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리플픽쳐스

뿌옇고 빛바랜 대기에 도시는 잠겨 있다. 언뜻 스쳐 가는 행인의 움직임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짐작하기 어려운 그 도시에서 친구의 죽음을 고백하는 남자가 있다. 그가 이름 없는 친구의 죽음을 호명한 후 영화의 시선은 거리를 지나 지하보도로 내려온다. 굳센 냉기가 대기를 압도하는 지하 구조물 바닥에 몸을 구기며 앉아 있거나 누워 있는 이들이 있다. 이들과 같이 거리에서 생활하고 있는, 독백의 화자 태산(우지현 분)이 영화의 제목이 지시하는 더스트맨이다.

〈더스트맨〉의 김나경 감독은 단순히 거리에서 생활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노숙인’이라는 지칭 대신 주거 문제에 어려움을 겪어 집이 없는 사람을 의미하는 용어인 ‘홈리스’의 사용을 지향한다고 밝혔다1. 홈리스는 집이 필요한 이들과 집 때문에 고통을 받는 이들 모두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2 이때의 집은 정주를 제공하는 물리적인 형태를 의미하는 동시에 관계의 측면을 다루기도 한다. 영화 처음과 끝에서 마주하는 홈리스들의 죽음을 ‘무연고 시신 처리’하는 제도가 이를 반영하고 있다.

태산은 얼마간 홈리스의 신세다. 그는 상실과 애도의 장소에서 스스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거리에서 만난 김씨 삼촌과 도준과 임시적인 주거 공동체를 이뤄 지하보도의 냉기를 피해 도시의 공간을 찾아 나선다. 재개발 계획으로 인적이 드문 어느 시장 구역에서 빈 집에 머무르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거주보다 피신이라는 상태가 적절해 보이는 그들의 상황은 피신처를 찾아 이동 생활을 반복하는 고대인의 생활 방식과도 닮아 있으며, 정주 개념으로서 집의 기원이 피신처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들이 동굴의 암벽에 염료로 벽화를 그렸다면 21세기 서울에서 태산은 먼지 더께가 쌓인 곳에 먼지를 지워 나가며 그림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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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트 아트는 먼지를 재료로 그림을 그리는 장르를 일컫는다. 회화의 재료와 그림의 바탕이 되는 지지체가 유화와 나무 틀로 짠 캔버스라면 더스트 아트의 재료와 캔버스는 먼지와 먼지가 충분히 쌓인 표면이 된다. 전통적인 회화의 규범에서 오염의 원인이자 방해물로 간주되는 먼지를 매체로 사용하는 것이다. 더스트 아트는 광활한 국토를 가지고 있는 러시아의 지리적 상황에서 탄생했다. 흙먼지 가득한 내륙을 횡단하는 자동차 표면에 먼지와 이물질이 달라붙기 마련이다. 손가락이 붓이 되고 먼지가 두툼하게 흡착된 운송수단의 표면이 캔버스가 된다. 깊이가 느껴질 만큼 흡착된 자동차의 표면에 자신의 지문으로 형상을 그리기 시작한 익명의 예술가들이 더스트맨의 시초일 것이다.

