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부처럼 일상에 밀착되어 끼니 때마다 자라나고 옅어지는 감각과 사념을 이야기로 엮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위대한 극적 서사를 상상하는 대신 나와 친구들에게 매일 벌어지며 누적되는 분명한 감각의 지점들을 언어화한다.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자연스럽게 수상소식에 대한 축하가 오갔다. 단편 영화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와 ‹우리의 낮과 밤›으로 제19회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2관왕을 차지한 김소형 감독과 단편 애니메이션 ‹수라(修羅)›로 제 44회 안시 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에서 수상의 영광을 안은 정해지 감독을 만났다.

김소형 정해지

시작하는 마음, 하는 마음
김소형: 영화를 내내 좋아했다. 좋아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누가 어떻게 영화를 만드는지 알고 싶어서 전공을 하게 되었다. 학교에서 공부하며 영화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여러 사람이 하나의 목표를 공유하며 함께 달려간다는 점에서 영화를 업으로 삼고 싶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좋아하는 점에서 난제가 발생하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이해관계를 바탕에 두고 소통과 설득을 해야 하는 것이다. 더욱이 감독은 각각의 구성원들에게 일을 할 수 있는 동력 또한 꾸준히 자극하는 역할이라는 점이 아직은 어렵고 서툴다.
정해지: 출판만화와 웹툰을 더 좋아했는데, 공부하며 애니메이션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움직이지 않는 2D와는 다르게 애니메이션은 살아있다. 생명을 가지고 역동적으로! 협업이 필수적인 영화와 달리 애니메이션은 프리프로덕션 단계서부터 오로지 1인 체제이다. 혼자서 최소 1년 정도의 긴 호흡으로 작업하다보면 중간에 객관성을 잃기가 쉬워지기 때문에 동료들과 커뮤니케이션을 소홀히 하지 않으려한다.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거야›
“우리들은 호숫가에 앉았지
나무처럼 싱그런 그날은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거야”1

정해지, ‹수라(修羅)›

구전되는 멜로디
김소형: 이야기는 타의에 의해서 가족이 된 사람들로부터 출발한다. 영화에는 할머니 ‘정연’과 손녀 ‘안’, 두 명의 여자가 등장하지만 사실 세 여자의 이야기다. 정연의 딸이자 안의 새엄마인 ‘미월’을 중심에 두고 화면 속 두 여자가 이야기를 나누는 구조다. 상대에 대해 잘 모르고 무관심했던 사람들이 마지못해 시공간을 공유하며 소통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정연과 안의 국적과 모어는 다르지만 서로의 언어를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는 관심사와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알아들어도 못 들은 척 하며 각자의 언어를 취사선택하다 나의 반응에 다시 반응하는 상대를 알아가게 된다. 이러한 언어적 장치들이 관계에 적용되며 오해와 이해를 이끌어내게 된다. “미월을 미워하기로 결정했다”고 안은 말한다. 이들이 상황에 따라 선택하는 것은 언어 뿐 아니라 관계도 마찬가지다.
영화의 제목은 여름에, 혹은 여름을 상상하며 듣는 산울림의 음악에서 차용했다. 영화의 시점보다 더 이전, 그러니까 정연이 미월과 함께 살 때 설거지를 하며 흥얼거리는 멜로디가 이 곡이었다. 미월은 그녀의 습관을 지겨워했지만 결국 이 멜로디에 옮으며 자라게 된다. 안과 사는 일본의 집에서 미월은 요리를 할 때마다 이 곡을 흥얼거리게 된다. 그리고 영화에서 정연은 이 노래를 흥얼거리는 안을 마주한다. 이를 발견하면서 이들은 공통의 경험을 공유하게 된다. 정연과 안, 미월과 안이 수동적으로 맺어진 관계에서 출발해 유대하는 세 사람의 이야기로 확장되는 지점이다.
촬영을 한 계절 역시 더운 여름이었다. 영상원 한일합작 프로젝트에서 시나리오가 당선되어 일본으로 직접 건너가 제작한 영화다. 당시 한일관계에 여러 이슈가 많았던 때인데, 일본 현지 제작진들과 협력하며 값진 경험을 했다. 학교에서 한 가장 특별한 경험으로 꼽고 싶다. 여러 일본 영화를 보며 자랐고 많은 자양분을 얻었기에 일본에서의 제작 경험이 더욱 뜻깊었다. 한국과 일본의 교육 환경에서의 차이도 인상깊었다. 한국에서는 현장에서 학생들끼리 자발적으로 워크숍을 진행하는 반면 일본의 경우 현장의 모든 파트에 선생님이 상주하며 면밀하게 지도하는 커리큘럼을 갖고 있었다.

