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겨울과 이른 봄 사이.
다가올 새봄 같은 햇살에 설레 오랜만에 두꺼운 옷을 벗고 가볍게 코트를 입었던 날, 다수의 공유주택과 공공 공간 재조직 작업을 진행해 온 미술원 건축과 김태영 교수를 만났다. “좀 어려운 질문인데요.”라고 조심스럽게 운을 뗀 대답에서 신중함이 엿보였고, 그간 해온 넓은 스펙트럼의 작업을 이야기할 때는 뚜렷한 철학과 멋을 읽어낼 수 있었다. 이 설렘을 지면에 다 담아낼 수 있을까 조바심 내며 그와 나눈 문답을 정리해보았다.


교수님이 생각하시는 건축 설계의 매력은 뭘까요? 그 안에서 어떤 즐거움을 찾으셨나요?
건축은 참 다양한 단계에 걸쳐 있어요. 머릿속에 있는 몇 개 안 되는 선일 수도 있고 종이 위에 더 많은 정보와 글과 합쳐져 설명이 되기도 하고 도면이라는 방법으로 변환되기도 하고요. 또 비물질부터 물질까지 다 연관이 돼요. 어느 건물도 항상 똑같지 않아요. 계절과 기후에 따라, 누가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져요. 건축은 여러 단계에 맞닿아 소통, 이해, 해석되는데 그 과정이 복합적이라는 게 건축의 매력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그 복합성을 즐겨야만 건축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으면 어려운 점이 많을 거예요. 어렵거든요. 집요하게 끝까지 밀고 나가며 발전시켜가는 과정이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프로젝트나 단계별로 즐거움의 차원이 달라요. 공동체 주택은 빠듯한 예산 안에서 많은 분들의 바람을 엮어서 이제껏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드는 즐거움이 있고, 런던에서 했던 일은 써보지 않은 재료나 해보고 싶던 독특한 디자인을 실현해보는 즐거움이 있었고요. 여러 직능들이 만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라 그 의사소통이 쉽지만은 않아요. 마찬가지로 인허가 과정 역시 지난하기 때문에 앞서 말한 즐거운 순간들과 건축물이 지어지고 나서 사용자들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는 것, 이 두 가지가 없다면 건조하고 힘들어질 수 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어반토폴로지’라는 설계사무소 이름도 그렇고, 위상 즉 관계에 관한 고민이 깊으실 것 같습니다. 실제 설계 작업을 하실 때 가장 염두에 두시는 포인트가 무엇인가요?
건축 설계를 할 때 많이 사용하는 특정 단어들이 있어요. 유형이나 지형처럼요. 그런 관점을 고민하다가 토폴로지(topology)1라는 수학적 용어를 알게 됐어요. 스케일과 상관없이 적절한 변형을 하다가 그 형태가 찢어지거나 절단나지 않았을 때까지 변형했을 때 같은 관계 형상을 갖고 있으면 같다고 보는 거예요. 아까 복합성을 말씀드렸는데요, 한때는 집이라고 하면 특정 유형이 있었어요. 그 유형 내에서는 가구를 어떻게 다르게 배치하느냐 문제일 뿐이지 공간이 가진 관계 때문에 살아가는 방법은 되게 비슷했거든요. 지금은 사회가 복잡해지고 가족의 형태가 달라지고 스케일이 커지고 이제껏 있지 않던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이 차이를 이야기하려면 관계가 중요할 수밖에 없어요. 이전에 있었던 관계와 전혀 다른 관계로 공간이 연결되어야 하거든요.
공동체 주택 설계를 할 때 이전에는 고려하지 않았던 관계들을 유심히 살폈어요. 한 집안에서 다섯 부부가 살고 이들의 공유공간이 4, 5단계 레벨로 있고 항상 마주치는 게 불편할 수 있으니 우회로도 만들어야 하고. 예전에는 동선도 여기서 저기까지 가는 동선 하나만 설계하면 됐겠지만 여기서는 우회로도 있어야 하고 숏컷도 있어야 해요. 관계 다이어그램을 그리는 게 도움이 돼요. 그 관계가 어떻게 정의되느냐에 따라서 오히려 이전에 있지 않던 사회적 관계가 만들어지기도 하고요. 바람이 통하거나 공기가 흐르지 않았던 곳도 흐르게 할 수 있어요. 위상은 안에서 너와 나의 관계일 뿐 아니라 내부와 외부의 관계이기도 하거든요. 위상의 관점을 갖게 되면 이전까지 유형이나 지형에서는 볼 수 없던 관계를 더 반영할 수 있게 되죠. 그래서 그 부분에 더 초점을 맞추게 되는 것 같아요.

