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지금의 위기에 좀 시큰둥하다. 시대에 뒤처질까 봐 세계의 전환과 미래 기술에 대한 논의를 뒤적이지만, 알 수 없는 암호 같다. 오히려 탈 있는 것이 삶의 기본값이라 상황만 낯설 뿐 위기는 낯익다. 오 년 만에 예술인 복지재단의 창작 디딤돌 사업을 신청하며 경제 등급을 확인한다. 그리고 코로나 이전, 현실의 위협이 집약됨을 체감한다.
내가 하는 순수 예술(Fine art) 분야의 창작은 특별하거나 긴급하지 않다. 늘 머리에 꽂혀 빠지지 않는 상상적 재현을 구현하는 데 분주하다. 조금 떨어져 보면 백수 같아 보이는 일상 탓에 “너 그거 해서 쌀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는 내 어미의 물음은 이 일을 시작한 이래 안부 인사였다. 데뷔 9년, 여전히 이 답의 조건을 찾는다.
자유롭지 못한 프리랜서(Free Lancer)
“무슨 일 하세요?”
작업(work)을 직업(occupation)으로 전환하여 생각하면 난 직장인도 전업 예술가도 아니다. 돈벌이의 경로가 다양한 프리랜서 입장에서 무어라 할지 수월찮다. 따져 보면 예술가와 그 파생 직업군일 텐데 본업의 비중이 낮아 파생 예술가에 더 가깝다. 최근 오 년간의 내 수익 구조에서 순수하게 창작으로 벌어들인 수익은 채 30%가 되지 못한다. 필요한 재화의 대부분은 파생 직업인 예술교육 서비스나 사진·영상 기술의 제공과 기타 삶의 흔적과 무관한 일로 얻었다. 그나마 수치에서 기댈 만한 낙관은 이전(2012∼2015년) 수익 구조에서 92.7%를 차지했던 기타-무관한 업종이 14.03%로 줄고 예술 관련 일이 수익의 약 86%로 대체된 것이다.
무소속인 프리랜서는 취업과 실업을 번갈아 겪는다. 대개 뭐가 되기 전까지 예술가는 빈털터리다. 무급에 가까운 노동 행위를 지속하며 JPG 장인으로 이미지 콘텐츠를 갤러리와 미술관에 납품하는 업자가 된다. 엄밀하게 노동이지만 우아한 무급 노동자와 같아 갖은 일감을 받아야 산다. 운이 좋을 때면 예술인 복지재단의 파견 지원이나 기관의 공공 근로 차원의 일을 얻어 잠시 사회 안전망을 경험하지만, 대체로 일련의 단기 일자리에 고용된 형편에서 먼 미래의 계획은 세우지 않는다.
작가로서의 위엄을 지키며 유연하게 비즈니스를 하는 일도 만만치 않다. 대리인(agent) 없이 프리랜서와 예술가라는 이중적 지위를 갖고 일의 대가(pay)와 강도에 대한 계약 조건을 거래할 때면 작가주의적 체면과 명분이라는 환상과 자주 충돌한다. 주로 명분과 실리 모두 계약서에 적힌 액수에 있지만, 대부분 귀치않은 부탁으로 얻어 낸 일이기에 소위 ‘모양 빠지는’ 일만은 피하고 싶은 것이 내 속내다. 특수 상품인 작품을 판매, 대여할 때도 크게 다르지 않다. 노련미가 없는 가격 협상은 돈 밝히는 속물 예술가로 보일 뿐이다.
간소한 짐
미술 생산자인 나는 텅 빈 작업실에서 창작을 하고 작품이라는 결과를 내놓는다. 그 과정에서 빈 곳은 창조적 생산물로 채워지고, 전시가 끝난 후에는 앞날을 위한 보관소가 된다. 그러나 작업실과 작품이 맺고 있던 긍정적 관계는 예전만 못하다. 오히려 창작 의욕을 분출할수록 작품은 점점 공간을 먹고 그에 따라 내 몸을 제한한다. 작품을 생산해야 생존한다는 옛날식 믿음과 공간의 수용 능력을 초과한 물리적 현실이 부딪친다. 말하자면 작품은 창작을 방해하는 악성 재고로 돌변한다. 그렇기에 빈 구석을 만드는 것은 창작만큼 중요한 덕목이다.