나로부터 출발한 우리
김소형: 졸업작품인 ‹우리의 낮과 밤›은 졸업을 앞두고 일 년 동안 휴학을 한 시기에 구상했다. 처음에는 엄청난 대서사시가 나올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결국에는 나로부터 출발하는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나도 친구들도 계속해서 작업, 그러니까 일을 하면서 포기하려 했던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친구를 만나고, 건강한 수면을 취하고, 한 끼를 잘 챙기고, 계절의 감각을 선명하게 느끼는 등등의 작은 활동에 대해서.
결국에는 내 삶을 지탱해주는 일과와 관계를 소홀히 하지 않으며 작업을 하기로 했고 이런 마음가짐이 작품에 드러나는 것 같다. 영화의 로케이션이 내가 실제로 거주하는 집인 것, 내가 ‘나’의 역할을 연기하는 것도 나다운 맥락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 같다.

「수라(修羅)」
“나는 이 작은 것을 고히 보드러운 종이에 받어 또 문 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2

김소형, ‹우리의 낮과 밤›

소실되지 않는 시선들
정해지: ‘나’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견인하는 이 영화는 미성년자 친구의 임신 그리고 낙태를 지켜봤던 개인적인 경험을 풀어낸 것이다. 임신을 확인하고 낙태를 결정하는 일련의 사태를 바라보는 어른과 또래 친구들의 시선이 내내 불쾌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내가 왜 기분이 나빴고, 어떠한 지점에서 부당함을 느꼈는지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다만 이 감정을 잊지 말자고 다짐했다. 나에게 있어 작업은 이렇듯 어떤 순간의 감정들을 언어화하는 활동이다. 미성년자의 임신과 낙태를 주제로 다룬 만큼 창작자인 나 역시 학생 신분일 때 이 이야기를 해야한다는 시의적 사명감이 있었다.
작품의 모티프인 백석의 시 「수라(修羅)」에서는 제3자인 시적화자가 거미 가족을 해체하게 되었지만 곧 이들이 재회하기를 소망한다. 거미는 영화에서도 주요한 제재로 등장한다. 거미는 보편적으로 사랑받는 생명체가 아니다. 사람들은 거미에게 쉽게 혐오감을 느끼고 드러내곤 한다. 그들이 거미에게 취하는 태도와 임신한 미성년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유사하게 느껴졌다. 어른들은 교사, 의사, 간호사, 환자의 모습으로 나온다. 이들의 얼굴에서 감정 표현을 최대한 배제하여 방관의 태도를 드러내고 싶었다. 친구의 임신은 가족 공동체를 꾸릴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잠재되어 있었지만 거미를 치우듯이 매끄럽게, 표정조차 없이 그 가능성은 지워진다.
전반적인 아트워크에서 여러 시행착오가 있었다. 처음에는 면으로 구성된 아트워크들로 묘사를 시도했는데, 아이들의 고립된 상황과 감정들이 담겨지지 않아 방향을 수정했다. 공간을 구성하는 여러 레이어들이 투명하게 교차할 수 있도록 표현해보았는데, 그 투명성을 통과하는 공허함만이 남게 되더라. 실제로 그 당시 우리 둘밖에 없다는 고립감과 무력한 감정이 들었었다.

