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너는 하고 싶은 일 해서 좋겠다.” 예술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말입니다. 저 표현을 순화하지 않은 채로 접하고 싶다면 예술인 복지와 관련된 포털 뉴스 댓글 창을 보면 됩니다. 하지만 당신의 정신력 회복 탄력성을 시험하고 싶지 않다면 굳이 찾아보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난 2월 6일, 저는 연극 〈beingbeingbeing〉을 봤습니다. 어느 카페에서 소수의 관객에게만 공개한 이 공연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존재가 자신의 존재감을 획득하기 위해 벌이는 투쟁을 다룹니다. 등장인물 모두는 자기 존재에 대한 이해를 구하기 위하여 애쓰고 있었습니다. 거기서도 저 문장을 정확하게 들었습니다. ‘배우’이지만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카페 노동자’로 살며 생활비를 버는 실제 인물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핵심을 관통한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주로 뮤지컬, 음악극 대본을 쓰고 공연 무대나 소품 때로는 의상을 만들면서 생계를 유지합니다. 보통 제가 기획안을 쓰고 팀원들을 모아 지원사업에 응모하여 받은 지원금으로 공연을 꾸려갑니다. 이 지원금은 대부분 ‘대표’의 인건비를 책정할 수 없기 때문에 저는 대본이 아닌 글을 쓰거나 공연과 관련 없는 디자인 일로 생활비를 버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아시다시피 코로나19로 인해 공연계가 굉장히 위축되면서 안 그래도 위태롭던 저의 밥줄은 굉장히 위험한 상태입니다. 한 공연은 취소되었고, 한 공연은 상황을 살피다 내년으로 연기되었습니다. 공연을 주관하는 기관과 우리 팀 사이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팀원들에게 공연 연기 소식을 전했던 날, 그래도 취소는 아니라고 서로를 위로해야 했습니다. 그간 무엇을 할 예정이냐는 음향 디자이너의 질문에 저는 부업을 늘려야 하지 않겠냐고 답했습니다. (이미 ‘부업’으로 버는 수입이 ‘본업’으로 버는 수입을 훌쩍 뛰어넘은 지 오래인 것은 굳이 이 시점에서 따지지 않겠습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외줄 위에 서서 겨우겨우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꼴입니다. 저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기 때문에, 저의 생존을 담보로 삼은 서커스를 지속해야 할까요? 행여라도 이 가난한 예술가가 외줄에서 떨어져 다칠까 봐 정부에서는 주섬주섬 외줄 밑에 그물망을 펼쳐주었습니다. 제가 그 그물망 위에 무사히 안착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지만요.
상당수 예술인은 작업 특성에 따라 비정규적이자 한시적으로 노무를 제공합니다. 이러한 프로젝트 기반 용역계약은 근로계약과 달리 4대 보험 가입 의무가 없기 때문에 대다수 예술인은 고용보험을 포함한 4대 보험, 즉 사회보장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사회보장위원회에 따르면 사회보장이란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기 위한 기본적인 권리를 의미함과 동시에 이를 실천하기 위한 제도 규범적 실천 활동 모두를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하는데요, 다시 말해 대다수 예술인은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기 위한 기본적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에 정부는 “재능 있는 예술인들이 예술 활동을 중단하거나 다른 분야로 전업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결과적으로 우리나라 문화예술계 발전에 큰 악영향”1을 미칠 가능성을 고려해 작년 6월 9일 「고용보험법」 및 「고용보험 및 산업재해보상보험의 보험료징수 등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작년 12월 10일부터 예술인도 고용보험 혜택 범위에 들어섰습니다.
