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동역에 내려 어두운 샛길을 지나 플랫폼 엘에 도착했다. 지하 2층 플랫폼 라이브는 밝은 화이트 큐브의 본모습을 감춘 채 관객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4명의 퍼포머가 무대 중앙에 원을 그리며 서 있고 관객들은 그들 주위로 둘러앉는다. 이 모두를 둘러싼 스피커에서 진동이 발생하고 있다. 스크린은 한쪽 벽면을 채운다. 미리 체험을 신청한 네 명의 관객은 HMD(Head Mount Display)를 쓰고 공연에 참여하게 된다. 나머지 관객들은 눈앞의 실제 움직임과 스크린을 통해 중계되는 가상세계를 동시에 관람한다. 참여형 VR 퍼포먼스 〈이중으로 걸어다니는 자 : 도플갱어 Doppelgänger〉는 VR 기술을 이용해 삶의 세계에서 죽음의 세계로 이르는 경험을 제공하는 융합예술 공연이다. 공연이 끝난 후 이 작품의 연출을 맡은 주다은(미술원 조형예술과), 사운드를 담당한 김은준, 심채윤(음악원 음악테크놀로지과), 그리고 안무자이자 퍼포머였던 유지영, 이종현, 이예지, 김용빈(무용원 창작과)을 만났다.
퍼포머와 참여 관객의 실제 위치와 행동이 가상세계에 구현되는 VR 기술을 이용한 공연이었습니다. 가상현실에 구현된 이들의 신체는 꼭 죽은 사람의 영혼과 신체가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주제인 ‘죽음’에 대해 다루게 된 과정이 궁금합니다.
주다은: 저는 미술의 영역이 과학이나 기술의 영역과 함께 상생하는 융합예술 작업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개별적이지만 사실상 모든 이가 경험하는 보편적인 것이기도 해요.
이 부분에 착안해서 관객들이 VR 기술을 통해 공동의 가상공간에 접속해서 체험해보는 작품을 생각했어요. 작품에서 삶의 세계에서 죽음의 세계로 넘어갈 때 관객은 HMD를 착용하고 무용수들과 함께 움직입니다. 저는 죽음을 아직 경험해보지 않아서 정확한 느낌을 알 수 없지만 제가 상상한 무드나 이미지를 그래픽 작업을 거쳐 VR 속 캐릭터로 구현하려고 했어요. 비교적 삶의 세계에 가까운 입장인 관객들, 다시 말해서 이제 막 죽음의 세계로 입장한 분들은 현실의 몸과 같이 물질적인 부분들이 뚜렷하게 두드러지는 방식으로 방향성을 잡았습니다.반대로 죽음의 세계에서 관객을 맞이하는 퍼포머들의 캐릭터 같은 경우에는 투영성이 있는 캐릭터의 재질, 형상으로 표현되길 원했고요. 제가 지향하는 이런 방향과 원하는 표현을 VR 그래픽과 기술과 조율하면서 훨씬 단순하게 구현하게 되었는데요. VR 속 배경 같은 경우에도 황량하고 쓸쓸한 분위기의 무드가 기술적인 부분과 융합하면서 단순화되었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일부 참가자가 직접 퍼포머들과 상호작용하고, 그 체험이 다른 참가자들에게 공유되는 형태가 기존의 극장에서 공연을 관람하는 방식과 차이가 있습니다. 퍼포머가 장비를 의상으로 착용한 것도 독특하게 여겨지는데요. VR 환경이 안무하는 과정에 제약을 주었는지 혹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는지 궁금합니다.
