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클럽하우스’의 초대장을 얻었나요? 저는 며칠 전 처음 접속해 본 음성 기반 SNS 클럽하우스에서 오랜만에 새로움을 경험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이 글 또한 ‘말하듯이’ 써 내려가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습니다. 빠른 속도로 확산되는 클럽하우스의 유행은 팬데믹 가운데 우리가 얼마나 ‘발화되는 지금의 말’로 이루어진 현장에 목말라 있었는지를 여실히 느끼게 합니다.

클럽하우스는 온라인에서 ‘유한함’과 ‘현장성’이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모두에게 열린 공간이 아닌, 진입장벽이 있는 SNS로서 기존 사용자의 초대장이 있어야 입장할 수 있다는 점, (서비스 초기단계의 특성이지만) 현재 아이폰에서만 사용 가능하다는 점 등은 사람들을 안달 나게 하는 요소로 작용합니다. 또한 현장성은 ‘사라짐’을 통해서 보장됩니다. 기록이 남지 않는 음성만을 소통의 매개로 사용한다는 점은 모든 것이 기록되는 세상에서 때로는 지워지고 싶은 새로운 종류의 소망을 충족시켜 줍니다. 그리고 ‘바로 그 시간에 그 방에 있어야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들은 또다시 다른 방을 통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기도 하는데, 밤이면 각자가 오늘 클럽하우스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을 공유하는 방이 열리기도 한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클럽하우스의 사례로 이야기를 시작한 이유는 이 현상이 요즘 제가 꽂혀 있는 하나의 질문, “지금은 과거가 될 수 있을까?”와 공명하기 때문입니다.1 글의 제목이기도 한 이 질문은, 1차적으로는 좀처럼 지나가지 않는 팬데믹 상황에 대한 한탄이자 혼란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지금을 극복하고 과거와 닮은 미래를 회복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공기의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하던 때로, ‘비대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되었던 때로 돌아가 “과거에 코로나19라는 게 있었지”라고 회상하게 될까요? 혹은 지금을 거대한 전환점(paradigm shift)으로 정의하고, 미래가 더 이상 과거와 똑같아질 수는 없음을 예상하며 대처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오늘날의 예술이 처한 상황이기도 합니다. 예술은 한편으로는 온라인을 위해 구상되고, 온라인에 의해 실행되어야 한다는 압박을 지속적으로 받습니다. 앞으로도 예술의 온라인화를 가장 잘 해내는 자만이 살아남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예술가들은 오프라인의 특성으로 여겨지는 그 ‘현장성’을 그 어느 때보다도 그리워합니다. 지금은 ‘비대면 예술’이 행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의 중요성을 체감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가상)현실은 진보일까요, 퇴행일까요? 이러한 질문들이 복잡하게 섞여 들어가면서, 이 글은 정리되지 않은 말들의 조각들로 점철될 것입니다.

온라인 아카이브
지금이 인터넷과 예술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재고하지 않을 수 없는 시기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먼저 보리스 그로이스(Boris Groys)의 논의를 소환해봅니다. 2016년에 그로이스는 “인터넷 아트는 아트 아카이브(art archive)”이며 이 웹상의 아카이브가 “과거를 현재화하며 현재를 미래로 만든다”고 분석했습니다.2 그는 웹의 특성이 확정적이거나 연대기적인 서술 방식을 벗어나므로, 웹상의 예술이 계속해서 새로워지는 ‘지속적인 현재’로 남는다는 점을 중요한 가능성으로 보았습니다. 마치 나무위키가 작동하는 방식처럼, 확정된 기록은 없으며 계속해서 갱신되는 과정의 기록이 그 자체로 오늘날의 예술이라는 것입니다.

