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질문을 하나 하겠다. ‘영화’라는 단어를 말하고 들을 때 당신은 무엇을 생각하는가? 나는 길게 늘어선 매표 줄이나 매점 앞에서 팝콘이며 음료를 사는 사람들, 검고 큰 사각의 스크린과 그 앞에 다소 답답해 보일 만큼 빽빽이 들어앉은 의자들을 떠올린다. 영화관의 풍경을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감히 짐작하건대, 국내외 각종 OTT 서비스의 로고를 떠올리는 사람도 나처럼 영화관을 생각하는 사람만큼 많을 것이다. 영화관은 영화와 함께 생각하기에 이제 다소 낡은 개념이다. 영화관에 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영화를 볼 수 있고, 심지어는 그렇게 다른 방식으로 영화를 보는 것이 (비용을 포함한 여러 측면에서) 영화관에 가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영화는 영화관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만약 어떤 대상의 존재 조건이 변화한 후에 그 대상을 예전과 같다고 볼 수 없는 것이라면, 몇 년간 반복해서 이야기되어 온 것처럼 영화는 확실히 ‘죽었다’. 그러나 정말로 죽은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 누군가 이것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금까지는 영화관을 벗어나서도 영화는 영화다. 지난 7월 제24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공개된, 숏 비디오 플랫폼 틱톡(TikTok)과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산학협력 프로젝트 작품들을 바로 이 ‘죽음 이후의 영화’로 소개하고 싶다.

‹Color Music›, ‹LINKED›

김윤경 · 노진 · 박종민의 ‹Color Music›은 블루투스 이어폰의 특성을 이용한 댄스 필름이다. 조용한 카페에서 지루한 시간을 버티던 아르바이트생이 이어폰을 귀에 꽂는 순간 적막을 깨는 음악이 흐르고, 그는 춤을 추기 시작한다. 공간은 바뀌지 않았지만 이어폰으로 외부의 소리를 차단함과 동시에 어딘가 새로운 곳으로 떨어지기라도 한 것 같은 모습이다. 이는 다채로운 색상의 의상을 통해 시각적으로도 표현된다. 이다민의 ‹LINKED›는 작품을 제공하는 매체를 직접적인 소재로 삼았다. 코로나19의 유행으로 직접 만날 수 없는 이들은 틱톡을 통해 서로 교류하고, 이러한 가상의 만남이 각자의 모바일 화면을 이어 놓은 필드에서의 군무로 펼쳐진다. 확진자의 발생을 알리는 소리가 되어 버린 재난문자 알림음은 서로의 연결을 알리는 맑은 벨소리로 전환된다.두 작품이 새로운 세상으로의 진입과 연결을 긍정적인 설렘으로 그렸다면, 반대로 다른 공간, 다른 이와의 접촉을 미지의 공포이자 차이로 인한 불화로 그린 작품도 있다. 이주현의 ‹팝 콕›에서는 하송이 누나의 부탁으로 팝콘을 가지러 갔다가 돌연 그들이 보고 있던 공포 영화 속의 살인마와 마주치게 된다. 관객의 몰입을 비유하는 ‘빠져든다’는 말 그대로 영화 속에 ‘빠지고 만’ 것이다. 하송이 살인마에게서 도망칠 때 화면에 스치는 앨프리드 히치콕의 포스터는 관객을 쥐락펴락하는 히치콕의 스릴러 영화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뀨필름(고승환, 김운하, 류신희, 유의정)의 ‹완벽한 식사›는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기법을 활용해 어느 ‘대칭주의자’의 식사를 보여 주고 있다. 여자가 음식의 대칭을 흩트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식사하는 동안 자리에 초대된 것으로 보이는 남자는 자신이 좋을 대로 식사를 이어 간다. 그의 목 한쪽에 난 점을 노려보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던 여자는 결국 남자의 목 다른 쪽을 찔러 그를 ‘대칭시키고’ 자리를 떠난다.

‹팝 콕›, ‹완벽한 식사›

이들을 포함한 총 10편의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영화’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짧은 비디오의 길이와 그 형태다. 틱톡에 업로드할 수 있는 것은 1분 이하 길이의 세로형 비디오로 제한되며, 가로형 화면으로의 전환은 지원되지 않는다. 그런데 세로형의 화면은 과연 낯선 것인가?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재생하는 순간 우리는 아주 당연하게 기기를 가로로 돌려 쥐는데, 이것이 처음부터 당연한 것은 아니었음을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한때는 기기의 화면을 가로로 전환할 수 있다는 것이 홍보 요소가 되기도 했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는가? 요컨대 우리가 익숙하다고 생각하는 가로형 화면은 사실 영화관의 스크린을 모방해 변화한 것이고, 세로형 화면이야말로 모바일 기기 본연의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모바일 기기의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기능은 전화이고, 그 몸체가 세로형인 것은 수화기와 송화기가 각각 귀와 입에 가까이 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10편의 작품 중 대다수가 ‘연결’, 그리고 (다른 세계로의) ‘진입’을 다루고 있다는 점은 그래서 흥미롭다. 본래 영화관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했던 영화는 이제 공간을 벗어났거나 혹은 공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에 있다. 우리가 그동안 연결되고 진입할 수 있었던 공공의 장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따라서 영화는 이를 타개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코로나19 감염자의 급격한 증가로 인해 개봉을 미뤄야 했던 윤성현 감독의 ‹사냥의 시간›은 넷플릭스를 통한 온라인 개봉을 시도했고, 이번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왓챠와 제휴하여 일부 상영작을 온라인으로 제공했다. 틱톡과 한국예술종합학교의 프로젝트는 이런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시도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가로형에서 세로형으로, 과거로의 회귀로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면 익숙한 대상에서 전혀 낯선 무언가를 발견하는 길로 생각해야 할까? 우리가 봐 왔던 대상으로부터 우리를 지켜보는 시선을 도출해 내는 김희주의 ‹나도 널 볼 수 있어›, 하늘로 뛰어오르는 사람과 심연으로 뛰어 들어가는 사람 사이의 경계와 겹침을 함께 포착하는 이도현의 ‹확장된 표현형›을 생각하자면 후자의 가능성이 조금 더 커 보인다.

‘돌아갈 수 없다’는 부정의 말은 반드시 발전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좌절을 표현하는 것 또한 아니다. 발전도 좌절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끝내 전진을 이루어 내는 어떤 걸음들이 있다. 즐거운 10분을 만들어 준 10편의 작품을 응원하며, 지난 7월 초 모집을 마감한 틱톡과의 산학협력 프로젝트 시즌 2의 결과물들을 기다린다.

글 서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