김용빈: 예술이 아직 기술과 원활하게 융합되지 않아서 움직임을 수행하거나 구성을 할 때 제약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제약 안에서 단순하면서도 직관적인 움직임이 발생했습니다. 일반 관객 같은 경우 스크린과 퍼포머 사이에서 무엇을 바라봐야 할지 혼란스러웠을 거라고 예상이 됩니다. 총 4명의 퍼포머는 각자 만든 개별 안무를 작품 초반부에 수행하다가 후반부에 개별 안무를 연결해서 새롭게 구성한 군무를 수행했는데요. 이 과정에서 의상과 장비 자체가 제약이었다기보다는 스크린을 통해 드러나는 VR과 어우러지기 위해 그리고 HMD를 착용한 관객이 실제공간에서의 차단된 시야 때문에 저와 함께 움직일 때 놀라지 않게 하기 위해서 천천히 차분하게 움직여야 하는 부분들이 제약으로 작용했어요.
이예지: 저는 무용수와 안무가로 활동하면서 무용뿐 아니라 다양한 매체에 관심을 두고 작업을 하고 있어요. 이번에는 개인적으로 움직임이 기술을 돕는다는 생각으로 작업했습니다. 더불어 관객과 무대 위에서 공존할 때 관객들 개개인이 모두 다 다르기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변수들을 고려했고요. 이러한 과정들이 저에게 실험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제가 움직이거나 반응할 때 새로 발견하는 것도 있고 습관적인 것들이 나오기도 해서 이러한 시도 자체가 재미있고 흥미로웠죠.
유지영: 저는 무용을 ‘움직임’에만 국한되지 않고 조금 더 확장되는 장르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평소에 공연을 할 때 주로 프로시니엄 구조에서 공연을 하는데, 이번 공연은 원형 무대처럼 곳곳에 관객이 있고 동시에 VR 참여 관객과 관계를 맺어야 하기 때문에 제 신체가 공연을 인식하는 방식이 기존의 공연과 달랐어요. 퍼포먼스를 할 때 나의 몸을 관객들이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퍼포머로서 몸을 인식하는 방식이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관객마다 저와의 거리가 전혀 달라서 그 거리감도 인식해야 하고 동시에 VR 참여 관객 입장에서 느껴지는 저의 몸도 인식해야 해요. 프로시니엄 구조의 공연에서는 관객과 맺는 관계로 나의 몸을 인식하는 것이 하나의 방향만 있었다면 이번 공연은 다차원적으로 다양한 관객을 염두하며 움직임을 해야 했죠. 처음부터 저의 움직임이 장비에 의해 어떻게 전송되는지 인식하며 안무하진 않았지만, 직접 착용하고 움직여보니 장비와 바닥이 부딪히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시행착오를 거쳐 장비와 충돌하지 않도록 안무적으로 수정하며 고민했어요.
4명의 참여 관객과 4명의 퍼포머가 각각 짝을 이루어 움직일 때 왈츠처럼 2명이 짝지어 추는 춤이 떠올랐습니다. 작품의 제목인 도플(Doppel)은 ‘둘’을, 갱어(gänger)는 ‘걷는 사람’을 의미하는데요, 저에게 이 공연은 조심스럽게 같이 움직이면서 죽음에 대해 천천히 다가가보는 체험으로 보입니다.
주다은: 앞서 말했듯이 죽음이 개별적이면서 보편적이라는 점에서, 퍼포머들과 함께 안무에 대해 작업할 때도 제가 동작 하나하나에 개입하기 보다는 각자의 개별적인 움직임들이 나중에 공동체적인 움직임으로 나타났으면 좋겠다는 전체적인 흐름을 제안했어요. 개별 안무가 공동의 안무가 되고 또 관객의 개입이 이루어지면서 참여자들이 확장되는 흐름은 단일 존재가 죽음을 맞이하면서 동시에 보편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현상을 표현해요.
개별성을 잃고 똑같이 인식되는 존재로 변화하는 지점들이 2인무의 형식으로 구현되면서 관객들과 퍼포머들이 이루어내는 공동 움직임으로 확장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도플갱어(Doppelgänger)의 의미를 확장시키는, 즉 내가 나와 또 다른 나의 공동체로 확장되는 경험에 초점을 두고 연출했거든요.
