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대체로 둘 중에 하나다. 공손하거나 무관심하거나. 전자는 고전으로서의 가치를 지닌 작품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후자는 고전에 부여되는 지나친 권위와 부르주아적 이미지 때문에 생긴다. 사실 두 태도는 모두 작곡가와 작품 중심적인 음악관과 일맥상통한다. 다시 말해, 음악의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에서 연주를 감상하는 활동에 이르기까지 작곡가의 생각, 작품에 담긴 의미, 연주자가 작품을 얼마나 유려하게 재현해내는지만을 고려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클래식 레퍼토리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18~19세기의 음악을 읽어내는 언어는 종종 화려하나 빈곤하다. 작품을 직조한 작곡가의 삶과 음악은 그의 천재성과 영감을 부각시키는 수많은 수식어로 꾸며지며, 연주에 관한 평은 연주자가 지닌 음악적 기량에 대한 이야기들로 채워진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연주의 테크닉적 측면에만 주목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음악이 만들어진 시대적 맥락뿐만 아니라 현재 그 음악이 가지는 의미와 청중의 존재를 간과하는 것이다.
정말 클래식은 그토록 좁은 영역에서만 논의될 대상일까. 생각해보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삶에서 음악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어떤 절대적 아름다움에 대한 경이보다도 함께 음악을 만들어가고, 듣고, 노래하며 보내는 밀도 높은 시간 속에서 행복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감염병이 돌기 이전, 공연의 형태로 같은 시공간에서 누렸던 음악적 경험이 인간에게 주었던 충만함도 그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을 테다. 지난 6월 한국의 젊은 음악가를 지원하기 위해 유니버설뮤직과 한국예술종합학교가 공개한 첫 프로젝트, 피아니스트 문지영과 김대진의 «슈베르트: 네 손을 위한 피아노 작품집»은 바로 그 ‘함께함’에서 길어 올린 음악의 가치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2중주가 탄생한 19세기는 낭만주의 양식이 구성된 시기였다. 프랑스혁명 이후 귀족층은 몰락했고, 이들의 후원으로 활동하던 음악가들은 이제 공공연주회와 개인 레슨, 출판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한편, 시민권을 획득한 중산층이 새로운 청중과 아마추어 연주자들로 등장했다. 작곡가들은 이전보다 어렵지 않되 호소력이 짙은 음악을 요구받았고, 이에 따라 매력적이거나 이국적인 선율, 강렬한 감정과 효과로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내고자 했다.그 중에서도 두 사람이 앉아 연주하는 피아노 음악은 가족구성원들 간의 친밀한 관계를 쌓을 수 있는 음악으로 선호되었다. 중산층 시민들은 공공연주회의 청중이기도 했지만 주로 가정에서 함께 노래하거나 여러 악기를 연주하며 음악을 즐겼기 때문이다. 이처럼 낭만주의 시대의 음악은 창작에 있어서는 작곡가 개인이 담고자 하는 내면의 감정과 이상으로 수렴되었으나, 음악의 향유와 소비에 있어서는 공동체적 기능이 있었다. 즉, 당시 피아노 2중주는 지금처럼 무대에서 연주되는 음악이 아니라 가정이나 사교 모임에서 연주하기 위해 작곡되었던 것이다.
현대로 넘어온 이 작품들은 분명 그때와는 다르게 다뤄진다. 가정이나 사교모임에서가 아니라 전문 연주홀에서 녹음되고 앨범이라는 틀에 담겨 소리로만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젊은 피아니스트 문지영과 그에게 1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음악을 가르쳐 온 스승 김대진의 슈베르트 피아노 2중주를 듣고 있으면, 들려오는 음악 뒤에 존재하는 긴밀한 소통의 과정과 연주를 완성해나가는 치열함 속에서도 느꼈을 함께함의 기쁨을 상상하게 된다. 서로 다른 터치와 호흡, 음색을 조정하고 발맞추는 과정 자체에 음악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물론 그들은 연주의 측면에서도 탁월하다. 명료하고 정확한 김대진의 소리 위에 꾸밈없이 자연스러운 문지영의 움직임이 안착한 결과, ‘알레그로 가단조 D.947’의 강렬하게 몰아치는 진행과 산발적으로 등장하는 여백은 설득력을 얻고 ‘환상곡 바단조 D.940’의 밀도 높은 주제와 각 부분 간의 형식적 대비는 더욱 돋보인다. 특히 ‘가장조 론도 D.951’의 다정한 선율에는 낭만 가곡의 정점에 서 있는 슈베르트의 빛나는 감성이 담겨있는데, 문지영은 이에 가장 잘 어울리는 섬세한 결의 해석을 선보임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나는 그저 음악을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하나의 피아노 앞에 앉아 호흡을 주고받는 시간이 담겨있다는 점에서 이 앨범의 가치를 찾고 싶다. 슈베르트의 감정과 이상에 청자를 몰입시키는 그들의 기술에 감탄하면서도 애초에 슈베르트가 피아노 2중주를 썼던 목적과 두 연주자 사이에 이루어졌을 음악적 교감을 헤아려본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음악적 순간이 주는 순수한 즐거움이 우리의 삶에 존재하는지, 이를 포착하려 노력하고 있는지도 되돌아본다. 음악을 ‘만들고 듣고 누리는’ 사람과 시간에 관한 이야기로 음악 읽기의 언어가 확장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