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교정은 한적해 보이지만 우리는 안다, 건물 안 방방마다 벌집 속의 꿀벌마냥 들어차 있을 예종인들을. 낮에는 학과별로 정규 커리큘럼이 작동하고 우리는 그를 수행해야 할 의무를 진다. 반면 밤에는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낮의 시간에는 충족되지 못하는 필요와 욕망을 채울 수 있다. 모임은 정기적인 만남의 약속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수업 밖의 수업, 학교 밖의 작업으로 확장되어 가는 만남이다. 우리들의 랑데부에는 소등도 알람도 없다.
1. 연극원 “코시극”
‘코시극’이 되기 전 이 모임의 이름은 연극원 공동창작스터디였다. 막 학교에 입학한 연극원 20학번 학생들에게는 코로나19라는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연극을 올릴 수 없는 것은 물론 동료를 알아볼 최초의 기회가 되는 공동수업마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를 두고 보기만 할 일인가? 연출과 최가람은 엘리베이터에 공동창작스터디원을 모집한다는 포스터를 붙였다. 그렇게 20학번 무대미술과 한 사람, 극작과 두 사람, 연극학과 두 사람과 연출과 두 사람이 모였다. 이들은 ‘이제껏 없던 연극’을 연구하고 만들어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코시극이라는 귀엽고 애달픈 이름은 이 집단의 특수성을 표방하는 한편 전염병의 창궐에 지지 않고 어떻게든 연극을 만들어 나가겠다는 포부를 보여 준다.
코시극 멤버들의 현재 목표는 2021 K-ARTS 온로드 지원사업 아트 랩 부문에 선정되어 기획 중인 연극 <환상선>(가제)을 무대에 올리는 것이다. 허나 부담은 없다. “언젠가는 올리지 않을까요? 꼭 올리고 싶지만 그게 당장일 필요는 없죠.” 이렇게 여유로울 수 있는 이유는 이들이 운이 좋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모임은 시종일관 왁자지껄한 분위기에서 진행된다. 사적 이야기와 공적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뒤섞이는 가운데 “우리 무슨 얘기 하고 있었지?”라고 가닥을 잡는 누군가가 나타난다. 조용해진 팀원들은 방금 나왔던 안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각자의 의견을 내어놓는다. 아이디어의 제시도, 그에 대한 기각도 거침이 없어 다시 한 차례 웃음이 터지고 만다. 대화는 끊이질 않는다. “공연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들과 모여 연극에 대한 걸 같이 만들어 보고 싶은데,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학교 커리큘럼에서 그걸 제공받는 게 불가능하니까 이 모임을 통해 많은 걸 얻을 수 있는 것 같아요. 단 한 번도 모임에 쓰는 시간이 아깝다고 느껴 본 적이 없어요.” 그렇다면 이 모임을 통해서 얻은 것은 무엇인가? 코시극 멤버들은 “사람.”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답한다. 보상도, 정답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매 회의마다 열심히 준비해 참여하는 모습에서 서로에 대한 유대와 공동창작에 대한 신뢰가 쌓였다. “눈앞에 당장 성과가 보이지 않더라도 아무 의심 없이 일주일에 한 번씩 시간을 내서 모임에 참석하고 있는 제 모습을 발견하고 ‘아, 이럴 수가 있구나’라고 놀랐어요.”<br>
그렇더라도 연극은 이들의 변하지 않는 목표다. 앞으로의 모임을 통해 이들이 얻어가고 싶은 것은 어쨌든 “공연. 연극적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에 “그것을 통한 명예.” “모 연출가를 위협할 대가가 되기.”라는 추임새가 붙고 박장대소가 뒤따른다. 같은 배를 탄 사람들끼리 추동력을 냄과 동시에 사이까지 좋을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환상적인 일인가.
