
연주자, 예술 감독, 교육자로서 교수님이 가지고 계신 철학은 무엇인가요?
연주자는 뛰어난 기량과 더불어 연주하는 음악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감각적 해석이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꾸준히 연마하는 자세를 갖춰야 합니다. 연주하는 음악을 연주자 스스로 즐길 때 듣는 사람에게 감동이 전달되기 때문에 철저히 준비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술 감독은 자신의 악기나 연주에 통달해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연주자들의 역량을 꿰뚫고 있어야 돼요. 연주자들 간의 소통과 화합을 위해서는 인간적인 도량과 리더십 또한 필요하죠. 결국 이것 역시 평소에 준비된 자질이 없다면 불가능할 것입니다. 교육자는 앞에서 경험한 두 가지 역할을 가지고 미래를 준비하는 역할이고, 시대적 사명감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기서 간과해선 안 될 것은 시대의 변화를 빨리 인식하고 그에 맞는 대처를 해야 한다는 것이죠. 세 가지 역할 모두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인 만큼 하고자 하는 의지뿐 아니라 선한 영향력을 펼치려는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입니다.
전통예술원이 국악계에서 어떤 방향을 지향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러한 지점에서 학생들에게 바라는 지점이 있으실까요?
치열하게 갈고닦은 실력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예술인으로 성장시키고 싶어요. 다양한 예술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인재로 만들어야지, 그게 우리 전통예술원 선생들의 마음이에요. 국악계에서 배출되는 사람은 많은데 들어갈 수 있는 자리는 한정적인 게 안타까워요. 경쟁이 하도 치열하다 보니 대회 심사 가서 보면 아이들 손이 터져 가지고 피가 나 있기도 하더라고요. 맘이 아프죠. 남에게 좋은 소리를 들려준다는 것이 사실 자기의 뼈아픈 노력이 있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우리 아이들도 그걸 아는 것 같아요. 열심히 하는 친구들한테는 분명히 좋은 결과가 나와요. 그래도 난 학생들에게 그렇게 얘기해요, 꼭 전공만 하지 말라고. 네가 방송 PD가 될 수도 있고 선생이 될 수도 있고 기획사를 차릴 수도 있다고. 왜 굳이 가야금으로 승부를 보려 하느냐고. 가급적이면 모두에게 좋은 기회가 주어졌으면 좋겠는데…. 한 해 한 해 살면서 아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줘야죠. 음악이라는 것은 항상 가변적이니까, 이 시대가 요구하는 음악은 뭔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또 도전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앞으로의 행보는 어떻게계획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학생들에게는 도움이 되는 조언자의 역할을 하고 싶고, 국악계에서는 두루 경험했던 여러 역할들을 바탕으로 봉사하면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민의식 교수는 전통예술원 학생들을 일컬어 ‘우리 아이들’이라 칭했고, 학생들을 최고로 만드는 게 자신의 역할이라 말하면서도 아이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계속 염려했다. 시대와 발맞추어 가는 유연함은 곧 포용력이고 역동성이다. 가야금과 가야금을 뜯는 이들은 항상 그래 왔듯이 있는 힘껏 맥동할 것이고, 그 소리는 공명통에서 울리는 은은한 포근함으로 우리에게 전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