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년간 자신의 길을 걸어온 작곡가의 궤적은 거대했다. 서양음악에서부터 국악과의 교류, 또 전자음악까지의 넓은 지평은 모두 한 작곡가가 걸어온 길이다. 그 과정 속에서 한국전자음악협회 초대회장으로 전자음악계의 기틀을 마련했고, 한국작곡가협회 이사장으로서 음악가들이 자신의 예술세계를 이어갈 방법을 모색하기도 했다. 때로는 책을 통해 작곡가와 연주자, 그리고 청중과 소통했고, 학생들의 스승이기도 했다. 음악원에서의 20여 년 간의 생활을 정리 중인 황성호 교수를 만났다.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 되기까지
처음에는 음악이 좋아 취미로 시작했어요. 중학교 때부터 밴드부에 있어 클라리넷을 했고, 자연스럽게 브람스와 같은 음악을 들었죠. 원래 클라리넷을 전공하고 싶었는데, 선생님이 작곡을 하는 게 좋겠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당시 작곡에도 관심이 있고 피아노도 쳤기 때문에 바꾸게 되었죠. 솔직히 아주 절실한 마음으로 시작한 건 아니었지만 서서히 작곡이 나에게 맞는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죠.
도쿄 ROLAND Synthesizer Studio에서, 1980
페터 한트케로부터 전자음악협회의 설립까지
저는 사람보다 활동에서 영향을 받았어요. 대학생 때가 유신 시절이라 걸핏하면 휴교를 해 학교 밖에서 활동을 많이 했죠. 주로 연극이나 무용을 하는 친구들과 함께였고, 1977년 극단 ‘프라이에 뷔네’와 같이 작업하기 시작했습니다. 페터 한트케의 ‹카스파›라는 연극을 맡아 도왔죠. 그 연극을 하며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가르침을 받았어요. 한트케가 요구하는 대사가 현대음악과도 같은 거예요. 대사의 처리 방식이나 마이크의 사용이 모두 소리를 동원한 자기표현이었던 거죠. 연극인들은 그것을 효과라고 생각하겠지만 제가 볼 때 그건 음악이었어요. 연극을 통해 공연언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악음(樂音)만이 아니라 여러 가능성이 있다는 걸 생각하게 되었고, 더 많은 상상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79년 ‘아시아작곡가연맹(ACL)’이라는 아시아 작곡가들의 행사가 한국에서 있었어요. 일본의 젊은 작곡가들이 전자음악을 가져왔는데 당시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분야였고 충격이었죠. 거기에 더해 무용이나 연극과의 협업으로 즉흥 연주에 관심을 갖게 되고 유학을 비롯한 여러 경험들이 쌓이며 자연스럽게 전자음악으로 향하게 됐습니다. 1985년 젊은 친구들과 모여 ‘전농패(電弄牌)’라는 그룹을 만들었고 그게 모체가 되어 1993년 ‘전자음악협회’를 창립했지요. 젊은 사람들이 유학은 다녀왔지만 사회에 전자음악에 대한 이해가 없으니 활동을 못했죠. 그 환경을 개척해 나가자는 생각으로 협회를 만들었습니다. 얼마 전 타계하신 고(故) 강석희 교수님 역시 큰 영향을 주셨지요. 그렇게 27년이 되었네요. 초대 회장 당시 열었던 컴퓨터 음악 페스티벌이 현재 ‘서울국제컴퓨터음악제’라는 아시아를 대표하는 음악제가 될 줄 누가 예상했겠어요.
