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배의 삶”1을 따라 가지를 뻗는 빛의 아케이드, 자신보다 거대한 그것을 자신의 내부에 건설하는 동시에 그 속을 걷는 사랑의 산책자(Flâneur). 시 「재와 사랑의 미래」 외 4편으로 제17회 대산대학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김연덕은 ‘사랑’을 단지 주체의 정념이나 시의 동력으로만 대우하지 않는다. 김연덕은 사랑의 미지에 맨걸음으로 돌입하여 불수의 ‘너’와 ‘나’를 복원하고 이윽고 호송(互送)하는 방식으로 사랑-세계의 구체적인 풍경을 살아낸다. 창문을 투과하는 빛 아래서, 첫 시집 『재와 사랑의 미래』를 출간한 시인 김연덕의 세계를 들여다보았다.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한 최초의 순간이 궁금하다. 특별히 ‘사랑’에 주목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도.
고등학교 때부터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그런 생각으로 문예창작과에 갔다. 소설을 쓸 때 시집을 읽으면 도움이 되어서 읽다가, 조금씩 쓰게 되었다. 소설을 쓸수록 나에게 정말 잘 달라붙는 장르인가, 에 대한 고민도 있었다. 반면 시는 쓸수록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을 더 적확하고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는 장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시인이 되어야겠다는 마음가짐을 갖고 시를 쓰게 되었다. ‘사랑’의 경우에는…… 연애를 열심히 했다. 나와 가장 밀착되어 있고, 감정적으로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것에 대해 쓰고 싶었다. 삶의 현실적인 부분들을 통과해 오면서 내가 이 주제에 관심이 많고 또 쓰면서 정리되고 해소되고 도전이 되는 부분이 많구나, 라는 것을 느꼈다. 첫 「재와 사랑의 미래」를 썼을 때부터 본격적으로 쓰게 된 것 같다.
올 2월 한예종을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첫 시집을 출간했다. “학교에 대한 애정”2 또한 각별한 걸로 알고 있는데, 연달은 ‘사건’에 대한 소회가 궁금하다.
학교에 대한 애정이 정말 크다. 학교는 세 번 떨어지고 들어왔는데, 그 시간들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학교에서의 기억이 좋다. 글을 쓰는 데 있어서도 많은 영향을 준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났다. 시집에 묶인 시들 대부분이 학교를 다니는 동안 쓴 시들이다. 첫 「재와 사랑의 미래」도 학교를 입학한 그해 봄에 썼다. 시집을 읽으면 재학 시절이 읽혀서 더 소중한 것 같다. 졸업이 아쉽지만 좋다.
기억에 남는 학교 수업이나 일화도 궁금하다. 시에도 영향을 준 걸로 알고 있다.
전공 수업 중에 윤경희 선생님의 〈명작 읽기〉 수업이 기억에 남는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 때였는데, 선생님께서 직접 소분하신 보리수잎차를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프루스트의 마들렌과 보리수차 대목을 읽으면서 그 차를 우려 마셨던 순간이 잊히지 않는다. 다른 학과의 수업도 많이 들었다. 조형예술과의 〈유리 캐스팅〉 수업에서는 유리를 만들었는데, 그때 느꼈던 육체적 감각을 가지고 쓰게 된 시가 네 번째 「재와 사랑의 미래」다. 「그릭 크로스」와 「라틴 크로스」의 경우에는 미술이론과의 중세 미술 수업에서 그 용어를 듣고 쓰게 된 시다. 미술이론과 수업에서 서양 건축물들에 관해 배운 것도 시에 건축적인 요소를 끌어오는 데 영향을 주었다.
『재와 사랑의 미래』는 완결성이 높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번 시집에서 특별히 말하고 싶었던 ‘사랑’의 모습 또는 자세가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이었나? 앞으로 말하고 싶은 ‘사랑’의 스케치에 대해서도 듣고 싶다.
크리스티앙 보뱅의 산문집 『작은 파티 드레스』에 요즘 빠져 있다. 연인과 헤어진 남자가 숲속의 눈밭에 누워서 헤어진 이후의 시간을 묵상하는 이미지가 기억에 남는다. 내가 그리고 싶은 사랑의 이미지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사랑의 시작이든, 혹은 중간이든 끝이든, 그 자리에 진실 되게 있는 사람의 모습. 사랑은 아주 뜨거운 형태일 수도 있고 아주 차가운 형태일 수도 있고 어떤 온도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상태일 수도 있는데, 이번 시집에서는 그것들 전부를 육체적·감정적으로 받아들이며 그 시기에 몰입한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요즘에는 손 안에 들어오는 유리구슬이나 물병처럼, 현실적이고 작은 사물들에서 사랑의 기표를 발견하는 작업이 재미있다.
빛 모양 기호(‘✧’)가 많다. 그 기호가 문단과 문단을, 시간과 시간을, 더 나아가 세계와 세계를 마치 ‘빛’처럼 관통하면서 끊어내는 동시에 연결시키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끊어내면서 연결시킨다는 말이 멋지다. 사실 예뻐서 썼다. 조형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기호인 것 같다. 이 기호(‘✧’)가 의미가 큰 게, 원래는 이걸(‘✧’) 시집 제목으로 하고 싶었다. 시집이 흰색이어서 빛 모양 기호까지 있으면 완벽한 형태의 시집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단어가 되었든 기호가 되었든 모양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시인의 말에도 “빛이라는 단어가 빛처럼 생겨서 좋다”라고 썼다.