공연 때 스피커에서 느꼈던 진동의 여운이 강하게 남아 이 공연이 끝난 후 휴대폰 진동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더라고요. 진동처럼 낮고 묵직한 사운드는 이 작품의 주제인 죽음과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주제를 사운드로 어떻게 풀어나가셨는지 궁금합니다.
김은준: 이번 작업에서 저희는 뭔가의 아이디어를 얻어서 소리를 만들기보다는 여러 가지 소리들을 미리 만들어 놓고 그 가운데 공연과 잘 맞는 소리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했어요. 소리를 DAW(Digital Audio Workstation)프로그램을 통해 편집하고, 편집된 소리를 공연 형태에 맞게 재배열해서 무용곡들을 만들었죠. 스피커 6대로 관객을 둘러싼 것은 공간감을 구성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기존의 4채널에서 점점 스피커를 확장하면서 공간들의 소리를 어떻게 채울까 고민을 했고 동시에 죽음과 관련된 여러 이미지를 생각하다가 저음이 풍부한 묵직한 진동을 생각했죠. 공연 시작하기 전부터 관객들에게 들려주었던 사운드가 33~35Hz로 저음 주파수에 해당하는데요. 그러한 진동을 슈퍼콜라이더(SuperCollider)나 맥스(max/msp)같은 프로그램을 통해서 얻으려고 했습니다.
심채윤: 저는 융합예술센터 AT랩 교육프로그램인 이머시브 퍼포먼스(Immersive performance) 수업에서 연출님을 만나서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는데요. 수업은 다른 원의 학생들과 회의하는 시간이 잦았고, 공연을 구현하는 방법을 다양한 방향으로 살펴보고 가능성을 탐색하는 과정이 있었어요. 개인적으로 이 과정이 굉장히 큰 기대감을 불러일으켰어요. 저희 음악테크놀로지과는 음악 분야 중에 가장 기술과 가까이 있는 분야라고 생각해요.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이용한 음악 작업을 하는 전공이기 때문에 융합예술 작업에서 협업하는데 불편한 점을 느끼진 않았습니다. 다만 특별했던 점은, 보통 무대에서 공연되는 음악은 일방적이고 소극적인 장르이고 따라서 관객들과 하나의 방향으로만 소통하는데 이 공연에서는 여러 대의 스피커로 공간을 만들었고 다양한 감각으로 감정을 공유하게 되면서 좀 더 ‘융합’예술이란 말에 어울리는 공연이 된 것이었죠.
김은준: 스피커가 형성하는 공간 안에서 사운드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게 관객과 양방향으로 소통하는 공연으로서 일반적인 공연의 형태에서 벗어난 시도였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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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연을 어떻게 지칭하는 것이 좋을까요. ‘이머시브 퍼포먼스’나 ‘관객 참여형 VR 퍼포먼스’ 등 아직 공연의 형태가 생소합니다.
주다은: VR 퍼포먼스라고 부르긴 하는데, 실험하고 시도하는 입장에서 작업을 진행했기 때문에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퍼포먼스나 다른 영역들이 기술과 같이 작동하였을 때 서로의 경계가 너무 명확하거나 하나의 영역이 다른 영역을 삼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어요. 그래서 이 작업은 ‘퍼포먼스와 VR 기술이 상생할 수 있는 작업이 가능할까’ 라는 질문에서 시작을 했습니다. 이 공연이 외부의 시선에서 어떻게 읽힐지 저는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미술이나 다른 특정 영역이라고 단정 짓고 싶진 않아요. 학교와 사회에서 서로 각자의 영역을 나누는 동시에 경계 지점들을 허무는 것처럼 이를 매체와 형식에도 적용시켜보는 작업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장르의 예술이 하나로 융합해서 공연을 하기까지 그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의 관계들이 존재했을 것 같습니다.
