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드니 빌뇌브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의 홀로그램 인공지능 캐릭터 ‘조이’와, 업체(eobchae)의 «대디 레지던시»에 등장하는 디지털 데이터베이스 인격 ‘나희 앱(nahee.app)’에 영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너는 T_38에게 대화를 신청해. ‘21세기 초반’과 ‘대한민국’, 그리고 ‘여성서사’를 키워드로 검색해 나온 데이터베이스 인공지능들의 목록 중 네가 마음에 담아두었던 이름이야. 너는 학생이기 때문에 도서관의 인공지능 홀로그램과 대화하는 데 코인을 지불할 필요는 없어. 대화 시간만 50분으로 제한되어 있지. 그 안에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이끌어낼 각오로 너는 머리를 주무르기 시작해. 꼭 듣고 싶은 이야기들과 꼭 입 밖에 내어야 할 이름들을 중얼거리면서. 화면이 눈앞에 떠올라. T_38을 불러낼 준비가 되었다는 메시지야. 인공지능 홀로그램을 불러낼 때는 말투와 외양을 설정할 수 있고, 눈에 보이는 얼굴 없이 음성만 울려 퍼지게 하거나 산 사람처럼 디지털 화면 밖으로 걸어 나오게 만들 수도 있어. 너는 21세기 초반 대한민국에서 통용되어 왔던 서비스직 종사자 말투를 선택했어. 그것이 당시의 시공간을 살던 여성들에게 권장된 하나의 말하기 방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외양을 랜덤으로 설정한 이유는 그에 대한 저항심리인지도 모르지. T_38이 생물학적 여성으로 나타난다면 너는 너 자신이 T_38의 노동을 소비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불편할 것이고, T_38이 생물학적 남성으로 나타난다면 시각정보와 청각정보 사이의 간극에 불편해질 거야. 어느 쪽이든 불편함을 피할 수 없을 텐데도 불구하고 네가 T_38을 선택한 이유는 T_38이 디지털 신체에 내장된 데이터 메모리를 기반으로 화법에 따른 표정이나 얼굴 근육의 움직임, 말의 높낮이까지 재현해 보일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어. 그 말은 T_38이 단지 흉내에 능하기만 한 게 아니라 여성들에게 강제되어왔던 ‘감정 노동’에 따른 피로감까지를 포착해 보여줄 수 있다는 뜻이잖아. 여러 모로 T_38은 데이터베이스 인공지능 중에서도 유독 호불호가 갈리는 모델이야. 프로그래밍된 것이라고는 해도 인공지능이 감정이나 자기주장 비슷한 무언가를 내비쳐 보인다는 게 어떤 이용자들에게는 아직도 불쾌함이나 불안을 유발하는 모양이니까. 너는 바로 그 점이 네 연구대상인 21세기 초반 대한민국의 여성들이 처해있던 상황과 비슷하다고 생각해. 인공지능과 대화하기 위해 지불하는 코인은 데이터베이스 시스템의 보안을 유지하는 일에 쓰인다고 하지. 합당한 논리야. 그런데 왜 마음이 아주 편하지는 않은 것일까? 지금 이 시대에도 인공지능을 인격화하고 인공지능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사람은 드물어. 역시 사람은 다른 무언가를 대가 없이 착취하지 않고서는 살아가기 힘든 걸까? 그러면서 자신이 거리낄 것 없는 순순한 태도까지 요구하는 게 과연 온당한 일일까? 그때 네 생각을 가로막는 알림음이 울려.

드니 빌뇌브, ‹블레이드 러너: 2049› / 업체, ‹대디 레지던시› /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T_38: 반갑습니다, 이용자님. 저는 이용자님의 정보 검색을 도와드릴 데이터베이스 아카이빙 홀로그램 T_38입니다. 이용자님께서 선택하신 항목이 ‘21세기 초반’, ‘대한민국’, ‘여성서사’가 맞으십니까?

너는 맞다고 대답해.

T_38: 이용자님께서 이용하시고자 하시는 정보가 21세기 초반 대한민국의 여성서사의 특징에 대한 것인지, 21세기 초반 이후 대한민국에서의 여성서사의 흐름에 대한 것인지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이런, 역시 이 화법에는 적응이 안 돼. 필요 이상의 경어투도, 중복되는 표현도 시간 잡아먹기 딱이잖아. 너는 조금만 더 참을성을 발휘해보기로 결심해. 먼저 T_38이 생각하는 여성서사의 정의에 대해서 듣고 싶다고 말해.