예술인고용보험은 「예술인복지법」상 문학, 미술, 사진, 건축, 음악, 국악, 무용, 연극, 영화, 연예, 만화 이상 11개 분야에 종사하는 프리랜서 예술인을 비롯해 문화예술용역계약 체결과 노무를 제공하는 예술인이라면 예술활동증명 여부와 관계없이 적용된다고 합니다. 다만 근로자이거나 65세 이후 문화예술용역 계약을 체결한 예술인, 계약 건별 소득 50만 원 미만 예술인은 가입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가입 방법은 문화예술용역 계약 기간에 따라 나뉩니다. 계약 기간이 1개월 이상이면 일반예술인, 1개월 미만이면 단기예술인으로 구분됩니다. 일반예술인은 계약 체결이 발생한 날의 다음 달 15일까지 근로복지공단에 신고하면 되고, 단기예술인은 용역 제공일수, 계약금액 등이 적힌 노무 제공내용 확인신고서를 다음 달 15일까지 근로복지공단에 제출하면 됩니다. 근무 시간과 관계없이 근무한 날은 1일로 일괄 산정하고, 월 11일 이상을 1개월로 판단합니다. 즉 1시간짜리 공연이 하루에 2건이고 사업주가 달라 각각 계약을 체결했어도 노무 제공일수는 1일로 산정됩니다. 원칙적으로 보험가입자인 사업주가 신고하게 되어 있으나, 사업주가 고용보험 가입 신고를 하지 않을 경우 예술인이 직접 공단에 피보험 자격 관련 사항을 신고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문화예술용역 관련 계약서 등 계약관계를 증명할 수 있는 서류를 필수적으로 제출해야 합니다. 고용보험 요율은 일반 근로자와 마찬가지로 1.6%이며, 사업주와 예술인이 균등하게 0.8%씩 부담합니다. 보험료 납부 기준 보수는 비과세소득과 경비를 제외하고 산정하는데요, 예술인은 보수의 일정 비율 20%로 일괄 적용하여 ‘계약금액×0.8÷계약기간’을 월평균 보수로 산정합니다. 그리고 기준보수 80만 원 제도를 도입하여 월평균 보수 80만 원 미만 저소득 예술인도 하한액 80만 원을 보장합니다. 따라서 보험료는 기준보수 80만 원으로 보험료가 부과되어, 월평균 보수가 60만 원이더라도 월 보험료는 12,800원을 납부해야 합니다.
겨우 초반부 개요를 살펴봤을 뿐인데 머리가 아파졌습니다. 숨이나 돌릴 겸 해서 주변 예술인들에게 예술인고용보험에 관해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일단 대부분 “그게 뭐야?”라는 반응이었기 때문에 제가 이해한 선에서 예술인 고용보험에 관해 설명해야 했습니다. 아직 홍보가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악기를 전공한 친구는 레슨과 간간 있는 연주 활동 모두 현금 거래가 이뤄지기 때문에 세금을 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애초에 계약서를 쓰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고 합니다. 계약서를 쓴다고 해도 문화예술교육과 관련된 노무 제공 용역은 「예술인복지법」상 문화예술용역 범위에서 제외되므로 악기 레슨으로는 예술인고용보험 혜택을 받지 못합니다. 예술인 역시 고용보험에 가입할 수 있다고 하지만 자신은 포함이 안 될 거라고, 해당한다고 해도 당장 입에 풀칠하기 바쁜데 몇만 원씩 내야 하는 보험료가 부담된다고 합니다. 본업으로 돈을 벌어본 지 18개월이 넘었다는, 뮤지컬 앙상블 배우인 친구는 일단 고용보험에 가입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고 전했습니다. 예술 활동 역시 노동으로 인정받는 것 같아서, 사회 인식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요. 그러나 계약서를 작성할 때 고용보험 가입 조건 만족을 위해 준비 및 연습 기간을 계약 기간에 포함하는 등 계약서 작성에 있어 컴퍼니와 배우 상호 간 협의가 원만하게 이뤄질지에 대해서는 낙관적인 태도를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선택받아야만 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너 말고도 할 사람 많다.”라는 말에 작아지고 마니까요. 소설을 쓰는 한 친구는 자신은 출판사 계약 없이 소설을 창작하고 투고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므로 어쨌든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글을 쓰지만 ‘실업 상태’2라고 말합니다. 아직은 출판사에서 먼저 계약을 제의한 적이 없고 그것이 먼 미래일 것 같다고, ‘지망생’에 머물러 있는 자신의 처지를 슬퍼했습니다.
