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악가로서 자신의 역량을 후대에 전승하는 교육자이자 한국가곡의 명맥을 이어가는 문화의 계승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성악과 임웅균 교수를 만났다. 그는 2000회가 넘는 국내외 공연 경력을 가진 베테랑 성악가이면서 〈열린음악회〉와 같은 음악 프로그램을 통해 꾸준히 대중과 클래식 그리고 한국가곡의 가교 역할을 한 국민 예술가이기도 하다. 40년 동안의 교직 생활을 마무리하며 새로운 시작을 준비 중인 그에게 지금까지 쌓아온 교육과 성악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았다.
정년을 지나, 다시 시작하기
요즘은 음악회를 준비하고 있어요. 제 정년퇴임 음악회인데, 퇴임이라는 말은 마음에 안 들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다시 시작이다, 정년이 곧 새로운 시작이다, 이런 의미로 제목을 〈비욘드 65: 뉴 스타트 콘서트〉라고 지었어요. 제 나이가 만 65세는 지났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정년이 곧 65세 아닙니까? 그래서 비욘드 65. 다시 말해서 65세를 넘어 새롭게 시작한다는 그런 의미를 담은 음악회입니다.
성악가가 되기까지
어릴 적에 제가 나폴레옹을 진짜 좋아했어요. 지금도 가끔 꿈에서 권총을 차고 다녀요. 그 정도로 원래는 군인이 되고 싶었어요. 육군사관학교를 갈 수도 있었죠. 그런데 어머니가 너는 워낙 주장이 강하고 창조적인 면도 강하니까 군대 가면 적이 많을 것 같다며 만류했어요. 그러면 주장이 강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요? 예술이죠. 아니면 정치. 어머니는 저에게 제가 좋아하는 걸 하라고 했어요. 가만 생각해보니까 중학교 2학년 때 노래를 했더니 이송매 선생님이 “야 너는 성악해야 돼” 이렇게 말씀하셨거든요.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그걸 기억하고 있었죠. 그때까지 음악 시간만 되면 선생님들이 저를 시키기도 했고. 저는 제가 노래 잘하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때 만났던 선생님께는 지금도 감사해요. (제가 뭘 잘하는지) 너무 잘 가르쳐주셨던 거예요. 그래서 노래를 시작했고 대학교 성악과 수석합격에 수석졸업까지 하게 된 거예요. 그렇게 시작한 성악이 오늘날에 이르게 된 거죠.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기
제가 처음에는 바리톤이었어요. 6개월을 바리톤 음역에 있다가 고음이 조금씩 나기 시작했어요. 그랬더니 당시 선생님께서 테너를 시도해보자 하셨고 테너를 하게 됐어요.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서도 3학년 때까지 항상 고음에 대한 공포가 있었어요. 그게 제가 이탈리아에 간 이유에요. 처음에는 바리톤, 다음은 리릭 테너1에 중간 수준의 볼륨을 가지고 있다가, 이탈리아에 가서 발성을 더 배우면서 드라마틱한 스핀토 테너2로 바뀌는 과정이 있었어요. 저는 바리톤에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밑의 도에서 위의 도까지, 그러니까 3옥타브를 낼 수 있죠. 그런 점에서는 저는 참 특이한 음역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악을 가르친다는 것
학생의 특성에 맞게끔. 그게 중요해요. 학생의 소리를 딱 들어보고 이 아이는 소리를 크게 내면 혈압이 너무 올라가겠다, 이런 생각까지 할 수 있어야 하는 거죠. 저는 학생의 건강 상태까지 보면서 가르쳐요. 무리하다가 목이 망가지는 경우도 있거든요.
성악을 가르친다는 건 비법의 전수에요. 제가 항상 얘기하는 것 중에 우선 좋은 가수나 좋은 음악 선생님이 갖춰야 할 세 가지 조건이 있어요. 첫째 음정을 정확하게 가르쳐줄 것. 둘째 학생이 가진 최고의 음색을 찾아낼 것. 셋째 음량을 키워줄 것. 음정을 제대로 교육하고 코르위붕겐(Chorübungen), 콘코네(Concone) 같은 발성의 기본기를 완벽하게 닦은 다음에 음량을 키워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산수도 제대로 못 하고 삼각함수를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죠. 그리고 (음정, 음색, 음량) 이 세 가지 안에서 벌어지는 엄청난 이론들이 바로 벨칸토(Bel Canto, 아름다운 노래)3 창법이라는 겁니다.