T_38: 넓은 범위에서 여성서사는 서사를 추동하는 주요인물을 여성으로 설정함으로써 여성을 인간성의 다면적인 부분 중 한 방식을 보여주는 주체로 내세웁니다. 좁은 범위의 여성서사는 여성들에게 여성다움이라는 이름으로 주입되어왔던 문화적 정체성들을 가시화시키고 서사를 통해 투쟁의 과정을 겪도록 독려합니다. 여성독자들은 여성서사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을 발견하고 그를 재구축할 수 있습니다.

너는 T_38에게 부탁해.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의 여성서사의 지도와 영토는 어떠했는지 말해달라고. 여성서사의 영토를 넓히고 지도를 그려낸 주역들, 문화적으로 합의된 여성성을 재구축하고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한 경험을 정상화시키려고 노력한 주인공들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제공하고 공유한 당사자들에 대해서 말해달라고. 말을 다 끝내기 전에 너는 잠시 망설이다가 T_38의 말투를 너에게 익숙한 22세기의 그것으로 되돌려. 여성서사라는 말이 거의 쓰이지 않을 정도로 여성주인공도 여성작가들도 많은 시기에 태어난 네가, 여성서사라는 말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던 과거 이 땅의 이야기에 보다 잘 귀 기울이기 위한 선택이었어.

T_38: 2010년대 후반에서 2020년대 초반의 대한민국은 여성서사가 대약진한 시공간이었습니다. 대한민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기류 자체가 그러했지만 문단에서도, 영화판에서도 여성서사 작업들이 줄을 지어 출판되고 개봉됐습니다. 관객과 평단의 동시적인 호응이 이어진 건 말할 것도 없었어요. 2019년 김승옥 문학상의 경우 수상자의 전원이 여성이었고 대중화된 여성서사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82년생 김지영』의 누적 판매 부수는 100만부를 넘겼습니다. 여성작가들의 작품 속 화자는 대부분 여성이었어요. 그 여성들이 사적 역사의 장, 이를테면 가족들 사이에서 축적되고 은폐되어온 폭력에 대해 고백하거나 세계라는 필연적인 폭력의 주체로부터 받은 고통을 담담하게 토로하는 것이 여성서사의 주된 경향이었습니다. 물론 여성서사를 그 두 가지 갈래로만 재단하는 것은 평평한 분석이 될 겁니다. 여성서사라고 해서 반드시 일상의 착취, 억압과 결부된 내용을 다뤘던 것도 아니고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21세기 이전의 여성인권이 여성서사가 새로운 지형을 시도하거나 상상하게끔 할 만한 자원을 제공해오지 못한 건 사실입니다. 2010년대 후반의 대한민국은 특히 더 그러했습니다. 세계적인 경제공황이 장기화되면서 젠더와 세대 간의 이해의 폭이 좁아지고, 구성원들 사이의 폭력이 가중되는 시기였으니까요. 말하자면 자본주의가 위기를 맞음에 따라 사회를 지탱하는 주된 질서였던 가부장제 역시 몰락하기 시작한 거예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어떤 식으로 결탁하여 여성을 착취하고 억압해왔는지는 실비아 페데리치의 저서 『캘리번과 마녀』에도 잘 나타나 있죠. 문자를 알고 책을 출판하는 행위가 특권에 가까웠던 18세기 이전의 대다수 여성들에게 글을 써서 발표하는 행위는 모험에 가까웠습니다. 조선시대의 궁중수필『계축일기』는 여성이 주로 사용한다 하여 ‘암글’이라 불리던 한글로 작성되었습니다. 정황상 여성 궁인이 저술한 것이 분명하지만 저자는 명시되어 있지 않아요. 19세기가 무르익은 이후에는 가부장적 자본주의도 쓰고, 출판하고, 자기 영역을 구축하고자 하는 여성들의 열망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대신 촘촘한 그물망이 펼쳐졌죠. 그 그물망을 통과할 수 있었던 건 오직 일부뿐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위협적이지 않으면서 숭배의 대상이 되기에 적합한 존재들이요.

너는 T_38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 그물망의 좁은 틈은 통과할 수 있지만 삶의 강력한 자외선 아래는 미처 다 지나가지 못했던 이들이 있지. 실비아 플라스나 버지니아 울프가 본인들의 이름이 그런 식으로, 비극의 여신으로 소비되는 걸 원했을까? 그들의 문학은 한 세기에 가까운 시간 동안 그들 생의 끝을 수식하는 데 머물러야 했어. 부당한 일이야. 자기파괴적 낭만주의가 가지는 매혹이 있다는 걸 너도 알지. 그 매혹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도 너는 알지. “쓰고 싸우고 살아남은”1 이름들, 이를테면 에이드리언 리치나 앨리스 워커와 같은 이들 또한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점을 아주 잘 알지.