문학과 음악, 양악에서 국악까지: 황성호의 음악적 세계
가곡은 주제가 서정적인 게 일반적인데, 제 작품은 그런 경우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대개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에 관한 시와 이야기를 썼더군요.1 보편적인 정서보다 작가의 생각이 뚜렷한 이야기를 찾은 거죠. 물론 최근에는 외손자를 위해서 이혜선 시를 바탕으로 ‹아가야, 너를 생각하면›이라는 합창곡을 만들기도 했지만요. 국악에 대한 관심은 한국 작곡가라면 당연한 것입니다. 제가 대학 졸업 후 활동했던 기반 중 하나가 ‘제3세대’라는 그룹이에요. 당시 한국 작곡계는 서양 현대음악에 치중되어 있었는데, 저희는 납득할 수가 없었지요. 1970년대 말은 우리 문화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있는 분위기였죠. 우리는 왜 국악을 모르는지, 도대체 지금 한국의 음악은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복합적으로 다가와 자연스레 국악과 전통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어요. 한동안은 전통적 요소를 얼마나 잘 습득하고 있는지 실험한 거라고 할 수 있죠. 그 후에는 제가 서양음악을 배웠으니 각각의 장점을 대입해 절충하는 방안을 시도했고요. 그 둘을 조화시키고 싶었는데 생각만큼은 그러지 못했던 게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허버트 A. 도이치 저·황성호 역, 1982 / 황성호 편저, 1993 / 황성호 지음, 2017
쿠바에서 찾은 로컬의 가능성에 대하여
한국전자음악협회 회장을 할 때 제안을 해서 2000년 쿠바 아바나의 컴퓨터 음악 페스티벌에서 연주회를 하게 됐어요. 당시 저희는 유학을 다녀왔지만 한국은 세계무대와 동일한 글로벌이 아니라 ‘로컬’이라고 생각했어요. 그곳에서 우리의 작업이 어떻게 비춰질지 궁금한 동시에 두려웠죠. 한국에서는 최신이었는데 나가서 보면 이미 지나간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스스로 로컬의 콤플렉스가 있었죠. 사실 테크놀로지라는 게 때로 스스로 앞서고 있다는 느낌을 주어서 착각에 빠지기 쉬워요. 자신의 능력이라고 생각한 게 사실은 소프트웨어의 능력일 때가 많거든요. 다 같은 프로그램과 방식을 사용하니 결국 미학적으로 차별화가 안 된다는 딜레마도 생기죠. 그런데 페스티벌에서 음악회가 끝나고 나오는데 참석했던 작곡가들과 청중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대중음악 스타를 만난 것처럼 굉장히 궁금해 하더군요. 자신들과 동일한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쓰는데 그들에게는 우리 것이 새롭게 들린 거죠. 그 경험을 학생들에게 자주 이야기합니다. 세계화되려고 너무 노력하지 말라고. 그들이 못하는 로컬의 가능성을 찾는 게 차별화의 길이 된다고요. 로컬은 더 많은 상상을 하게 함으로써 장점이 될 수 있습니다.
과거와 미래를 조율하기 위해 존재하는 협회
‘형산의 박옥’2이라는 프로젝트가 있어요. 저는 과거에도 좋은 작품이 있었지만 선배님들의 환경이 좋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의 관심이 별로 없을 때 초연되어 몰라보고 잊혀진 것들이 많죠. 그런 작품들을 발굴하고 좋은 환경에서 다시 연주해 “형산의 박옥을 돌려주자”라는 프로젝트입니다. 물론 젊은 작곡가에 대한 후원도 중요하지만 사실 양쪽이 모두 관심을 가져야할 분야니까요. 당시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지만 이제는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는 건 후손들이 해야 할 일이죠. 우리는 새로운 작곡가를 매번 발굴하고, 또 발굴만 해요. 꾸준히 관심은 갖지만 여전히 우리에겐 좋은 작곡가가 없다고 이야기하죠. 그렇다면 왜 없는지 반성을 해야 합니다. 관리가 없기 때문이죠. 젊은 작곡가들을 위하는 동시에 과거를 잊지 않도록 균형을 맞춰가야 합니다. 그게 문화의식이라고 생각해요.