목소리에서 벨칸토로
벨칸토 창법을 위해선 우선 첫째로 목을 열어야 해요. 그걸 이탈리아어로 보미토(vomito), 즉 “토하듯이”라고 해요. 토할 때 본능적으로 완전하게 목을 열어주기 위해 후두가 아래로 내려가게 돼요. 이렇게 토하듯이 목을 여는 사람은 소리의 톤이 일정하죠. 두 번째는 저음과 고음의 음색이 일치할 것. 세 번째는 가사를 정확히 전달하고자 할 것. 네 번째는 심리적인 요법이에요. 자신감. 선생이라면 이걸 키워주기 위해 굉장한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정신적인 부분까지 지도해야 해요. 다섯 번째는 화학적 요법이에요. 달달한 음료가 노래하기 전에 좋아요. 에너지를 공급해주니까. 빨리 흡수되는 이온음료도 좋고요. 저혈압 환자일 경우에 커피도 좋아요. 세계적인 테너였던 엔리코 카루소(Enrico Caruso)는 성대가 안 좋을 때 위스키 한 잔으로 성대를 마찰시켜서 효과를 보는 방법을 썼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발성법이에요. 모음에 따라서 발성할 때의 음색이 다 달라요. 음정을 잡을 때 하는 발성 “시에 오아 이에 오아 이”를 예로 들어 보죠. 이게 다 이론에 근거한 발성이에요. “시”는 소리의 길, 소리가 나오는 길을 닦는 거예요. “에”는 소리의 힘. 투란도트(Turandot)의 〈아무도 잠들지 말라(Nessun Dorma)〉에 나오는 “빈체로(vincerò)!”란 가사를 예로 들 수 있겠네요. “아”는 소리의 색이에요.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Don Giovanni)〉에 “일 미오 테소로 인단토(Il mio tesoro intanto)”라는 가사가 있죠. 이때, “단”에서 색깔이 확 좋아져요. “아”가 많이 나올수록 그 노래는 굉장히 화려해져요.
마지막으로 “오”와 “우”는 피아니시모, 여린 음이에요. 〈사랑의 묘약〉에서 주인공 네모리노가 자신이 짝사랑 해온 아드나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확인했을 때, “우나 푸르티바 라그리마(una furtiva lagrima)”로 노래를 시작해요. 그 감동을 포르테로 시작할 수는 없죠. 그래서 여린 음색을 가진 “우”로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마저도 이론을 넘어서야 할 때가 와요. “우”를 잘못 부르게 되면 그 모음이 무성음이기 때문에 소리가 덜 울려서 안 들릴 때가 있어요. 이걸 유성음으로 바꾸는 게 벨칸토예요. (우 앞에 오를 넣어서 위로 올라가듯이) “오우나 푸르티바 라그리마” 이렇게 되는 거죠. 이걸 지나치게 하는 빌라존(Rolando Villazón) 같은 경우에 소리가 회오리처럼 회전하면서 올라가요.
한국 성악가 중에선 조수미 씨가 그렇게 해요. 그래서 조수미 씨 소리는 긴장감이 계속 있고 늘어지지 않는 거예요. 그걸 높이 평가해 줘야 해요. 혹자는 비브라토를 많이 쓴다고 그러는데, 그 비브라토는 말 그대로 천연적인 비브라토인 셈이죠.