코시극
2. 음악학과 “지적 코뮌 서초동지부”
‘지적 코뮌 서초동지부’라는 의미심장한 이름은 “반동적이고 급진적이라고 여길 수 있는 문제의식도 자유롭게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지어진 것이다. 2020년, 김용현과 구자혁은 철학, 문화연구, 인류학, 사회학 등의 다학제적 고민을 풀어놓는 스터디를 조직할 계획을 세웠다. 그 두 사람이 음악학과 친구인 신다영과 황은율에 참여를 권유하여 고정 멤버는 자연스럽게 네 명이 되었다. “음악은 일상에 아주 밀접하게 맞닿아 있으면서도 학문과 연구의 대상으로는 인식되지 않는 경우가 많고, 설령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작품과 음악가에 대한 분석으로만 소급되곤 해요. 음악학과 커리큘럼의 절반가량도 음악사와 기초이론, 작품 분석으로 구성되어 있죠. 하지만 이 모임에 있는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건 나머지 절반에 해당하는 문화연구 쪽, 그중에서도 음악과 사람, 음악을 둘러싼 사람과 사람 간의 유동적이고 다층적인 관계입니다.” 그렇기에 이 모임에서 텍스트는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지는 않는다. 지젝과 사이드, 아파두리야, 파농과 슌야를 읽었지만 “결국에는 그것을 바라보는 각자의 시선이 중요”한 까닭이다.
공부를 하다 보면 자기만의 관점이 생기는 경험을 하게 마련이다. 이때의 나는 내 시야의 지평을 확장시키고 있는가, 아니면 나를 둘러싼 요새를 정교화하는 중인가? 멤버들이 대화를 통해 자신의 관점을 재고하는 일을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건 후자의 경우가 가지는 위험성 때문이다. “이 모임은 저를 고립되지 않도록 지켜 주는 공동체면서, 더 넓은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연습하는 장이기도 해요.” 황은율의 말을 받아 구자혁은 학문의 세계에서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학술적인 의미는 어떠한 주장이 토의되고 비판받으면서 발생한다는 걸 학부 시절 수업에서의 토론을 통해 배웠어요. 같은 관심사를 가졌지만 다른 시선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그와 같은 학술적 의미 발생을 보다 적극적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 학자들로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모임이 딱딱한 분위기로 진행되는 건 아니다. 멤버 중 한 사람이 가지고 온 케이크를 나누어 먹으며 석사 진학과 향후의 진로에 대한 고민을 공유하고, 모더니스트가 아니면 박사 학위를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느냐며 농담을 던진다. 이론은 하나의 사회성이다. 교류이자 기회이다. 그렇기에 이론가들은 관점과 목소리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동등한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교류한다. 지적 코뮌 서초동지부는 이론가이기에 앞서 경청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음을 잊지 않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지적 코뮌 서초동지부
3. 극작과 “괄호”
‘괄호’는 희곡에서 소지문을 쓸 때 주로 사용하는 기호에서 따 와 지은 이름이다. “괄호 안에 들어간 극작가의 언어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연극을 떠받치는 동시에 실제 공연 시에 쉽게 생략되기도 하기에, 극작가들끼리 뭉쳐 우리의 존재가 생략되지 않도록 하자는 의미를 담아서 이름을 지었습니다.” 연습실과 극장에서 느꼈던 고립의 감각과 희곡 자체의 문학적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는 소망이 이들을 괄호에 몸담게 했다.
괄호는 2019년 재단 지원 사업에 선정된 뒤 ‘괄호는 괄호와 괄호 사이 괄호가 될 수 있을까(괄괄괄괄)’라는 창단 공연을 올렸고, 희곡 메일링 서비스인 ‘계간 괄호’도 시작했다. “계간 괄호는 10분 단막 희곡과 연작 시리즈인 릴레이 희곡이 두 달 동안 메일링되는 서비스예요. 이때 집필했던 단막 희곡은 오디오 드라마화 작업을 거쳐 ‘듣는 희곡’으로 관객과 독자들을 찾아갔는데, 현재도 괄호씨어터 유튜브 채널에서 언제든 들을 수 있어요. 지난 4월 16일부터 18일까지는 공간 쌀(SSAL)에서 낭독공연을 진행했고요. 이밖에도 [대~ 괄호]라고, 코로나가 심하지 않던 시기에 현재 활동하고 계신 극작가분들을 초대하여 다 함께 맛있는 것도 먹고 극작가로서 활동하면서 느낀 점이나 고충 등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는 네트워킹 파티도 연 적이 있어요. 지금은 온라인 회의의 비중이 늘어난 대신 극장이 아닌 다른 창구로 관객과 소통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게 된 것 같고, 그러한 고민의 결과물이 희곡 메일링 서비스나 희곡의 오디오 드라마화 같은 시도로 이어지지 않았나 싶어요.”