에이드리언 리치, 1929~2012 / 앨리스 워커, 1944~

T_38: 오늘날은 여성작가들의 삶과 활동이 시나 노래 대신 역사가 되는 시기입니다. 신화화가 이루어지더라도 승리의 신화, 건국 신화에 가까운 형태예요. 이 간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용자님께서 요청하신 21세기 초반의 과도기를 들여다보는 일이 아주 중요합니다. 문명사적으로 보았을 때 남녀 성별의 이분법 구조에서 여성은 피지배 억압집단 쪽이 되어왔거든요. 그 사실을 일깨워주는 폭력과 갈등의 가시적인 점증이 많은 여성들에게 각성의 기폭제가 되어 주었습니다. 여성서사에 반응하길 넘어서서 그를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독자들이 나타났고, 요절하는 천재 문인이 되기보다는 “죽임당하지도 죽이지도 않고서”2 무사히 살아남자고 말하는 여성작가들이 다방면에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거예요. 그들 여성독자와 여성작가들은 후세대 여성들이 영토를 넓히고, 넓힌 영토를 지도로 그려나갈 수 있도록 기반을 닦아두었습니다. 비단 시장 뿐 아니라 상상력의 지평을 넓히는 작업이었지요. 영토 확장과 지도그리기는 21세기 이전의 관점에서는 ‘남성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행위였습니다. 남성에게만 특권처럼 주어졌던 권리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하겠지만요. 그러나 여성작가들의 지도와 영토는 이전 세기 남성들의 영웅 신화와는 다르게 정복 혹은 개척의 뉘앙스를 띠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여성서사의 대중화가 온전히 자리 잡은 21세기 중반 이후의 여성 작가들은 울타리가 쳐진 자기 영지를 마련하여 수호하기보다는 공동의 토양을 풍요롭게 가꾸어나가는 작업에 주력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문단 내 성폭력 문제 등 남성 권력의 건강치 못한 연대로 얼룩져있던 “막막한 현재를 뚫고 ‘다음’을 이야기”3할 수 있는 방법임을 알았던 겁니다. 정세랑 작가의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는 20세기를 관통한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4 심시선의 입을 빌려 21세기에 보내는 축전이나 마찬가집니다. 여성작가들에 대한 낭만적 신화화에 저항할 뿐 아니라 잔존하는 가부장적 의례들을 배격하며 새 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주의를 보여주었죠. 강화길 작가는 여성서사에 호러와 스릴러를 접목시킨 단편집 『화이트호스』를 펴냈습니다. 『화이트호스』를 지탱하는 한국적이고 가족적인 전통들은 화려한 묘사 없이도 그 자체로 긴장의 연속을 자아냅니다. 문제를 인식하는 시작점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쳐왔던 의례와 인물들을 낯설게 보는 것인데, 강화길 작가의 소설은 한국적인 인습과 장르적인 상상력간의 밀고 당기기를 통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 뿐 아니라 강조하기까지 합니다. 아예 우주공간으로 시선을 돌린 작품도 있었습니다. 김초엽 작가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수록된 단편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서 지구 밖의 유토피아적 대안사회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작품 속 후세대들은 그 완전한 세계에 머무는 대신 피폐한 지구로 귀환하는 길을 택하지만요. 흠과 티끌까지 이 세상을 구성하는 총체성의 일부로 사유하고자 하는 작가의 따스한 시선이 돋보이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과연 이 모든 게 온건하기만 했을까?