독자이자 인문학자로서의 성악가
인문학을 모르는 사람이 노래하면 그냥 쟁이고 꾼밖에 안 돼요. 일가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이 못 되죠. 노래하기 위해 가사를 잘 읽으려면 시에 대한 장모음, 단모음, 설모음, 폐쇄음까지 다 연구해야 해요. 가령 김동명의 〈수선화〉에서 “그대는 차디찬 의지의 날개야”의 “그”가 폐쇄음이거든요. 그래서 목소리가 안 나가니까 이걸 전달하려면 성대를 더 쳐야 해요. 벨칸토의 이론을 적용해야 하는 거죠. 이걸 일상에서 말하듯이 부르면 목소리가 나가다가 멈춰버려요. 노래할 땐 이런 것까지 생각해야 해요. 아, 이게 폐쇄음이구나, 양성모음이구나, 음성모음이구나. 그런데 아무 생각 없이 부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외국어 노래는 당연히 가사 원문을 번역해보고 그 언어를 쓰는 나라에 가서 일주일 정도는 살아 보면서 손짓, 발짓으로라도 밥은 얻어먹을 정도는 돼야 해요. 그게 안 되면서 노래를 한다? 그건 앵무새죠.
한국의 시와 성악: 한국가곡의 명맥을 이어가기
우리 학교의 자랑거리가 있어요. 전국 대학 중에서 유일하게 한국가곡을 4학점짜리 정규과목으로 커리큘럼화 했다는 거예요. 이게 1997년도였어요. 당시 총장이셨던 이강숙 총장님, 이건용 교수님, 허영한 교수님, 민경찬 교수님이 도움을 주셨죠. 학생들에게 배부하는 그 수업교재는 시중에도 없어요. 모두 희귀곡만 있고. 처음 보는 악보들이 많아요. 우리가 발표를 해줘야 해요. 시가 죽어있는 사회는 죽은 사회거든요. 지금까지는 저도 (이 수업을) 정립시키기 위해서 노력을 해왔고 이제는 우리 학교에 대한민국 최고의 이론가이신 민경찬 교수님이 계세요. 이분이 사라지면 한국가곡이 없어질지도 몰라요.
유럽의 모든 나라가 대학에서 대부분 자기네 음악을 가르쳐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200군데 대학의 성악과 중에 우리 학교만 한국가곡을 가르쳐요. 그러니까 0.5퍼센트만이 명목을 지키고 있는 거예요. 교육의 목적은 사람을 남기는 거고 결국 문화는 승계해 줘야 하는데 말이에요. 이런 상황에서 우리 학교의 본래 목적이 국적 있는 교육을 하자는 것이었고, 저는 거기에 충실한 교수였다고 자부할 수 있어요. 가곡이 죽으면, 그러니까 음악에서는 순수예술이 죽으면 아무것도 발전할 수 없어요. “퐁당퐁당 돌을 던지자 누나 몰래 돌을 던지자(윤석중 작사, 홍난파 작곡, 〈퐁당퐁당〉, 1927)” 얼마나 좋아요. 이걸 듣다가 무대에 올라서 “수많은 날은 떠나갔어도(이수인 작시/작곡, 〈내 맘의 강물〉, 1985)”하고. 멋지잖아요. 그러다가 베토벤 9번 심포니를 듣게 되고 모차르트도 듣고 우리의 순수 아방가르드 작곡자의 노래도 듣고. 그렇게 발전해 나가는 거예요.
음악을 공부하는 제자들에게
사람이 사람을 남기는 작업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는다면, 예술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요. 사람이 사람을 남기는 작업을 해야 된다는 건, 말 그대로 예술이라면 돈을 벌겠다고 하는 것보다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이상적인 것을 실현해가면서 다른 이들의 정서까지 함양시키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는 거예요. 이건 사실 인문학의 가장 높은 가치에 해당하는 거예요. 저는 음악이 인문학의 가장 주류에 있다고 생각해요.
인터뷰는 돌연 시작되는 그의 노래와 많은 이야기로 마치 한 편의 오페라처럼 진행됐다. 제한된 분량으로 인해 모든 이야기를 담아내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그가 말하길 성악의 궁극적 목표는 “신과의 대화”이며, 아름다운 노래, 즉 벨칸토란 파바로티의 표현대로 “어린이의 목소리를 다시 찾아가는 것”이다. 노래하기에 앞서 역설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아야만 하는 모든 성악가처럼, 그 또한 앞으로 찾아올 변화 속에서 다시, 새롭게 시작하길 바라며 무한한 응원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