괄호 멤버들은 지원 사업 공모를 준비하면서 입버릇처럼 “우리 오래 보면 좋겠다”, “이거 너무 좋다”는 말을 되뇌었다고 한다. 말과 글이 가진 힘 덕분일까, 이들은 여전히 함께이며 앞으로도 함께할 생각이다. 꾸준히 글을 쓰는 동료들 사이에서 느끼는 안정감, 극작가가 소외되지 않는 프로덕션 내에서의 소속감, 희곡의 문학적 가능성을 공유할 수 있다는 기쁨, 희곡을 통해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다는 기대감까지, 괄호라면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괄호는 온라인미디어 예술활동 지원사업 ‘아트 체인지 업’에서 상을 받았던 듣는 희곡과 관련하여 회의를 진행 중이다. 지난번에 반응이 좋았던 GV의 형태를 개편하고 굿즈도 판매할 요량이다. “기획님도 이번에 모시는 거 맞죠? 기획보조까지 같이 모셔야 될까요, 저번처럼?” “저번의 기획보조님은 디자이너 역할도 해 주셨어가지고. 이번에는 디자이너가 따로 계시니 그 돈을 디자인에 투입합시다.” “이번에는 메일 발송도, 인스타그램 업로드도 저희가 직접 하는 걸로. 저희 이제 인이 박혀서 발송도 잘 하고 그러니까....” 물 흐르듯 논의가 이어지는 가운데 괄호는 생동으로 넘실대는 텍스트가 된다.
괄호
4. 무대미술과 “무유 스테이지 랩”
‘무유 스테이지 랩’의 ‘무유’는 무대 공유의 줄임말이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함의 또한 품고 있다. 2020년 하반기에 결성된 무유 스테이지 랩의 구성원은 무대미술과 전문사 네 사람이다. 무대미술과는 공연예술이 이루어지는 장소인 무대와, 카메라를 매개로 드러나는 매체 공간을 다루는 법을 습득하며 “무대 위, 그리고 한 장면의 시각적 요소를 다룰 수 있는 모든 범주(조명, 영상, 의상, 무대 제작 등)”를 망라하여 배울 수 있는 학과다. 이처럼 다양한 무대미술이 만들어지는 비하인드 과정을 아카이브함으로써 관객과 대중에게 무대미술을 알릴 계기를 마련해 보자는 것이 무유 스테이지 랩 결성의 취지다.
모임의 주최자 최세헌은 16년의 경력과 비례해 쌓아온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블로그 “무유의 무대미술 제작이야기”를 운영해 오고 있다. 2020년 하반기에 동기 이정아에게 블로그 운영에 대한 조언을 구하던 것이 모임으로 만들어지고, ‘무대미술가 열전’이라는 키워드로 발전되고, 서울문화재단 지원 사업 도전으로까지 확장됐다. “한국의 공연, 특히나 연극과 뮤지컬은 해외 각지에서 수상과 초청, 투어를 계속하며 디자인과 시각적 연출력 면에서 세계적인 수준을 인정받고 있어요. 하지만 공연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하면 무대미술이 가지는 인지도나 주목도는 현저히 낮아요. 당장 인터넷에 검색해 봐도 국내에 출판된 공연 제작 관련 서적 대다수가 연출가, 배우, 극작가를 다루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무대미술가 열전은 한국에서 족적을 남겼던 무대미술가들의 무대를 그래픽 작업, 이미지, 글 등으로 재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미 올렸던 공연, 폐기되어 없어진 세트의 남아 있는 도면들을 다시 그려서 이런 내용의 무대들이 이런 기술로 제작이 되었다는 점을 보여 주자는 것이다. 보통 무대를 바라볼 때는 디자인 중심으로 보게 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제작의 측면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는 게 멤버들의 설명이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무대를 알리고 싶어요. 무대의 역사를, 계보를 보여 주어야 현대의 무대도 관객과 공생하며 호흡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무대마다 어떤 제작 과정과 비하인드가 담겨 있는지 보여 준다면 관객들에게도 무대가 더 친근하게 다가올 거예요.”