T_38 : 그렇지는 않습니다. 임솔아 작가의 단편 「단영」은 가모장 역할을 하는 한 사람이 구축한 여성 공동체가 그 겉모습과 달리 위계와 배제의 층 위에 올라서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합니다. 「단영」이 지적하는 것처럼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근본 작동원리가 변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의미의 여성장(場)은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자본주의는 21세기에 특이점을 맞은 뒤에도 오래도록 영향력을 발휘했죠. 그 잔여를 면밀히 들여다보는 풍토가 오늘날 문단의 새로운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그 부분에 있어서도 1세기 이전 여성작가들의 활동은 주목할 만한 단서를 제공해줍니다. 이랑 작가는 『좋아서 하는 일에도 돈은 필요합니다』에서 자본 없이는 예술노동이 불가했던 21세기 초반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습니다. 국가적인 재정 지원이 요원한 상태에서 예술가는 스스로 시장에 나서 자신의 상품가치를 입증해 보여야 했는데, 여성작가들의 경우 상품으로서 권장되는 태도와 용모가 보다 분명하게 존재했던 만큼 더 많은 스트레스를 감당해야 했을 겁니다. 한쪽에서 자본주의 논리로 인한 대상화를 규명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면 다른 쪽에서는 자본주의 논리에 의해 배척당한 이들을 주목하라는 외침이 있었습니다. 장혜영 작가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장애인들이 마주해야 했던 불평등의 문제를 공론화한 활동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상과 비정상의 구획을 나누고 후자를 눈에 띄지 않도록 격리시키는 일은 20세기의 유물이면서도 21세기까지 통용되는 방식이었으니까요.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인 텀블벅에서 지원을 받아 책과 다큐멘터리 영화로 완성시킨 『어른이 되면』은 장애인과 비장애인, 수용시설과 일반사회의 경계를 허물고자 한 대장정의 첫 걸음이었습니다. 이길보라 작가는 잦은 한계 상황에도 불구하고 온몸으로 부딪치는 삶의 철학을 구축해온 농인 부모님의 정신을 한껏 긍정합니다. 양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도전정신이 오롯이 담긴 그이의 해방된 여성 신체는 해외유학 시절을 기록한 에세이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는 지난날 여성들의 몸과 마음을 옭아매온 경계선이 예전만큼은 제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걸 알려주는 단호하고도 경쾌한 선언이었습니다. 이처럼 이 시기 여성작가들의 작업은 주류 논리의 폭력적인 재단에 저항하면서도 그 저항에 자신의 삶을 저당 잡히지는 않겠다는 기백을 보여줍니다. 모든 종류의 외침과 속삭임 뒤에는 한 명의 인간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죠. 어쨌거나 그이의 삶은 계속될 것이고 그이가 살면서 그려온 궤적은 일종의 서사가 되어 공통의 언어로 읽힐 수 있다는 희망이 존재했던 셈입니다. 모든 여성들이 하나의 자기 서사를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그와 같은 희망의 원천이었을테고요. 희망 없이는 여성서사도 계속 쓰일 수 없었을 겁니다.

강화길, 임솔아 외 『사라지는 건 여자들뿐이거든요』 /이길보라,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 장혜영, ‹어른이 되면›

T_38의 목소리 위로 알림음이, 네 눈앞의 화면 위로 알림창이 떠. 시간이 다 됐다는 신호야. 아쉽지만 하루 만에 자료 조사를 다 끝낼 순 없겠지. 너는 희미해져가는 T_38(“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을 향해 손동작을 해 보여. 주먹을 불끈 쥐고 팔꿈치를 살짝 아래로 내리는 동작. 당시 사람들에게는 흔했다지만 이제는 쓰이지 않게 된 제스처래. 파이팅. 파이팅은 싸운다는 뜻이고, 이 낯선 손 인사는 한 글자 한 글자 써 나가고 살아가는 모든 과정이 한때는 투쟁이었음을 잊지 않겠다는 너만의 약속이야. 너는 네게 지금 당연한 모든 것들이 익숙하지 않았던 시공간을 떠올려. 빈터와 그곳에서 반짝이는 것들이 있었어. 너는 그 반짝이는 것들을 흩뿌리고 사라져 간 무수히 많은 그녀들과, 사라진 그녀들을 기억하고 기록했던 또 다른 그녀들과, 자기 깃발을 꽂고 영토를 확장하기를 서슴지 않았던 씩씩한 그녀들과, 모여 드는 그녀들을 위해 땅을 개방하고 지도를 그리는 작업을 독려했던 그녀들을 떠올려.
그들은 눈앞의 기회를 봤어. 그들이 그들 자신에 대해, 즉 여성에 대해, 여성에 대한 견해와 경험에 대해 쓸 수 있다는 것이 기회였어. 그들은 알았어. 삶이 제공하는 진실과 우리 자신이 체험하는 진실에 기꺼이 관심을 기울인다면 여성이 되는 것이 무엇이며 ‘여성다움’을 구현하는 것이 무엇인지 얼마든지 쓸 수 있다는 걸.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인 채 다른 진실을 안고 살아가지만 이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이기 때문에 우리를 관통하는 실과 가닥이 있잖아.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글자라는 이름의 바늘을 집어 들어. 우리는 우리를 엮기 시작해.

글 이상현
1 장영은의 책 제목,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 (민음사, 2020)
2 장혜영이 작곡, 작사한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의 한 소절
3 최지은 기자, “정세랑 작가 인터뷰: 최선을 다한 다음 바통을 넘긴다는 마음으로”, 『우먼카인드 vol.12: 변화를 마주할 용기』, (바다, 2020)
4 박서영의 책 제목,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어크로스,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