밖의 반응과 안의 감정
정해지: 영화를 출품한 안시영화제가 온라인으로 치러졌다. 안시를 직접 방문하지 못했지만 온라인으로 여러 매체와 영화인들과 연결될 수 있었는데, 국내와 해외 관객들의 반응이 달랐던 지점들이 흥미로웠다. 한국 같은 경우 나와 친구의 감정선에 집중하며 이에 대한 코멘트를 많이 받았다. 반면 프랑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간호사가 낙태에 대한 설명을 할 때의 태도와 내용에 대해서 여러 질문을 받았다. 화두가 되는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 항상 촉각을 세우고 곧장 어떤 활동으로 표현하는 편은 아니다. 큰 이슈가 아니더라도 나와 친구들의 주변에서 항상 도사리는 것들이 있다. 스스로 온전히 체감하며 느끼는 것들에 대한 나의 감정을 주목하는 편이다. 작업의 전개방식 또한 객관적 자료 조사부터 시작하기보다 이 주제 혹은 이야기에 대한 나의 감정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끝맺을지 가늠하는 것부터 출발한다.

김소형,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거야›

접촉 없이 연결되는 이야기들
김소형: 온라인 상영으로 배급 환경이 바뀌며 수적으로는 훨씬 많은 관객들에게 작품이 도달가능해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공간을 공유하는 극장 경험을 통한 관객과의 만남은 그립다. 어떤 이야기로 사람들과 만날 수 있을까에서 더 나아가 어떤 포맷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다.
정해지: 국내에서 상영되는 단편 애니메이션 영화제 같은 경우 관련 종사자, 입시생 등 관객의 스펙트럼이 아주 한정적이다. 오히려 플랫폼을 통한 단편 애니메이션 배급으로 인해 불특정다수의 관객들에게 접근성이 좋아졌다. 안시영화제에서도 심사, 수상발표, 상영 모두 온라인으로 진행하며 새로운 환경에서 예상치 못한 관객들을 만나게 되었다. 애니메이션은 작업구조상 관객과 소통할 기회가 매우 적은 편이다. 그러나 새로운 플랫폼과 접근 방식의 변화를 통해 양방향의 커뮤니케이션이 풍요로워지길 기대하고 있다.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작업의 호흡이 긴 영상 매체가 생명력을 잃지 않는 구조와 방법에 대해 고민 중이다.

그리고 다가오는 것
김소형: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데이팅 어플로 만난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멜로 장르다. 온전히 내 의지로만 할 수 있는 것은 글을 쓰는 일 밖에 없는 것 같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다. 어떤 흐름에서 어떤 것들에 애정을 가지고 그것이 어떻게 소멸되는지 친구들과 공부하는 중이다. 학교 생활을 하고 작업 활동을 하며 나의 시간을 지지해주는 큰 동력은 친구들이다. 친구들과 자주 이야기한다. 서로의 심신건강을 소홀히 하지 않고 지속가능한 작업을 함께 하자고!
정해지: 안시영화제에서 수상자들을 내년에 재초청 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무탈한 환경에서 유럽 방문을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임대 아파트를 비롯한 주거 환경에서의 차별과 배제를 주제로 다음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 출품을 하고 작업을 이어나가다 보니 배움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는 사람은 자기가 한 말을 듣기도 하는 사람이다…말한 사람 자신은, 말해진 것이 불완전하고 서툼에도 불구하고, 그것과 상관없이, 완전하고 정확하게 듣는다. 그가 듣는 것이 말해진 말이 아니라 말해지기 전의 말이기 때문이다.”3 그러니까 그들은 말해지기 전에 감각되는 심경들의 정체를 밝히고자 한다. 아득한 훗날을 짐작하기보다, 매일 선명하게 우리를 통과하는 이야기를 포착하여 각자의 방식으로 발화하는 두 감독의 말들을 오랫동안 들을 수 있기를.

글 김다은 | 사진 김경수 | 영상 이상희
1 산울림의 노래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거야›의 가사, 1977년 1집 앨범 «아니 벌써»의 수록곡이다
2 백석의 시 「수라(修羅)」, 1936년 시집 『사슴』에 실렸다
3 이승우, 『모르는 사람들』, 문학동네, 2017년, 1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