현재 무유 스테이지 랩은 지원 사업 발표를 기다리면서, 블로그에 무대미술가 열전을 포스팅하는 방식에 대해 논의 중이다. 멤버들은 매주 월요일 밤 열시마다 줌 회의를 통해 모인다. 늦은 밤 시간대와 줌이라는 매개체가 오히려 모임이 지속될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고도 말한다. “20학번이 코로나 학번, 불운의 학번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지금 이 팀을 통해서 코로나 시대에도 함께 모여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이 있다는 것을 배웠어요. 각자 하는 일을 존중하면서 때로는 이렇게 모여 하나의 일을 함께 만들어 내는 게 지금의 사회에 필요한 과정이고 행위이지 않을까요?” 그렇기에 이들은 장기적인 콜렉티브 형태의 모임을 지향한다. 두고두고 회자되는 무대처럼 말이다.
무유 스테이지 랩
5. 영상이론과 “상영기획팀”
영상이론과는 영화와 영상 문화를 둘러싼 다양한 쟁점, 관점, 이론, 기획을 연구하는 학과다. 학생들은 연구자, 비평가, 문화평론가, 기획자 등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훈련받는다. 3학년부터는 세부 전공으로 이론과 기획 중 한쪽을 택해야 하는데, 이론을 중심으로 하는 학과의 특성상 기획 트랙은 격년으로 개편되는 커리큘럼 내에서 변화의 진폭이 크며, 수업 또한 기획서를 검토하는 단계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상영기획팀은 2014년 그에 대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범했다. 이후 매년 3, 4월마다 영상이론과 예술사 재학생 지원자를 대상으로 팀원을 모집하고, 프로젝트 단위로 진행되는 기획 일정에 맞추어 회의를 진행한다.
방송영상과 졸업영화제 협력은 창설 이후 상영기획팀이 주력해 오고 있는 연례행사로 영상원 내 유일한 학과 간 교류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학생들의 자력으로 시작된 해당 행사에서 상영기획팀은 상영 시간표를 프로그래밍하고, 졸업 작품의 비평문을 작성하여 그를 프로그램북으로 제작하며, 영화 상영 이후에는 모더레이터로서 감독과의 대화를 진행하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융합예술센터 AT랩(구 미디어콘텐츠센터)이 주관하고 상영기획팀이 주최한 2020년 제1회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제 <숨(호흡)>의 경우 거리 두기 단계가 강화됨에 따라 온라인 영화제로 전환되어야 했다. 그러나 팀원들은 영화제 컨셉을 정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상영작 선정, 프로그램북 제작, 행사 홍보 등의 역할을 수행하며 정규 커리큘럼에서 얻을 수 있는 것 이상의 많은 실무 경험을 쌓았다고 말한다. “이론과 비평은 아직까지 아카데미의 영역에 유리되어 있다는 인식이 강한데, 얼마든지 필드에서 뛰어 놀며 유통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팀 활동을 통해 그러한 가능성을 실험하고 졸업 이후의 기반을 다져 나가고 싶습니다.”