사례 1
대형 작업이라 자신의 작업실에는 더 보관할 곳이 없어 일 년 이상 장기 전시를 조건으로 지방 전시장에 보냈다는 중견 미술인
사례 2
자신이 지나치게 그림을 많이 그린 것인지 몰라도 작업실의 한계를 초과하여 작업 자체를 할 수 없어, 삼 년마다 자신의 그림을 군고구마 구이용 불쏘시개로 사용한다는 우스갯소리를 늘어놓는 또 다른 중견 미술인
사례 3
졸업한지 오래되지 않아 일단 학교 작업실에 작품을 짱박아 두고 자신이 필요할 때마다 찾아간다는 신진 미술인
사례 4
작품을 비우고 어떻게든 자리를 마련하여 인원별 월세를 줄인다는 공동 작업실을 사용하는 미술인
사례 5
신작 개인전 이후 둘 곳이 없어 일단 버리기 위해 작품을 거리에 내놨다는 미술인
머무는 공간에 빈 구석을 만들려는 시도는 모두의 문제가 됐다. 과거나 지금이나 창작과 보관을 위한 지출은 지대 상승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부쩍 오른 부동산 값만큼 작업실 유목민도 늘어났다. 창작 환경에 대한 구조적 불안정성이 지속될수록 창작 전반은 효용이라는 사회경제적 무의식에 순응한다. ‘비워야 산다’는 공포와 ‘작품을 지키는 것이 긍지’라는 믿음도 환가(換價) 가치 없는 재고라는 냉소 속에 흐려지고 작품은 간소한 짐이 된다. 이동과 설치가 용이하고 부피를 최소화해서 저장과 폐기는 쉬워야 한다.
하지만 작품의 파기는 최종적이지 않다. 무엇이든 생성되어 수정되고 보관되며, 어느 곳이건 불러올 수 있고 대체 가능한 수많은 디지털 옵션(Web, JPG, PDF, MP4, GIF, EPS 등)으로 그 이후가 채워진다. 오히려 디지털 인쇄술을 통해 어디든 프린트되고 새로운 육체를 입는다. 경량화된 작품의 물리적 형상은 하드디스크 혹은 플래시 메모리, 웹 저장소에서 포스터, 달력, 에코백, 손수건, 텀블러, 병따개 등 다양한 문화 상품의 외피가 될 수 있다. 이제 그 자체로 경제 활동의 목적이 될 수 있고 깊이를 잃어버린 순수한 외양만이 분할 증식한다. 어쨌든 작품은 가상의 무더기 안에서 보존되고 활성화된다.
그 과정에서 작품의 인증샷의 중요성은 커진다. 여기서 인증샷은 일반적인 관람자의 셀피용보다 더 높은 지위를 갖는다. 디지털에 기반한 작품의 기록과 배포가 생존에 유리하다는 것을 창작자 스스로가 본능적으로 터득하면서 인증샷은 전시의 본편보다 멋진 예고편으로 작동하고, 작품보다 더 멋진 작품 이미지로 수정되며 다시 알찬 포트폴리오를 구성할 수 있는 재료로 업그레이드된다.1 작품의 조달과 생산 계획, 마케팅, 회수와 폐기 등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창작은 최적화된다.
일찍이 경제적 현실에서 출발하지 못했다는 반성이 나를 현실주의자로 만들었다. 경험된 현실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성숙한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하지만 현재적인 것과 즉각적인 반응만이 최고인 문화와 가늠할 수 없는 빠른 속도의 변덕스러운 환경 속에 적응은 평생 학습이 됐다. 종종 소소한 쾌락과 이상주의적 한풀이에 기대 초연한 척하지만 긍지였던 작품이 텅 비었으니 돌고 돌아 결국 ‘답이 없다’는 해묵은 결론으로 돌아온다. 그래도 반성적 무기력 덕분에 겨우 돌아올 수 없는 길까지 왔다. 그동안에 내가 배운 지혜는 현실을 망각하는 긍정의 힘보다 설움이 설움을 덮는 것이 더 편하다는 것이며, 그것은 영구적 불안정성 가운데서 건강하게 지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명망도 돈도 없이, 행운같은 저주와 저주같은 행운이 겹쳐 여기까지 왔다. 아니 여기까지일 수도 있겠다 싶은 순간이다. 이쯤 되니 오래된 질문을 다시 마주한다.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할까? 이 글을 쓰며 그만둘 이유만이 가득함을 느낀다. 다른 한편으론 아직 여정을 종결지을 제대로 된 이유도 없음에 안도한다. 혹시나 하는 기대와 역시나 하는 낙담의 악순환을 어떻게든 계속해 볼 의지를 발견한다. 나 자신을 방기할 호사 속에 머물고 싶을 뿐이다. 그러기 위해 겉똑똑이 머리는 깊게 잠재워야 할 것 같다.
-본 글은 안녕의 조건을 고민하며 지난 〈작업이라는 미술〉, 〈공백을 위한 리얼리즘〉의 생각을 되새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