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대 후반에 접어들면서부터 종종 황당한 전화를 받곤 한다. 압구정에 있는 모 맞선업체, 강남에 있는 모 결혼정보회사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무참히 끊어버릴 때면 이런저런 생각들이 든다. 내가 왜 결혼을 해야 하지, 내가 결혼할 조건은 되나? 그러다보니 한 노래가 떠오른다. “장가갈 수 있을까, 시집갈 수 있을까”라며 이 노래는 묻는다. 남들 다 하는 결혼, 올해가 가기 전에 나도 할 수 있을까? 전에는 흘려들었던 가사가 새삼스레 턱 하고 걸려온다. 왜 우리는 남들 다 하는 결혼을 해야 하는 걸까. 정말 남들 다 하는 결혼인 게 맞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남들이 다 하니까 나도 그래야만 하는 걸까. 그러니까, 그냥 그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2020년 지금 대한민국의 20-30대 여성들에게 대체 결혼이란 뭘까? 그저 나이 먹기 전에 해치워야 하는 일종의 과제같은 걸까? 결혼, 정말 그렇게 해도 될까? 이 질문과 불안 속에서 하나의 이야기1를 만났다. 실존과 생존과 이기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다.

#실존과_생존과_이기
매일을 치열하게,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서만 위해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사랑이나 감상이나 상념 같은 것은 모조리 거추장스럽게만 느껴진다. 오로지 생존만을 위한 삶을 겨우 지나고 나면 문득 혼란스러워진다. 왜 이렇게 살고 있나. 나는 누구일까. 나를 나이게끔, 나일 수 있게끔 하는 건 무엇일까. 나를 규정하는 조건들에 대한 질문은 때때로 이기심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오롯이 ‘나’이고픈 어떤 욕망이 곧 이기라면 말이다. 그러니까 결국은 실존과 생존과 이기는 서로 다른 이름을 하고 있지만 사실 다 같은 존재가 아닐까?

#이야기
이 연극의 서사를 한 줄로 정리하라면 각 커플들의 사랑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각각의 커플-인물들이 지니고 있는 상징성이다. 연애와 결혼과 이혼 사이에서 새삼스레 묻는 결혼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질문은 이혼한 남일과 희수가 각각 새로운 연인을 만나면서 스펙트럼을 더 넓혀나간다. 희수의 새로운 애인인 재훈은 희수와의 결혼을 꿈꾸지만 철저하게 비혼을 주장하는 희수 앞에선 속수무책이다. 결국 재훈은 희수 몰래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는 동료 교사 지나와 결혼을 준비한다. 그러나 지나와의 갈등에서 배우는 것은 ‘결혼은 현실’이라는 냉혹한 사실이다. 재훈은 지나의 결혼 준비 과정이 지나치게 냉정하다고 비난하지만 그런 재훈에게도 결혼은 결국 그저 자신의 로망을 채워주고 체면을 살려주는 도구인 듯 보인다. 한편 남일의 애인 여은은 행복주택 퇴거일을 앞두고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녀는 심적으로 불안할 뿐만 아니라 강사법 개정으로 인해 일자리까지 위협받게 되면서 보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공포에 직면해 있다. 여은에게 결혼은 안정된 삶이 보장되는 선택일 것이다. 그러나 다가오는 퇴거일에 초조해하며 “네 옆자리 말고, 나 발 디딜 곳이 없다고!”라며 소리치는 여은에게 남일은 “내가 옆에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라고 되물을 뿐이다. 남일에게 여은의 생존문제는 어떻게 와닿고 있는 것일까? 사랑한다고 말하는 혹은 믿는 이 남녀에게 생존과 삶과 사랑은 같은 온도일 수 있는 걸까?

‹이것은 실존과 생존과 이기에 대한 이야기›, 2020 ©두산아트센터

#이것은_실존과_생존과_이기에_대한_이야기
연애와 사랑과 결혼과 이혼을 둘러싼 커플들의 이야기처럼 보이는 이 극은 사실 조금 더 본질적인 삶의 조건에 대해 묻고 있다. 생존이 곧 삶의 필수 조건이라면 우리는 감히 생존의 차원을 뛰어 넘어 실존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나를 나일 수 있게끔 하는 실존의 조건은 대체 뭐란 말인가. 실존은커녕 생존조차 불확실한 누군가에게 감히 ‘이기’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것은 실존과 생존과 이기에 대한 이야기›는 관객들에게 이런 것들을 묻고 있는 것 같다.
남일에게 발기의 가능 여부는 곧 실존의 문제이지만 흙수저로 태어나 불안정한 시간강사의 삶을 버텨내는 여은에게 생존 너머 실존의 문제는 사치일 뿐이다. 반면 서로의 이기심에 대해 힐난하는 재훈과 지나는 어쩌면 생존의 문제에서는 조금 여유로울 수 있는 인물들일지도 모른다.
극의 클라이막스에서 자신을 찾아와 “너 왜 이렇게 변했냐”고 묻는 남일에게 희수는 울부짖다시피 묻는다. 도대체 ‘변한 나’는 누구냐고. 변하기 전의 나는 또 누구냐고. 희수의 물음은 우리가 쉽게 판단하고 마는 이기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것을 권한다. 진짜 나를 찾고자하는 욕망이 이기라면, 우리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믿음으로 상대에게 너무도 쉽게 내뱉는 “너 참 이기적이다”라는 말이 실은 내 이기심을 투영하고 있는 건 아닌지. 서럽게 우는 희수에게 아버지 갑구는 말한다.
네 엄마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은 엄마 자신이었고, 다만 본인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좋은 엄마이고 싶은 욕심까지 버릴 수 없었던 거라고. 그러니 너도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가라고. 갑구의 이 말은 사랑, 연애, 결혼과 출산의 문제가 저마다의 실존과 생존 그리고 이기의 문제를 관통하고 있음을 담고 있다.
‹이것은 실존과 생존과 이기에 대한 이야기›는 멈추지 않고 조금 더 나아간다. 남일과 희수의 딸인 수이가 남자친구와의 연애를 들키는 장면은 매우 유머러스하게 그려지지만 그 안에는 분명 세대를 거치며 달라진 사랑관이 담겨있다. 이처럼 ‹이것은 실존과 생존과 이기에 대한 이야기›는 결혼이란 그저 두 사람의 결합이 아닌 각각의 사회가 만나고 부딪히는 과정이라는 것을 쉼없이 일깨워주며 그저 스쳐지나갈 수 있는 장면들에도 우리가 조금 더 예리하게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들을 배치한다. 뿐만 아니라 별 거 아니라는 듯이 흘러가는 대화들 사이에서는 중산층 가정의 조건과 노후의 문제까지 놓치지 않는다. 또 이혼남 남일과 결혼을 꿈꾸는 남자 재훈이 툭툭 내뱉는 말들에서는 여전한 대한민국 남성들의 결혼과 연애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도록 만든다.
남들 다 하는 결혼이니까 결혼해야 한다는 시대는 분명 지났다. 그러니까 다시 노래하자. 나는 나일 수 있을까. 이 질문의 끝에 비로소 너를 온전히 인정할 수 있는 결혼이 있을 것이다. 결국 결혼의 조건은 다름 아니라 내가 진짜 나일 수 있는 것에 있는지 모른다. 내가 진짜 나일 수 있을 때 진짜 너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까.

글 전하림
1 ‹이것은 실존과 생존과 이기에 대한 이야기›, 2020.2.13~2.15, 두산아트센터, 진주・최보영・황정은 세 명의 극작가가 쓰고 2020 두산아트랩으로 공연된 연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