다수의 공유주택 설계와 공공 공간을 재조직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셨고, 2018년에는 은혜공동체협동조합주택으로 서울시건축상을 수상하셨습니다. 공동체, 공유 공간, 공간재생 등에 특별한 관심을 두시는 이유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대학원 졸업 후 모더니즘 건축의 대가 민현식 선생님 사무실에 들어가 수학하며 많이 배웠는데요, 저만의 지향점을 정리하진 못했어요. 건축 설계로 무엇을 해보겠다는 생각도 없었어요. 특히 건축 설계로 비평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은 생각도 못 했거든요. 런던에서 비용이 문제가 안 될 만큼 무한한 자원을 가진 건축주들과 일을 하다가 약간 허무한 생각이 들었어요. 건축은 사용자와 인터랙션도 중요하거든요. 다 정리하고 서울에 들어오면서 여태 했던 것과 다른 것을 하고 싶었는데 선배가 공동체 주택을 설계해보지 않겠냐고 제안을 했어요. 공동체 주택은 함께 살고자하는 분들이 모여서 같이 사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요. 난생 처음 겪는 독특하고 다른 과정이라 정말 열심히 재미있게 했는데 사실 당시엔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 몰랐어요. 그분들이 말씀하시는 삶을 최대한 잘 담는 데에 중점을 두고 진행했는데, 나중에 돌아보니까 위상적으로 여기 이런 게 생겼구나 하고 파악이 되더라고요.
비슷한 시기에 성동구청 책마루 건축을 의뢰 받았어요. 쓰임을 잃은 공간을 어떻게 잘 쓰일 수 있게 할까 고민했어요. 공공건축은 중립적이고 성격 없는 것, 반면에 특정한 것 이 두 축을 어떻게 맞추느냐는 딜레마가 있어요. 단지 다양한 사람이 공간을 함께 쓰는 문제뿐만 아니라 그것을 운영하는 다양한 주체 사이의 협력 역시 중요해요. 해결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우리나라 공공기관은 부서 간 칸막이 행정이라는 문제가 있거든요. 그 어려운 문제를 구청 4개 부서와 건축가가 함께 해결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어요.

한예종 건축과만의 특징이 있을까요?
건축사 자격증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청강이나 타과 참여가 어렵고 편입도 안돼요. 영국체계(RIBA)와 한국인증체계(KAAB) 양쪽에서 갖춰야할 덕목을 모두 가르쳐요. 특히 설계수업은 스튜디오제로 운영되는데 정확한 의미에서의 스튜디오 교육은 아마 우리 학교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스튜디오마다 독특한 특징이 있고 그 안에서 개별 학생이 스스로 프로젝트를 만들어서 진행하는 독특한 커리큘럼을 1년 과정으로 5년간 반복해서 끝내게끔 해요.
또 드로잉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요. 손 드로잉부터 기술에 기반한 드로잉까지, 다양한 매체와 드로잉에 대한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을 지향하고요. 특히 4, 5학년을 대상으로 한 고급스튜디오에서는 건축을 통해 창의성뿐 아니라 비평적 측면, 사회를 성찰하고 선언을 던질 수 있는 부분을 추가로 집중하고 있어요. 이론과 매체 교육을 잘 통합해서 이론과 실천, 기술과 예술 그런 부분에 대한 균형감각을 가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건축가라는 직업을 교수님만의 언어로 새롭게 정의한다면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까요?
시대와 클라이언트에 따라 건축가에게 요구하는 바가 많이 달라요. 문제 해결을 기대하기도 하고, 어쩔 때는 예술성이 강조된 결과물을 원하기도 해요. 한 시대 안에서도 요구하는 바가 다양하고요. 옛날 비트루비우스2도 그랬듯 강, 용, 미처럼 건축을, 그리고 건축가를 여러 가지로 정의해요. 한예종 건축과의 교육 목표는 창의적인 예술인으로서, 전문적인 직능인으로서, 사회의 중재자를 양성하는 거예요. 사회적 중재나 조정을 하는 부분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어요. 세상은 확실히 점점 더 복잡해지고 우리가 알았던 지식이나 분야가 유효하지 않게 되는 걸 느껴요. 건축도 그렇게 변화하거든요. 설계 스튜디오 수업에서도 인공지능 시대에 건축가라는 직업이 어떻게 될 것인가 논의하곤 하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건축가라는 직업을 리더십이 있으면서 복합성을 다루는 사상가라고 생각하거든요. 또 건축가의 툴로 건축가를 정의하자면 건축 드로잉이라 할 수 있어요. 세상이 아무리 많이 바뀌어도 건축가의 무기는 건축 드로잉이에요. 상이 변하고 건축가가 하는 일은 다변화될 테지만, 우리의 무기는 바뀌지 않을 거예요.