김연덕의 화자는 내밀해서 안전한 동시에 위험한 공간에 자발적으로 처해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화자와 공간의 관계가 내적 필연성을 기반으로 일종의 ‘짝’을 이루는 것 같다.
안전하면서 위험한 공간이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독자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느낌인 것 같다. 자주 쓰는 공간이 산인데 현실 세계에서는 산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시를 쓸 때는 늘 산에 대해 쓰게 된다. 산이 높고 오르기 힘들다는 점, 계절감을 강하게 느낄 수 있는 자연이라는 점, 등산하고 하산할 때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 등이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형태와 비슷하다는 생각이다. 실내에 대해 쓸 때도 구체적으로 구상하려는 편인데, 실내는 안전함과 답답함을 같이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릭 크로스」에서는 “뛰쳐나가고 싶은 대들보로 가득한 실내”라고 쓰기도 했다. 우주 공간을 비롯한 SF적 공간들도 활용한다. 사랑의 불가능성을 담아내기에 적절한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예외적인 빛」을 비롯해서 사랑의 역사성이 드러나는 시편들 중 가족의 모습이 등장하는 시편들이 눈에 띈다. 그때에는 화자의 시야가 보다 넓어지고 정돈되는 것 같다. 가족이 김연덕으로 하여금 가능하게 하는 자리가 있는가.
「예외적인 빛」과 가족을 연결 지어 질문해 주어 기쁘다. (웃음) 개인적으로 의미가 큰 시다. 실제로 할머니께서 일본에서 나고 자라셨다. 성인이 되시고 결혼을 하신 후에 한국에 처음 오게 되셨고, 일본에 계셨을 때는 다카라즈카3에 들어가는 게 꿈이셨다. 할머니와 쌍둥이 동생과 나, 세 여자를 생각할 때면 늘 이상한 기분에 휩싸인다. 할머니의 특성을 나와 쌍둥이 동생이 나눠 가진 것 같다. 집안에 예술 하는 사람도 없고 다카라즈카와 글쓰기 사이에 많은 간극이 있지만, 무언가를 표현해 내고 싶은 욕망을 가진 가족을 떠올렸을 때는 할머니가 유일한 것 같다.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어디에서부터 왔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 할머니가 가졌던 이상한 소망과 닿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쌍둥이 동생의 경우에는 현재 일본에 살고 있는데, 할머니께서 가지고 계셨던 일본에 대한 그리움을 쌍둥이 동생이 받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세 사람의 관계가 운명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기분 속에서 「예외적인 빛」을 썼다.
2021년 문학살롱 초고에서 열린 『재와 사랑의 미래』 낭독회
복수의 표제작과 변주된 표제작들을 따라 ‘미래’의 이미지를 그려 보면 “회백색 다차원” “입체”(「crop circle」)가 떠오른다. 미래의 과거와 과거의 미래가 시간적 간극을 두고 뒤섞이면서 ‘미래’보다는 ‘현재’가 복원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시인이 부단히 그려내고 있는 재와 사랑의 ‘미래’에서 가능해지길 기대하는 세계에 대해 듣고 싶다.
내가 느끼기에 시간은 과거-현재-미래로 분절되어 있다기보다는 하나의 이상한 ‘시간덩어리’로 있다. 과거에도 미래적인 속성이 있고 미래에도 과거적인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재와 사랑의 미래」에서는 “나에게는 내년에서 주워 온 / 상처가 많다”라는 문장을 썼다. 미래를 겪지 않아도 그런 것이 느껴질 때가 있다. 과거-현재-미래, 그것들 자체가 하나의 뜨거운 에너지로 남아 있는 상태에 대해 쓰고 싶었다. 더 나아가 과거-현재-미래가 이미 하나이기 때문에 어느 시점에 서 있는가에 상관없이 사랑 안에 서 있음을, 그 사실이 가능해지는 세계를, 쓰고 싶었다.
다망한 줄로 안다. 역병으로 어수선한 지금의 시기를 어떻게 통과하고 있나.
안 그래도 어제 행사를 하나 했는데 비대면이었다. 오프라인 행사만의 느낌이 없는 점은 아쉽지만 재미있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한다. 지방에 계신 분들도 무리 없이 참가할 수 있다는 점과 (집합 인원 제한이 있는) 오프라인에서보다 더 많은 인원이 참여하기에도 용이한 것 같아 좋다. 6월부터는 창비학당에서 수업을 하게 되었다. 그것도 비대면이다. 가을부터는 전라도 광주로 매주 내려가 오프라인 수업도 하게 되었다. 내년 3월쯤에는 《Littor》에서 연재했던 산문 원고들이 모인 첫 산문집이 나올 것 같다. 산문집을 준비하면서 두 번째 시집을 준비하게 될 것 같다.
시인으로서의 김연덕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마음에 품고 사는 말이 있다. 강영숙 선생님께서 〈소설창작워크숍〉 수업 때 하신 말이다. “창작을 할 때는 그 장르에 나를 다 던져야 한다”, “지금 이 문장을 쓰지 않으면 내 삶이 진전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을 갖고 문장을 써야 된다”고 하셨다. 그 당시에도 충격을 받았었고 지금도 늘 그 말을 생각하면서 쓴다.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을 만났을 때, 그것에 대처하는 나의 마음가짐이 그때에 쓰는 나의 문장으로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삶과 밀착된 글쓰기가 나에겐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