한 극단에서 조연출로 일하고 있는 친구는 얼마 전 극단 대표가 단원들을 모아놓고 예술인고용보험을 적용하여 페이 중 얼마를 빼고 입금될 것이라 공지를 했다고 하네요. 그냥 그런가 보다 하였답니다. 무대감독으로 활동 중인 친구는 무대 셋업, 철거를 돕는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데 이 작업으로 고용보험에 가입할 수 있냐고 물어왔습니다. 알아본 결과 철거와 같은 기계적인 행위는 「예술인복지법」상 문화예술용역으로 보지 않아 해당 사항이 없다고 하네요. 웹 소설을 연재 중인 친구는 예술인고용보험에 관해 읽어봤고, 최근에 한 계약은 고용보험과 관련된 조항이 계약서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웹 소설 작가로서 ‘실업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플랫폼과 계약이 해지된 상태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절필 선언’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왜 그런 것인지 관련 업계 관행을 열정적으로 설명해주었지만 제가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눈치채자 자신은 보험료를 계속 납부하지만 실업급여를 받을 일은 없을 거라고 합니다. 덧붙여 실업급여 수급보다 출산 전후급여 수급 조건3이 덜 까다로운데 비혼인 데다 자기 하나 제대로 건사 못하는 입장에서 어떻게 아이를 낳겠냐며 씁쓸하게 웃네요. 웹툰 어시스턴트 일을 하는 친구는 웹툰 작가님과 계약서 없이 구두로 협의하고 있으며, 배경이 들어가는 컷 수에 따라 수입이 들쭉날쭉해 고용보험 가입 조건을 채우지 못할 것 같다고 말합니다. 덧붙여 고용보험 혜택보다는 준비 중인 자신의 작품을 계속 개발하여 창작지원금을 받기 위해 노력하는 쪽이 더 나을 것 같다고 합니다.
이쯤 되자 더 머리가 아파졌습니다. 겨우 제 주변을 훑었을 뿐인데도 입장과 처지가 너무도 달라 이들을 어떻게 ‘예술인’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묶을 수 있을까 싶더라고요. 일단 자신이 하는 일이 가입 조건에 해당하는 문화예술용역인지 살펴야 했고, 계약서상 계약 기간과 보수를 따져 가입 조건을 만족하는지 살펴야 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 예술정책과에서 발행한 [문화예술용역 운용지침]에도 문화예술 분야가 “분야별 용역 양태가 다양하여 모든 양태를 사전에 규정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짚으며 “새로운 형태의 노무 제공 방식이 나오면 문화예술용역에 해당하는지에 대해 분야별로 사후 결정할 수 있는 보완적 방안을 강구할 예정”이라고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축적된 데이터가 전무하므로 실효성에 관하여 논의하기에는 시기상조인 예술인고용보험. 그러나 계약서 작성과 같은 가장 예민한 부분을 ‘상호 협의’로 대상자에게 맡겨버린 것에 관하여 여전히 의문이 듭니다. 계약서를 잘 써야만 차후 발생할 수 있는 분쟁을 원만히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장은 여전히 그렇게 돌아가지 않네요. 2018년 예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예술 활동 관련 계약을 체결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이들은 42.1%에 불과했으니까요. 정부 관련 기관은 이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표준계약서를 개발하고 보급했고, 2016년과 2019년에 「예술인복지법」을 개정하여 부당 계약에 관한 제재 권한을 마련하기는 했습니다. 모난 돌로 소문나서 일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뮤지컬 앙상블 배우 친구가 계속 생각나는 것은 기분 탓일까요?
354페이지에 달하는 [문화예술용역 운용지침]을 읽는 동안 마치 ‘나’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사람들과 함께 ‘손병호 게임’을 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조건에 부합하지 못하여 하나도 접히지 않는 나의 손가락을 바라보다 소외감을 애써 접어두고, 서울시 예술인 정책을 토론하는 곳에 긴 댓글을 달았습니다. 누가 이걸 읽어볼까? 정책에 반영될 수 있을까? 하는 비관적인 의문을 꾹꾹 누르면서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이 상황을, 성긴 그물망을 언급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저는 저라는 사람이 생존과 예술 그 사이에서 오늘도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만 했습니다. “새로운 형태의 노무 제공 방식”으로 일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제 존재감을 획득하기 위해 나름의 투쟁을 해야만 했습니다. 저에게 생존과 예술은 다른 말이 아닙니다. 저는 생존을 위해 예술 활동을 이어가는 전업 예술가니까요. 제 외줄 아래로 그물망이 펼쳐졌다는 것은 참 고무적인 일입니다. 그에 맞춰 저는 계속 떠들어대기로 했습니다. 제 밑에 깔리는 그물망이 조금 더 촘촘했으면 좋겠거든요. 첫술에 배부를 리 없지만 그 첫술을 제 입으로 떠 넣는 것은 제가 할 일인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