1997, 1999, 2000
『소리, 그 너머의 음악』
사람들은 작곡가를 잘 안다고 말하지만 그들이 아는 건 제3자가 해석해 소리로 들려준 작곡가일 뿐이에요. 전해들은 음악이지 그게 그 작곡가는 아니죠. 악보를 읽을 때 비로소 작곡가의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연주자는 연주가 끝나 피아노에서 손을 뗐지만, 베토벤은 끝에 한 마디를 덧붙여 쉼표와 페르마타를 그렸어요. 그럼 피아니스트는 이 마디를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있죠. 하지만 사람들은 연주가 끝나고 소리가 나지 않으면 박수를 칩니다. 음악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소리에만 있고 작곡가에게는 관심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책을 쓰게 되었죠.
한국 창작계의 현실: 우리는 왜 예술을 하는가
근본적으로 우리는 왜 창작을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하죠. 예술가들은 우리를 대신해 미래를 상상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문제를 발견하고 얘기하는 예언자이죠. 그리고 그 생각을 통해 새로운 구체적인 것들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20세기 초 우스꽝스럽기도 했던 다다이즘은 현대예술에 영향을 미쳤고,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며 삶의 원동력이자 엔진이 되었듯 말입니다. 한국 사회가 그런 인식을 가진다면 젊은이들의 실험과 반항을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고 에너지라고 여기고, 자연스럽게 예술가들이 무엇에 분노하는지 관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젊은 친구들이 그런 환경에서 작품 활동을 한다면, 그래서 현실과 타협하지 않게 된다면 좋겠습니다.
한예종에서 창작한 22년
저는 한예종에 1998년 마흔 셋에 와서 지금 정년이 되었으니 제일 활발했어야 할 시기를 학교에서 보냈죠. 좋은 인재들을 만났고, 존경하는 선생님들과 함께 하면서 좋았습니다.
좋은 환경에 누됨 없이 알맞은 삶을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에게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죠. 음악테크놀로지과를 만들고 음악원에서 ‘즐거운 음악교실’을 개설하기도 했습니다. 또 하나 ‹농(弄) 프로젝트›3라는 걸 시작했어요. 다른 학교 작곡과를 초청해 우리가 연주를 지원하면 그 학교에서 작품을 보내 주었죠. 모여 보니 서로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차이를 비교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갖지 않은 걸 다른 쪽이 갖고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거죠. 만나지도 않으면서 아는 척하는 게 제일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힘들겠지만 언젠가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학생들의 작품이 밖으로 뻗어 나가는 통로가 되면 좋겠어요. 인생에서 작곡만 창작이 아니라 이런 일들을 만드는 것 역시 창작이라고 생각해요. 생산적인 삶을 살아가고 싶었는데 기회가 주어져 행운이었죠.
세상으로 나아갈 젊은 작곡가들에게
일단 학생들의 입장에서 좋은 작곡가가 되기 위해선 생각을 많이 하고, 관심을 갖고 그 다음에는 이해를 하려고 노력해야 하죠. 젊은 친구들이 빠지기 쉬운 게 독선입니다. 스스로 완성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모자라다는 걸 알 때 받아들이려고 하고 궁금해 하게 돼요. 그게 이해심이고요. 결국 작곡가는 사람들을 감동시켜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약점도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한예종의 장점은 학생들 사이의 생태계가 마련되어 있어 학교에 있는 것 자체가 좋은 경험이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들은 가운데에서 조정해주는 거죠. 학생들에게도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음악원에만 있지 말고 다른 원의 학생들과 생각을 나누라고, 같은 창작자이지만 얼마나 다른지 알게 될 거라고요. 함께 작업을 하지 않더라도 한예종의 젊은이들이 동시대를 의논하고 서로 얼마나 다르게 살고 있는지, 또 같은 문제를 어떻게 다르게 표현하는지 얘기해보면 서로를 이해하고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해 봅니다.
그는 미래와 과거의 가치를 강조하고, 학생들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 애정 어린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그가 인터뷰 중 남긴 예술과 기술에 대한 조언으로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이 어지러운 세상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힌트를 얻을 것이다.
“과거의 가치를 알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어요. 테크놀로지는 과거의 길을 걸어 왔기에, 앞으로 어떤 길을 갈 것이라는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죠. 저는 학생들에게 이전의 것이 낡았다고 치부하지만 말고 그 걸어온 길을 찾다 보면 해법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