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렁에 빠진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만들어낸 허상과 집착은 스스로를 옭아매는 억압이 되곤 한다.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결국 스스로를 수렁 속에 빠트렸던 자신과 마주해야만 한다. 그때야 비로소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 가는지 어렴풋이 알게 된다. 내가 만들어낸 환상과 그것을 계속해서 부정하는 모순 사이에서 삐걱대며 어긋나는 자신을 마주할 때, 비로소 삶을 다시 써나갈 수 있다.

뮤지컬 〈호프: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이하 〈호프〉)은 이스라엘 국립 도서관과 주인공 에바 호프 사이에 요제프 클라인의 미공개 원고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오랫동안 진행되어왔던 재판의 마지막 날을 다룬다. 에바 호프는 30년간 재판에 출석하면서도 요제프의 미공개 원고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원고를 지키는 것이 자신을 증명하는 일이며, 앞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읽히지 않았던 원고처럼 방치해뒀던 호프의 인생이 마침내 자기모순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까지, 뮤지컬 〈호프〉는 그의 세상을 다시금 펼쳐낸다. 그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원고는 호프에게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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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라는 책갈피를 열 때마다
뮤지컬 〈호프〉는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소송』에 관한 일화를 모티프로 만들어졌다. 〈호프〉에서 요제프가 자신의 친구 베르트에게 자신의 원고를 불태워 달라고 부탁하듯, 카프카는 사망하면서 친구인 막스 브로트에게 자신의 죽음 이후에 발견되는 원고들을 불태워 달라고 요청했다. 브로트는 『소송』, 『아메리카』, 『성』 등의 카프카의 미공개 원고를 가지고 독일군을 피해 이스라엘로 도망쳐 살다가 자신의 비서였던 에스더 호프라는 여성에게 가지고 있던 모든 원고를 전달하게 된다. 이후 에스더 호프와 이스라엘 국립 도서관은 프란츠 카프카의 미발표 원고의 소유권을 둘러싼 재판을 하게 된다. 체코 사회의 이방인이었던 카프카가 쓴 『소송』의 사건 특징은 기소되자마자 유죄가 되는 사건들이기에 해명이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소송』에 등장하는 K는 계속해서 자신을 해명하려 해도 그 굴레에서 빠져나갈 수 없고 자신이 만들어 놓은 미로들을 헤매는 과정을 겪는다. 뮤지컬 〈호프〉에 등장하는 원고 K와 에바 호프의 재판도 이 일화와 카프카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K라는 이름을 참고했다.

〈호프〉의 시대적 배경은 독일이 체코를 점령한 시기인 2차 세계대전이다. 베르트는 친구 요제프의 미공개 원고를 보관하던 중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자신의 연인 마리(에바 호프의 엄마)에게 원고를 맡긴다. 그 후 평생 원고를 목숨처럼 지키는 엄마를 호프는 원망하지만, 그녀 역시 삶에서 많은 상실을 김연주경험하며 어느새 점점 엄마처럼 원고에 집착하게 된다. 〈호프〉의 특별한 지점은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던 요제프의 미공개 원고 K가 무대 위 캐릭터로 육화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호프 인생의 중요한 사건마다 의인화된 원고 K가 호프를 대하는 태도를 살필 수 있다. 원고 K를 지키고자 하는 호프와 동시에 호프를 지키고자 하는 원고 K가 있다. 호프가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달래기도, 다그치기도 하다가 그동안 함께 해왔던 호프와 애틋하게 인사를 나누는 K의 넘버들을 통해 관객은 호프를 살리는 것도, 망치는 것도 K라는 모순된 상황과 마주한다. 요제프의 원고는 호프가 꿈꾸는 구원에 대한 환상인 동시에 자신을 가두고 스스로를 계속 벌해온 또 다른 에바 호프인 것이다.

뮤지컬 〈호프〉의 무대는 호프의 여정 자체를 책의 중요한 챕터를 펼치는 것처럼 시각화한다. 오래된 서재를 표현하고 싶었다는 연출가 오루피나의 인터뷰처럼 무대는 오래된 책장에 쌓인 책의 모양을 하고 있다. 〈호프〉의 무대 공간엔 과거의 호프와 현재의 호프, 그녀를 둘러싼 앙상블, 그리고 관객석까지 여러 개의 레이어가 존재한다. 무대는 호프의 인생을 담고 있는 오래된 책장이며, 한 가운데에서 재현되는 어린 호프를 중심으로 인생의 중요한 사건들은 책갈피처럼 펼쳐진다. 늙은 호프는 어린 호프와 엄마 마리의 기억이 재현되는 공간의 바깥에서 가만히 그들을 바라본다. 겹겹이 겹쳐진 공간은 과거의 기억을 두고 빙빙 도는 늙은 호프의 이동을 부각시키면서 호프의 인생을 보여주어 그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도록 만든다. 늙은 호프는 자신의 기억을 바라보면서 슬픈 날들은 가만히 목격하고, 기쁜 날들은 멀찍이 외면하기도 하는데 이는 호프가 자신의 인생을 대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망가진 삶을 살아가는 중에 과거의 행복했던 기억을 외면하면서 자신을 더더욱 구석으로 몰아넣는 건 호프에게 익숙한 일이다.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은
호프의 삶이 지금 우리 앞에 다시 소환되어야 하는 이유는 인생에 대한 보편적인 진리와 함께 우리 시대에 새로이 발견할 수 있는 지점들이 있기 때문이다. 뮤지컬 〈호프〉는 에바 호프라는 노인 여성이 겪은 세상을 다루면서, 그동안 미친 여자라고 불리던 에바 호프가 세상의 기준을 새롭게 쓸 가능성을 보여준다. 늙은 호프는 여러 각도에서 과거의 자신을 살피는데 이는 그동안 호프를 궁지로 내몰리게 했던 세상의 여러 가지 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유대인으로 수용소 생활을 해야만 했던 노래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와 도와줄 것이라 믿었던 카델이 호프를 가스라이팅 하는 〈인생은 B와 D 사이의 CHANCE〉를 보자. 지옥 같은 일상을 버티기 위해선 원고 K가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환상이라도 붙잡고 살아가야만 했던 것이 어렸던 호프의 세상이었다.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죽임당하지 않고 죽이지도 않고서. 굶어 죽지도 굶기지도 않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1

호프의 세상은 이방인이자 여성으로서 부정되었던 일상을 마주하고 다시 살아내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세상과 일정 부분 닮아있기에, 무대 가장 바깥의 레이어였던 관객은 호프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로 넓힌다. 아무리 방치된 삶이었더라도 우리의 삶은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다고 용기내고, 앞으로 써나갈 날들에 대한 기대를 품어본다. 호프를 구원케 하는 것은 원고 K도 카델도 아니었다.
결국 호프의 인생을 구원한 것은 스스로를 궁지로 몰아넣은 또 다른 자신을 마주하고 나락에 빠진 자신의 인생을 마주하는 일이었다. 두렵기 때문에 숨기고 외면했던 스스로와 대화하며 깊은 수렁을 마주하는 일은 그동안 읽히지 않았던 인생을 읽는 것이다. 여전히 책장에 무수히 꽂혀있는 읽히지 않은 또 다른 인생의 이야기들이 있다. 읽히지 않았던 많은 인생들, 망가진 일상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존엄하게 여기면서 삶을 이어나갈 무수한 이야기들이 궁금해진다.

글 김연주
1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장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