안무가는 연습실에서 작업하고 사운드 아티스트는 컴퓨터로 작업을 하는 것처럼 각자의 작업 환경이 다른데요. 이러한 환경 속에서 서로 관계를 맺기 위해 연출님의 역할이 중요했을 것 같습니다.
이예지: 무용 작업에서 보통 안무가와 무용수가 존재하고 안무가가 연출의 역할까지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이번 작업에서 저는 안무가와 무용수로서 임하고 연출님이 따로 계셔서 한편으로 굉장히 편했습니다. 퍼포머들이 개별적으로 스코어를 가지고 작업을 하되 전체적인 흐름이나 틀을 연출님이 잡아주시기도 했고 사운드 디자이너와 저희가 의견을 조율하려고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연출님께서 중간 역할을 잘 해주셔서 서로 각자의 작업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주다은: 저도 협업의 경험이 많지는 않지만 혼자 작업하는 것과 다른 점은 제가 모든 제작을 직접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어요. 가령 저는 전체적인 흐름을 보면서 사운드를 제작하는 분들에게 작품의 콘셉트나 개념을 전달해서 최선의 환경에서 작업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서로가 가진 오차를 줄여나갔죠. 이건 무용수분들과 연습실에서 작업할 때에도 마찬가지였고요. 제가 전체적인 틀을 갖고 있더라도 구현하는 건 각자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연출의 역할을 배운 것 같아요. 또 작품에서 한 걸음 떨어져서 작업과 저를 분리시켜야 하는 부분도 명확하게 있었습니다. 그렇게 틈이 있어야 원활히 진행이 돼요. 최대한 저는 모든 팀이 서로 각자의 시간에서 최선의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중간에서 조율하고 연결 짓는 역할을 수행했죠.
협업하는 과정에서 배우는 건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잘 모르는 분야와 함께 작업하기 위해 본인의 전공을 다시 돌아보는 시간도 필요했을 것 같은데요. 이번 작업에서 영향을 받아 자신의 전공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신 분이 계실까요?
김용빈: 저는 지금 제 작업의 성향을 찾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무언가를 발견하진 못했어요. 다만 관객들과 소통하기 위해 내부적으로 원활한 소통이 진행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특히 협업 같은 경우 무용, 음악, 미술 이렇게 단일 분야로만 작업하는 것과 다르게 서로의 언어에 대한 이해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술에 대한 것 또한 마찬가지고요. 앞으로 기술과 융합하는 예술의 형태가 많아질 텐데 기술과 예술이 서로의 언어를 습득하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코로나 때문에 연습 과정에서 직접 만나는 대신 비대면으로 회의를 진행해 소통의 어려움도 있었는데, 그런 과정들 속에서 어떻게 이 어려움을 줄일 수 있을까 많은 고민도 있었어요.
이예지: 저는 개인적으로 기술과 예술이 융합하는 것에 대해 반발심이 있었는데 그 반발심은 시도를 하지 않은 두려움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이번 작업에서 제가 직접 기술적인 부분에 참여를 하진 않았지만 예술과 기술의 만남이 거창하고 낯선 시도라기보다 계속 우리의 삶 속에 있었던 것처럼 느끼게 됐어요. 기술과 융합하는 두려움이나 반발심이 사라지는 좋은 기회였던 것 같아요.
융합예술 퍼포먼스 〈이중으로 걸어다니는 자: 도플갱어〉는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최선을 다하며 이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이들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고민하고 동시에 다른 장르에 대해 이해하고 조율했다. 이 결과물은 기술과 융합하면서 해체되고 재결합하는 과정에서 다차원적으로 변화한다. 7명의 예술가들은 이 변화를 담담히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또 다른 관계를 발견하고 맺으며 탐색한다. 이들의 다음 작업에서 이 탐색이 어떻게 구현되고 어떤 형태로 발전하며 이들은 누구와 관계를 맺을지 기대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