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에 조명이 들어온다. 도포를 걸치고 부채를 들고 서있던 무용수는 오른발을 들어 뒤꿈치부터 마루에 내려놓으며 움직임을 시작한다. 몸의 중심은 앞꿈치를 지나 엄지발가락 하나로 옮겨진다. 무용수의 호흡은 땅으로부터 받은 에너지를 안고 몸을 거쳐서 하늘로 상승한다. 한 사람의 몸을 순환하던 호흡은 점차 흥으로 변하여 객석으로 옮겨간다.
중요무형문화재 처용무를 이수하다
제가 국립국악원 무용단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췄던 춤이 처용무입니다. 처용무는 궁중무용과 종교의식무용에 동시에 속합니다.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로 넘어가면서 국교가 유교로 바뀌며, 숭배의 정신이 퇴색하고 유교사상에서 벗어난 것은 배척당하는 경향이 많았을 때도 종교의식무용의 역할을 유지해온 춤입니다. 처용무는 다른 궁중정재와는 움직임이 다릅니다. 40여 가지나 되는 궁중무용 중 가장 독보적으로 남성적이고, 형태에 그로테스크한 미가 있어서 궁중정재와 민속무용을 통틀어서 가장 독특한 한국 춤이기 때문에 저도 처용무의 매력에 빠졌죠.
전통무용이 낯설고 어렵다는 편견에 대하여
전통무용을 크게 궁중무용과 민속무용으로 나눌 수 있는데, 궁중무용의 경우 모든 춤 안에 음양오행 등 유교의 사상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앞을 봤으면 뒤를 봐야하고 동서남북을 아울러야 하는 규칙이 있어서 동작이 반복되고 단조롭다고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팔 하나 다리 하나를 움직이는데도 의미가 없는 것이 없죠. 반면 민속 무용엔 다양한 동작이 있고 반복 대신 여백의 미가 생깁니다. 그림 속 여백처럼 에너지를 호흡으로 변화시켜 지평선 너머까지 보내며 춤을 추죠. 이러한 시선과 관점 때문에 민속무용은 자기를 뽐내기보다는 나와 상대의 생각에 공감하는 춤입니다.
저는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전달이 된다는 의미에서 춤은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끼리 가장 기본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시대 췄던 춤은 그 시대 사람들이 향유했을 것이고,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 시대 춤을 향유하겠죠. 제가 전통무용을 전공했다는 이유로 시대를 무시하고 전통춤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현대의 사람들이 좋아하고 즐길 수 있는 춤을 고민하죠. 설사 소수만 향유하더라도 흐름에 맡기다 보면 자연스럽게 변화가 생길 거라고 생각해요. 2년 전 방탄소년단의 공연에 등장한 전통춤이 엄청난 파급효과를 발생시켰죠. 삼고무1의 저작권 논란도 생겼고요. 저는 이러한 현상을 문제적이라기보다는 그 덕분에 전통무용에 대한 논의가 진일보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전통무용의 활용이 원색적이어도 괜찮습니다. 후에 정리가 필요한 상황이 오겠죠. 그러나 누군가는 전방에서 일단 실행해줘야 해요.
‹깊은 곳에 잠들다›, 2015 ©국립국악원 / ‹장한가›, 2015 ©국립국악원
국립국악원 무용단과 정대업지무(定大業之舞)
한예종 재학 시절에 교수님께서 한국적인 것을 꼭 찾아야 한다고 강요하셨는데, 저는 이를 부정하고 탈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졸업하고 밖에서 창작 작업을 3년 정도 했고, 그러다 문득 갈증을 느꼈습니다. 제가 무엇을 가지고 작품을 만들어야 할지 모르겠고, 무언가 맹목적으로 쫓아가지만 답은 없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국립국악원 무용단에 들어갔습니다. 20대의 젊은 몸과 정신으로 지내기에는 답답하고 힘든 면이 많은 곳이었어요. 그러나 또 하나의 배움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무용단 생활을 하다가 정대업지무(定大業之舞)를 만났습니다. 처용무와는 또 다른 강인함, 의협, 호걸 등과 같은 언어를 내재한 춤이었죠.
정대업지무는 궁중무용인 종묘제례일무에 속하는 춤이고, 종묘제례일무는 문무(文舞)와 무무(武舞)로 나뉘는데 그중 무무, 즉 전쟁의 춤이 정대업지무입니다. 전쟁을 기리고 무신들의 넋을 위로하는 정적인 춤이죠. 논문을 쓰고 연구를 하면서 지금의 정대업지무 재현은 이 춤이 갖는 의미나 형식과 철학적인 사상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국에 파진악(破陣樂)이 있듯이 우리나라만의 전쟁의 춤을 구성하고 재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앞으로 이 춤의 대형이나 구성을 보완해서 호방한 남성미를 표출하는 한국 춤으로 재창작하는 것이 지금 저의 가장 큰 숙제이고 바람입니다.