작년 8월 한예종 건축과에서 주영한국문화원과 함께 개최한 <Seoul Unfolded> 전시 기획을 하셨는데요, 코로나 탓에 아쉬운 점도 있고 또 학생들과 함께 해서 의미 있는 지점도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매년 목표를 향해 달리다보니 큰 지향점과 목표는 있는데 우리가 어디쯤에 있는지 모를 때가 많아요. 이번 전시는 한예종 건축과에서 어떤 교육을 하고 어떤 결과물이 만들어지는지 되돌아보자는 취지로 5년간의 작업을 모았어요. 학생들은 저마다 창신동 봉제골목, 익선동 골목 등 같은 특정 장소를 기반으로 리서치를 하고 자기 프로젝트를 만들어갔는데 작업 퀄리티가 굉장히 높아요. 특정 장소에 얽힌 한 시대를 면밀히 조사하기 때문에 한 사회에서 벌어지는 경제적인 변화 같은 좀 더 앞선 인사이트를 가지기도 했죠. 그러한 작업 과정을 매핑, 아카이빙 하면서 우리가 어떤 패턴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파악하는 데에 도움이 됐어요.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때 연속성을 알지 못 하면 어디로 가는지 잘 모른다고 생각해요. 학생들의 작업과 현재가 중요하지만, 이전 선배들이 봤던 관점들이 또 있어요. 그것들을 알고 차이가 뭔지를 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요. 오프라인 전시가 있었다면 함께 좀 더 나눌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만 이 상황에 이런 불평을 할 순 없으니, 온라인 전시라도 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교수님의 요즘 최고 관심사는 무엇인가요?
안식년 이후 학교로 돌아가는 게 좀 두려워요. 여태 수업에서 저의 관심사와 제가 하고 싶은 주제를 던지고, 학생들의 작업을 재밌게 바라보며 여기까지 왔는데 안식년 이후 좀 더 책임감 있는 교육자로서 무엇을 어떻게 더 잘 가르칠 것이냐 고민하고 있어요. 유튜브에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강의를 보게 됐어요. 몇 년 전부터 이슈였지만 그 메시지가 지금의 저에게 크게 와 닿았어요. 내가 속한 커뮤니티는 하나가 아니에요. 항상 우리가 공적인 것을 다룰 때는 서로 상충해요. 한 커뮤니티 안에서 가장 공동의 선이 두 개의 커뮤니티 사이에서는 아닐 수 있거든요. 그때 우리가 무엇에 근거한 결정을 내릴 것인가에 대해 철학적인 질문을 많이 하세요. 그걸 유심히 들으며 학생들하고 설계 작업을 진행하고 싶어요.
코로나를 겪으며 사회가 공유나 소통이 더 어려워진 것 같아요. 공공 공간도 자꾸 닫으니까 힘을 잃어요. 집에서만 생활하는데 고립의 문제도 있고. 온라인 공간은 어쩔 때 마치 우리가 더 연결된 것처럼 느끼게 해요. 그렇지만 연결되지 않은 사람들하고는 더 멀어지죠. 학생과 교수의 관계도 점점 교육 서비스 제공자와 받는 자로 바뀌는데 내가 스튜디오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이 사람을 잘 교육해서 사회로 나갔을 때 필요한 기능교육을 하면 되지 근본적인 질문은 왜 하냐는 의문도 들고요. 그렇지만 건축가로서 눈앞의 이익만 보고 산다면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이상을 넘어가지 못해요. 내가 속하지 않은 커뮤니티 이상의 것을 이야기 할 수 있어야 내가 하는 일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도시에서 사는 이상 우리가 근본적으로 어떻게 같이 살 것인가 이것에 대한 고민은 해야 할 것 같아요. 도시의 효율은 나 혼자 할 수 없는 것을 함께 모아 잉여의 가치를 이뤄내는 데 있어요. 모든 간을 사적화 해서 더 고립시키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사는 방법을 재조직해야 하는 건데, 그것이 공공건축이 나아가야 할 길 같아요. 학생들의 설계 프로젝트를 통해 그 해답을 찾으며 1년을 보내는 것. 그것을 매우 기대하고 있습니다.

건축가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매년 입시 때마다 하는 질문이 있어요. 미디어에서 잘못 포장해서 건축가를 되게 멋있게 생각하는데, 물론 많이 접하셨듯이 멋있는 분들 있어요. (웃음) 사실 건축가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고 그 이야기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자신의 입장을 명확하고 예리하게, 지혜롭게 건축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해요. 모든 직업이 그렇지만 결코 단순하지가 않으므로 다양한 매체와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건축가라는 게 무엇인지 이해하고 지원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을 때는 그것이 무엇인지 정말 집요하게 알아보고 꿈을 꿔도 좋거든요. 제가 건축을 하게 된 계기가 너무 단순했기 때문에, 제가 못했기 때문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이런 말씀을 드려요. 우리나라 교육 특성상 분석적인 것은 잘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상대적으로 직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아요.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자기 안에 있던 가치나 바람을 표현하는 걸 약간 두려워해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가 어떤 특정함을 지향하는지 정의할 수 있어야 해요. 보편화, 추상화, 일반화시키는 거 말고 굉장히 특정하게 하나하나를 절정에 닿을 수 있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해요. 특정함에 대한 집요함, 직관적이고 분석적인 눈. 그 균형을 맞추는 게 무엇보다 중요해요.

글 박예슬 사진 표기식 영상 이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