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바빴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몇 개의 작업과 일을 병행하느라 일상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주방에는 플라스틱 배달 그릇이 수북이 쌓였다. 집밥을 얼마나 꾸준히 해먹고 있는지로 프리랜서 작가가 영위하는 삶의 질을 평가하는 나로서는 완패했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그동안 빼곡히 찍은 탄소 발자국과 그만큼 피폐해졌을 건강 상태를 헤아려보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자각이 들 무렵 계절이 바뀌었다.

봄을 맞아 심신의 기지개를 켜고, 오랫동안 벼르던 수업을 등록했다. 마크로비오틱 요리 수업이었다. 마크로비오틱은 곡류와 채소를 뿌리부터 껍질까지 통째로 먹는 식생활로, 동양의 자연사상과 음양원리를 바탕에 두고 있다. 얼핏 들으면 난해하고 엄격한 이론 같지만 알고 보니 핵심 원리는 단순했다. 제철에 나는 국산 채소와 곡물을 자연스러운 요구와 필요에 따라 먹는 것이다. 더울 때는 찬 성질의 음식을, 추울 때는 따뜻한 성질의 음식을. 조리법도 명쾌하다. 먹을 수 있는 부위는 버리지 않고, 인위적인 조미료는 넣지 않는 것.

사실 나는 마크로비오틱이 정말로 몸에 이롭고 균형 잡힌 식사인가 하는 영양학적인 쟁점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다만 새롭게 눈 뜨게 된 채소의 생애가 흥미로웠다. 그때그때 먹을 수 있는 제철 식재료가 무엇인지를 배우면서 이들이 땅에서 자라나 생명을 지니고 머무는 시간이 생각보다 짧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덕분에 먹거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더 확장되는 감사한 경험을 했다. 계절과 풍토에 따라 나타났다 사라지는 채소들은 밀폐된 냉장고와 네모난 식탁의 프레임을 넘어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의 조건과 특성을 바라보게 한다. 그리고 동시에, 생명 있는 모든 존재는 유한하다는 자연의 섭리를 넌지시 일러준다.

물론 그 섭리를 거스르기란 아주 쉬운 일이다. 대도시 현대인이라면 전 세계 먹거리 공급 사슬을 장악한 대형마트에 가기만 하면 된다. 그곳에서는 365일 언제나,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구입할 수 있으니 말이다. 계절의 제약도 사라졌다. 냉동 기술과 저장⋅유통 시스템의 발전 덕분에 6월의 산딸기를 눈 내리는 12월에 맛보는 것도 가능해졌다. 그러나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꽁꽁 언 산딸기가 여름철의 생기와 태양의 열기, 그 본연의 에너지까지 온전히 간직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언가를 억지로 붙잡고 손에 넣으려는 인간의 욕망은 차곡차곡 축적되어 현재의 식문화를 이루었다. 농수산물 유전자변형도, 공장식 축산도, 크게 보면 이 욕망 안에 다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야생동물의 서식지를 파괴하고 환경을 오염시킨 대가는 부메랑이 되어 인간에게 돌아왔다. 전례 없는 재난을 마주하고 있는 오늘, 어쩌면 이 어두운 터널을 느리게 통과하는 동안이 우리가 새로운 삶의 방식을 학습할 최적의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법, 시간의 흐름과 땅의 순환에 가급적 몸을 맡기는 태도를.

지난주에는 수업에서 두릅 넣은 솥밥을 해먹었다. 완연한 봄의 맛이었다. 우리 땅에서 난 두릅을 제대로 먹을 수 있는 기간은 일 년 중 기껏해야 삼 주라고 한다. 하지만 너무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두릅이 가고 나면 죽순이 등장한다. 상큼한 햇양파의 시간이 끝나면 달콤한 초당옥수수의 시간이 온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이 재난의 시간에도 언젠가 끝은 찾아올 것이다. 좋은 시간이든 나쁜 시간이든 시간은 다 흘러간다. 그러니 오늘과 잘 작별하는 법을 연습해두어야 한다. 또 다른 오늘, 더 나은 시간과 만나기 위해서 말이다. 안녕, 봄나물이여. 안녕, 짭짤이 토마토여. 안녕, 길고도 짧았던 오늘이여. 매순간 미련 없이 안녕!

글 김영글(미술작가, 출판사 돛과닻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