전통무용의 즉흥성
외국무용에서의 즉흥은 즉흥적으로 발생하는 상황에 대한 반응을 몸으로 표현합니다. 한국전통무용에서의 즉흥은 그런 의미는 아니에요. 몸에서 발생하는 흥에 의해 외적인 상황이 변합니다. 무수히 같은 동작을 반복하다보면 흥이 올라오고 음악과 궁합이 맞을 때면 원래 30분 추던 춤을 1시간 동안 추기도 합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흐름 속에서 다름이 파생되는 게 한국전통무용의 즉흥이고, 저는 이 부분을 존중하고 싶어요. 또한 여타 외국무용은 자세가 규격화되어 있다면 한국 춤은 형태가 변할 수 있다는 점을 열어 둡니다. 사람의 몸은 다 다르게 생겼고, 시대의 환경과 상황에 맞춰 반응하거든요. 이를 거스르며 정확한 포지션에 천착하기 보다는 받아들여서 생각과 감정에 따라 동작의 형태를 변화시키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고 한국 춤은 그래서 매력이 있죠. 저도 작업에서 여럿이 춤을 출 때 동작과 호흡을 맞춘 딱딱한 느낌보다는 한국적인 움직임의 질감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국립국악원 무용단 시절 악단과 함께 즉흥의 표현이 가능했기 때문에 이 느낌을 발전시킬 수 있었고 지금 저의 창작 작업에서 생연주와 함께 행해지는 흥을 빼놓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낙타›, 2019 ©알티밋무용단
전통이 동시대와 만나는 경계의 최전방에서
국립국악원 무용단 시절 ‘수요춤전’, ‘금요공감’ 등 안무 작업을 할 때는 무용수들이 저를 보고 동작을 따라하게끔 거울의 위치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이 저를 보고 그대로 따라 하길 바랐죠. 하지만 학교로 오면서 학생들과 같이 연구하고 가르치다보니 그들과 함께 거울을 바라보고 고민하며 그들 스스로의 춤이 발현될 수 있는 방식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학생일 때 ‘한국 춤’에 갇혀서 그것을 부정하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던 것에 비해 지금 학생들은 한국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덜 하는 것 같아요. 저도 정체성을 심어주긴 하지만 강요하진 않습니다. 다만 몸에 충분히 배인 한국 춤의 정신을 기반으로 두고 어떻게 동시대를 지향할 수 있는지에 대해 방향을 제시하려고 해요. 특히 예술사를 거쳐 전문사(대학원과정)까지 가면 6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하기 때문에 개개인의 방법론을 확실하게 다지도록 하는 게 목표예요. 결국 제가 무용원 실기과에서 하고자 하는 것, 학생들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몸에 충분히 밴 한국 춤의 순수함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동시대와 만나는 경계 위에서 치열하게 춤을 추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난 해 무용원 한국무용 졸업생을 주축으로 창단한 알티밋(Altimeets)도 그런 연장선상에 있는 단체입니다. 저도 전문사를 졸업하고 3년 동안 치열하게 고민하던 작업들도 나중에 되돌아보니 새롭게 다가오더라고요. 그런 고민이 알티밋의 창단으로 연결되었죠. 알티밋은 이런 경계의 최전방에 서고자, 예술가들의(Artists) 궁극적인(Ultimate) 만남(Meets)이라는 기치를 걸고 출발했습니다. 8월 말 예정인 두 번째 정기공연에는 각 작품의 안무자 연령대가 20대부터 중년까지 다양해서 저희 무용단이 가지고 있는 탄탄한 기반이 잘 드러나는 공연이 될 것 같습니다.2
비좁은 무대에서 춤추기
6개원 중에서도 무용원이 ‘대면수업’을 가장 절실히 원했던 지난 학기였습니다. 물론 학생들의 건강 문제가 우선이지만 학습권이 밀려나는 문제가 있었죠. 실기수업을 비대면 온라인으로 진행하면 선생인 저는 학교 무용실을 사용하면 되지만, 학생들은 자신 방에서 컴퓨터를 바라보며 다리 하나 찰 수 없기 때문에 사비로 공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학생들에게 이같은 상황을 받아들이고 제약된 공간에서 출 수 있는 춤을 찾도록 방법을 제시하기도 하는데 명쾌하게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답이 없는 상태로 준비를 해야 하는 막연함이 지속되지만 이러한 변화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카메라 앵글 안으로 들어가는 무대를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말입니다.
사실 한국 춤의 무대로는 장터, 마당, 들판 같은 곳이 더 좋습니다. 프로시니엄 무대로 들어간 건 불과 100년이 채 안됩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카메라 앵글 안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제약이 더 발생하는 건지 그 안에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는지는 고민해볼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일례로 제가 오래 전부터 제작하고 싶었던 무용 다큐멘터리가 하나 있는데요. 카메라 하나 들고 전국팔도를 돌아다니며 각 지역의 춤을 담고 싶어요. 무용수들이 살아가는 과정, 공연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전통무용에 대한 좋은 자료들이 담긴 영상이 탄생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인터뷰를 마친 그는 복도를 지나 103호 연습실로 들어간다. 학생들은 분주하게 안무를 되새기고 있다. 음악이 시작되고, 학생들의 움직임이 시작된다. 그 앞에 서서 음악을 들으며 골똘히 생각하던 그도 어느 순간 고개를 들고 학생들과 함께 움직임을 같이 한다. 그의 호흡이 점차 전체 무용수들 간의 호흡으로 맞아 들어간다. 전통이 현대와 만나는 최전방의 경계에서 이들은 오늘도 치열하게 춤을 춘다. 그렇게 오래된 춤은 새롭게 추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