화가는 그림을 그릴 때 자신의 시선을 담아낸다. 그러나 태산과 이 영화에게 있어 그림의 대상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영화의 서사와 달라붙어 있는 것은 오히려 그림의 구조라고 할 수 있다. 회화의 경우 그 구조는 바탕층, 물감층, 마감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탕층은 그림을 받치는 바탕이 되는 층으로 나무 보드, 캔버스, 종이 등을 포함한다. 물감층은 회화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의 층으로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물감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바탕층에 부착되어 있다. 회화의 내용, 즉 서사를 결정하는 ‘그림’은 붓질과 채색을 통해 물감층에서 구현된다. 반면 더스트 아트의 의미와 기능이 발생하는 장소는 바탕층이다. 태산이 택한 캔버스는 도시 곳곳에 오래 방치된 집과 차의 창문들이다. 철교 아래 터널, 재개발 계획으로 비워진 상점, 버려진 가구가 모여 있는 길목, 방문자가 없는 주차장과 같이 정주의 흔적이 없는 도시의 구조물 사이를 오가며 화면을 발견한다. 방치된 시간과 비례하여 두툼해진 먼지 캔버스에 그는 그림을 남긴다. 먼지 그림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 먼지로 덮이거나 돌아온 이에 의해 닦일 것이다. 회화에 비해 더스트 아트의 생명은 일시적이다. 그 유한함은 태산과 그의 동료의 임시적인 거주 생활과도 닮아 있다. 태산의 더스트 아트가 그리는 행위와 이를 구현하는 바탕 화면에서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면 그 저편에는 모아(심달기 분)의 이야기가 놓여 있다.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인 모아는 영화에 활기를 불러일으키는 인물이다. 그녀가 등장할 때마다 시청각적 채도가 불쑥 높아지며 언뜻 이야기의 표면 위를 불쑥불쑥 튀어 오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아는 거주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암시되며 회화 작업과 휴식을 겸할 수 있는 작업실 공간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으슥한 밤 지하보도에서 게릴라 벽화를 그리다 그곳을 지나가는 태산과 처음 조우하게 된다. 게릴라 벽화는 공공의 재산이나 사유 재산을 고의적으로 파괴하고 훼손하는 행위로 치부되어 다음날 '미화'되어 버린다. 모아는 이것이 ‘지워질 그림’임을 알고 있다. ‘무엇을 그려야 할지 모르겠다’고 고민하며 제도 내에서의 작업은 중단했던 그녀가 태산과 거리를 돌아다니며 다시 작업을 하게 된다. 영화의 후반에 이르러 그녀는 ‘무엇을 그려야 할지’ 아는 이가 된다. 그림의 대상은 먼지다. 먼지의 더께와 같이 그녀의 물감은 쌓여서 먼지를 그려낸다. 도시 곳곳에 더스트 아트를 남긴 태산을 지켜본 모아의 시선이 그림의 내용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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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미술사학자 하인리히 뵐플린은 비교 체계를 통한 미술 해석을 제시한다. 촉각과 시각, 평면과 삼차원적 깊이, 폐쇄된 형태와 개방된 형태 등과 같은 일련의 형식적 대립쌍을 구축함으로써 형태를 언어적인 기호로 전환한다. 형태는 더 이상 그 자체로서 가치 있기보다 체계 내에서 다른 형태들과 대조되면서 그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3 이러한 비교 체계로 영화를 들여다보자면, 회화와 더스트 아트의 구조와 마찬가지로 태산과 모아는 그 대립선상의 이편과 저편에 위치하며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그러나 태산과 모아가 이야기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와 선택이 교차하기도 한다. 작가로서의 태산과 관객으로서의 모아가 태산의 그림 그 화면의 앞면과 뒷면에서 마주하는 때이다. 이야기상 태산과 모아가 화해하는 때와 맞물린다. 먼지가 가득 쌓인 폐가의 창을 사이에 두고 모아와 태산이 안과 밖에 자리한다. 태산은 화해의 메시지와 함께 창에 그림을 남긴다. 모아는 그 화면 내부에 위치하며 하나의 층위이자 그림의 목격자로 동기화된다.

화가는 어느 순간에는 분명 자신의 그림을 보는 관객을 상상할 수밖에 없다. 그림을 그린다는 건 그것을 보여 주고 본다는 양방향의 시선의 교환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산의 그림, 더스트 아트의 경우 그 화면의 안과 밖 모두를 통과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시선의 관계를 선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경험과 상태에 처해 있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는 ‘어떤-리스’에 처해 있다. 모아가 그랬듯이, 어쩌면 그 대상을 잃어버렸을 때도 그러하다. 영화는 이러한 상태에 처한 이들에게 응시의 연대를 보여 준다. 눈에 잘 보이지 않고 귀찮고 털어내고 싶은 먼지가 표면에 붙어 티끌 모아 어떤 태산이 되는 것처럼.

글 김다은
1 이화정·김나경,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상영작 인터뷰” 〈이화정의 전주가오디오〉 17회, 2020, 네이버 오디오클립
2 소준철, 『가난의 문법』, 푸른숲, 2020, 161쪽
로잘린드 크라우스, 『1900년 이후의 미술사』, 사이언스북스, 2007, 3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