현 상영기획팀 팀장 안소정이 바라보는 팀의 동력 또한 비슷하다. “초기 활동 멤버들이 모두 졸업하고도 상영기획팀이 유지될 수 있었던 동력은 전공과 관련해 실무 경험을 쌓을 기회가 많지 않은 데 대한 팀원 전체의 갈증과 열정 덕분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준비한 기획이 구상에 그치지 않고 영화제나 프로그램북과 같은 결과물로 세상에 나왔을 때의 뿌듯함이 커요. 주요 활동이 오프라인 상영회에서 이루어졌던 만큼 코로나19에 많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끊임없이 활동의 창구를 모색하고 방안을 고민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이론 없는 기획은 맹목적이고, 기획 없는 이론은 공허하다. 때문에 이론가들은 기획한 바를 보다 실질적인 단계로 밟아나갈 기회를 가져야 하고, 기획자들은 관객과 문화를 매개할 수 있도록 사유의 능력을 키워야 한다. 학과에서 습득한 지식이 현장의 과정이 되고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다는 믿음을 기반으로, 상영기획팀은 대화를 시작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6. 미술이론과 “반짝”
“시각 예술에 관해 공부하다 보면 ‘이미지가 무엇이냐’는 근본적인 질문을 마주하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 습득한 지식을 풀어놓는 차원을 떠나 각자의 논점을 가지고 이미지에 대해 발화해야 할 때가 오죠.” 그러던 차에 읽게 된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반딧불의 잔존』에서 이들은 우리말 ‘반짝’의 뜻풀이와 닮은 미미한 빛의 메타포를 발견하게 된다. “‘작은 빛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모양.’ 어찌 보면 우리가 앞으로 쫓아야 할 이미지의 형상 같았어요. 아주 희미할 순 있지만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잖아요. 우리들의 활동 목적이 그런 이미지들을 보는 힘을 기르는 것이기도 하고요.”
이미지연구공동체 반짝은 실라버스를 구성하여 텍스트를 돌파해 나가는 방식보다는 하나의 대주제나 메인 텍스트를 두고서 그것에서 다른 텍스트 내지는 소주제들을 파생시키는 방법을 선호한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이 던진 화두에 나름의 결론을 내리기 위해 디디-위베르만의 텍스트는 물론 칸트, 니체, 아렌트, 들뢰즈, 바르부르크, 마르쿠제 등을 읽어 나가는 식이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지금까지 총 3개의 프로젝트(<반짝-일어남>, <반짝 흩어짐>, <반짝_눌러냄>)를 진행했고, 각각 학술 세미나, 렉처 퍼포먼스, 웹 퍼블리싱으로 형식을 달리했다.
수료생과 졸업생으로 구성된 반짝이 지금까지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구성원들은 “서로 다른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고, 그 사실을 존중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매번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마다 한 명이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애를 써요. 신기한 건 그 부담을 서로 돌아가면서 진다는 거죠. 애초에 각자가 고유한 영역과 개별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기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닐까 싶은데요.” 모임을 통해 얻어갈 수 있었던 심리적 안정감도 빼놓을 수 없다. “동료보다는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만날 수 있다는 데서 오는 위안이 커요. 텍스트가 범람하는 시대에는 아무도 서로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는데, 적어도 이 사람들만은 나의 독자가 되어 줄 거라는 믿음이 있어요.”
세 번째 프로젝트를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은 반짝이 최근 골몰하고 있는 주제는 동시대 이미지생태계에서 다큐멘터리가 가지는 새로운 위상에 대한 것이다. 구성원 중 한 사람은 관련된 주제로 하반기에 전시를 기획 중이다.
코로나19로 인해 불가피해진 비대면 화상회의에 대해서는 모든 모임의 구성원들이 공통적으로 피로감을 토로하고 있다. “팀의 주요 활동이 오프라인에서 이루어졌던 만큼 기획의 방향성이 달라지고 일정이 밀리기도 해요.” “실제로 논의를 진행하는 시간보다는 함께 웃고 떠들면서 발생되는 이야기가 프로젝트에 더 큰 영향을 주었는데,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면서 비대면 회의의 효율성에 대해 성찰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가능한 한 오래오래 이어질 우리들의 랑데부에는 소등도, 알람도 없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