아카이브는 예술에 대하여 인터넷이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는 기능처럼 보입니다. 예술가들에게 개인 웹 사이트는 시공간의 제약 없이 포트폴리오를 가장 잘 선보일 수 있는 방식이며 열려 있는 기회의 장이 됩니다. 또한 인터넷은 흩어진 여러 목소리들을 모으는 데 효과적인 매체입니다. 주변에서 몇 가지 예를 찾자면, ‘인테러뱅 프로젝트(https://interro-bang.org/)’는 팬데믹 이후 어떤 식으로든 난관에 처한 예술가들이 인터뷰를 통해 각자의 생각과 경험담, 진솔한 일상을 공유하는 웹 사이트입니다. 또 다른 사이트 ‘Erase Everything But Love(EEBL)(https://eraseeverythingbutlove.com/)’의 경우, 웹의 특성에 적합한 소소하고 느슨한 프로젝트들을 공유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 만들어졌으며,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주로 예술가들이 참여해 자유롭게 자신만의 사소한 ‘사이드 프로젝트’를 업데이트합니다. 이와 같은 프로젝트들을 ‘아트 아카이브’라 부를 수 있다면, 목소리를 모아 들려주는 새로운 방식을 고안하는 것 자체를 예술의 영역으로 소환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인터넷이 ‘지속되는 현재’라면, 그것은 가능성인 동시에 예술을 보여주는 방식의 위기로 작용할 것입니다. 예술가들의 생존권과 저작권을 고려할 때 무한한 현재로 남을 수 있는 예술은 많지 않습니다. 공연, 퍼포먼스, 영상 작품과 같은 시간기반예술(time-based art)에서 이러한 위기는 극대화됩니다. 시간기반예술이 현장성을 획득하는 지점은 무한함보다는 유한함에, 지속보다는 사라짐에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지금은 과거가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온라인 현장
팬데믹이 ‘비대면 예술’을 강제하는 상황이 지속되면서, 인터넷이 아카이브의 기능을 넘어 ‘현장’의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는 점이 난제가 되고 있습니다. 현장 관람과 기록된 영상을 볼 때의 경험 차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문제가 되는데, 온라인이 오프라인을 ‘대신’하려 할 때는 항상 어딘가 부족하거나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술의 중심축이 오프라인 현장에 있고, 온라인의 역할이 단지 그 현장을 중계하는 것뿐이라면 대개 그 한계가 두드러집니다. 그보다는 처음부터 온라인의 특성을 염두에 둔 프로젝트들이 빛을 발한다는 것에 최근 많은 분들이 공감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오프라인의 대체물로서가 아닌 온라인에 의한, 온라인을 위한 예술 현장을 선보일 수 있는 효과적인 방식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요?

2020년 11월에서 12월, ‘웹 뮤지컬’을 표방하며 상영되었던 〈킬러파티〉의 사례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변일 것입니다. 온라인 영상 스트리밍이라는 환경을 적극적으로 고려하여, 공연은 9개의 짧은 에피소드들로 구성되어 3주의 상영 기간 동안 나누어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킬러파티는 ‘자가격리 뮤지컬’로서 제작 단계부터 배우들이 ‘Zoom 상견례’로 만나 상의를 하고, 연기하는 장면도 만나지 않고 각자의 장소에서 촬영했습니다. 마치 온라인 회의장의 분할된 화면으로 서로를 마주하고 ‘함께’ 대화하듯이, 유닛으로 분할된 각각의 노래 장면들은 네이버 VLive에서 본편으로 송출되는 순간 비로소 ‘하나’의 공연을 이루었습니다. 대개 관객에게만 주어졌던 제한을 예술가들에게도 적용하자 방구석이라는 현장의 동질감을 공유할 수 있었던 사례로 보입니다.

미술계에서는 ‘온라인 특정적’인 문법으로서 3D스캐닝된 오브제와 AR 촬영 필터의 활용 등이 자주 눈에 띄곤 합니다. 한 예로, 2020년 9월에서 10월에는 작품의 데이터 파일을 웹 공간에 전시한 〈수장고〉가 열렸습니다. 한정된 기간 동안 미술품의 데이터 파일들은 다운로드가 가능했고 일정한 조건 하에 자유로운 공유와 변형이 이루어졌습니다. 지금 수장고 웹 사이트(http://sujanggo.com/)에서는 작가 10인의 원본 그래픽과 더불어 관람자들이 보내 온 2차 저작물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인스타그램 ‘AR필터 서비스’를 통해 포켓몬 대신 미술품을 눈앞에 띄워 놓는 경험, 공유된 데이터를 변형하며 소비를 생산으로 전환하는 경험이 여기에 녹아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미래의 가능성 중 하나를 예시하며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예술을 데이터 파일로 전환하려는 작은 시도들은 종종 있어 왔지만, 앞으로는 어디로 어떻게 더 나아갈 수 있는 것일까요?

이제 말을 맺고자 합니다. 공교롭게도 지금까지 한 사람의 예술가 이름도 언급하지 않고 예술을 매개하는 것, 플랫폼과 미디어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습니다. 이 사실이 시사하듯, 지금만큼 미디어가 그 자체로서 주목받은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지 내용을 담는 그릇이나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으로서가 아닌,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이 말했듯 ‘그 자체로 메시지인’ 미디어의 존재감은 무엇인가를 매개하지 않고는 만날 수 없는 지금에 이르러 극대화됩니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최근에는 미디어의 존재를 지워 버리는 투명성을 추구하는 경우보다는, 오히려 어떤 미디어 특유의 유한함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프로젝트가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클럽하우스의 영리함이 드러나는 지점에서처럼) 이제 새로운 가능성은 매력적인 제한을 발견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글 김명진
1 “지금은 과거가 될 수 있을까”는 필자가 현재 준비 중인 전시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2 Boris Groys, “Art on the Internet”, In The Flow, Verso,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