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만든 영화 ‹기생충›(2019) 이후 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영화 미술감독 이하준. 번쩍이는 환호를 뒤로하고 앞으로 만들 영화에 대한 무한책임으로 담담한 그의 영화 이야기를 들었다.

영화 ‹기생충›의 충고
“아카데미에 기생충이라는 작품이 올랐다는 것, 영화 하나로 전 세계 사람들이 열광하고 주목을 할 수 있다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매체에서 보던 감독, 배우, 스텝이 제 눈앞에 있고 대화를 나누고 그 자체가 굉장히 기뻤죠. 현장에서 그 사람들의 반응을 느끼고 온 거잖아요. 이 영화를 정말 사랑해 주는구나. 정말 진심으로, 영화를 지금까지 생각했던 만듦새와는 다른 자세로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 것 같아요.”

오프스테이지 off stage
영화 ‹기생충› 기택의 집은 그가 학창 시절 학교 근처 반지하 방에서 살았던 기억을 더듬어 디자인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시절의 치열한 생활이 지금 그의 원동력이라 생각한다.
“외대 쪽하고 회기 쪽, 거기 반지하에 학교 선배님과 같이 살았어요. 그 기억을 더듬어 가며 기택 집 세트를 디자인했어요. 그 당시 힘든 시절이었으니까, 돌이켜보면 추억이기도 하고 그 기억들이 더 좋은 아이디어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해준 것 같아요.”
“지금은 정말 잘했다고 생각해요. 물론 자취를 했지만 학교에 거의 살았어요. 큰 책상 밑에 커튼을 쳐놓고 그 밑에다가 스티로폼을 깔고 항상 거기서 잤었어요. 심지어 학교에 밥통도 있었어요. 그 당시에는 학교에 모든 열정을 쏟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교수님이나 선배님들과 같이 일할 기회가 남들보다 더 많았던 것 같아요.”
그는 살아 숨쉬는 연극무대에 매료되어 무대미술을 시작했지만, 일거리를 찾던 중 우연한 계기로 영화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 당시 충무로의 영화 시스템이 자신의 방향성과는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그걸 이겨내는 과정에서 학교에서의 배움이 소중했다고 말했다.
“연극 쪽 여건이 더 힘들었어요. 다른 아르바이트를 찾던 중에 영화 미술감독인 선배님의 소개로 미술팀에 들어가게 됐고, 그게 ‹국화꽃 향기›(2003)라는 영화였어요. 그때 일을 하면서 ‘연극원 무대미술과를 나온 애가 영화미술을 하고 있다’는 좋지 않은 시선이 꽤 있었어요. 당시에는 프로덕션 디자이너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고, 오히려 현장에서 세트를 만드는 제작자가 더 힘을 발휘했어요. 한번은 저는 미술을 하는 사람이니깐 어떤 공간을 만들기 위해 벽의 질감이나 컬러에 대한 샘플 북을 만들어 ‘이 부분은 이런 질감을 내고 이런 색깔로 했으면 좋겠습니다.’하고 세트 제작하는 분한테 설명을 했는데 발로 뻥 차버리시는 거예요. 그땐 ‘너희가 뭔데’ 약간 이런 취급이었죠. 그게 굉장히 충격적이었어요. 그래서 내가 이 일을 어떻게든 해보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충돌의 과정이 있었지만, 제 생각을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는 학교 분위기 속에서 체계적으로 배웠기 때문에 밖에 나가서 솔직하게 하고 싶은 얘기를 하면서 작업에 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존에 있던 틀 안에 들어가는데 시간이 걸렸던 것 같아요.”

영화 ‹기생충› 박사장 가족의 저택, 2019 ©상상공작소

예정된 소멸
그의 작업은 글로 된 세계에서 출발하여 많은 레퍼런스를 찾고 작가와 영화감독과 의견을 나누면서 그것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완성된다. 영화를 위해 그 많은 시간을 공들여 세트를 만들지만 자신이 만든 세계를 허무는 마음도 궁금했다.
“처음 영화 미술을 했을 때는 혼자 우울해하고 아쉬웠던 것 같아요. 그러나 지금은 없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커요.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이 공간 자체가 영화 안에서만 존재했으면 좋겠어요. 영화 안에 그 공간이 있을 때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영화 ‹기생충›의 세트가 복원된다는 이야기에 대해서도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기생충› 세트를 다시 만든다고 하는데 저도 기사를 통해 알았습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저랑 같이 작업했던 사람들도 그럴 것 같아요. 해외에서 큰상을 받았고 기존의 관객들과 국민이 다시 보고 싶어하는 소중한 마음은 잘 알지만 저희는 그런 사례를 몇 번 봤어요. 한때 많이 세웠던 드라마 세트들이 지금 보면 거의 소멸한 곳들이 많거든요. 결국은 대부분 관리가 안 된다는 거예요. 관리가 안 되는 세트를 굳이 돈을 들여가면서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한 어떤 계획 아래에 진행되어야 하고, 지금 당장 이 사건(‹기생충›의 해외 수상)이 뜨고 있어서 만드려는 것은 반대합니다. 혹시 미국 유니버설 스튜디오처럼 기획된 환경이 조성된다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지만 현재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영화 ‹기생충› 기택 가족의 반지하, 2019 ©CJ엔터테인먼트

실재와 사실 사이
“영화를 소비하는 방식이 바뀌었다고 미술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것 같지 않아요. 저희도 레퍼런스를 찾기가 쉬워졌고 요즘 관객들이 프레임 단위로 쪼개 감상하는 것과 별개로 영화 자체를 만들 때 필요한 디테일한 요소는 기본적으로 잘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요즘 디지털화가 되면서 화질이 4K, 8K 어마어마하잖아요. 그러면서 오는 미술적인 변화가 있어요. 예전에는 실 자재를 사용하지 않고 가짜로 그럴싸하게 만들었다면 요즘은 그렇게 하면 관객들이 다 알아요. 예를 들어 예전에는 벽돌은 스티로폼으로 형태를 만들고 그림을 그려 덧입혀서 ‘이게 진짜 벽돌이야’라는 것처럼 만들었다면 디지털 기술이 발전하면서 그 자체도 잡아낼 수 있어요. 그래서 실 자재를 사용해야 하고 그렇게 되니까 건축과 거의 비슷한 형태로 세트들이 만들어지고 시간, 돈, 인력 같은 것들이 훨씬 많이 투여될 수밖에 없어졌고 그러면서 더 신경 쓸 게 많아졌어요. 더 실제같이 보이기 위해 하는 노력은 더 드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꼭 실제 자재만을 써야 실제 같다는 논리는 아니거든요. 왜냐면 실 자재라는 것은 새 것이니까. 지금 방금 나온 거. 거기에 시간이라는 것을 입히는 작업이 필요해요. 그런 것들이 저희가 고민하게 되는 지점인 것 같아요. 앞으로도 영상 기계들이 발전할 것이고 그에 따른 미술의 변화도 자연스러운 변화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함께 있는 방식
그는 영화 작업의 매력을 공동의 목표 아래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눌 수 있기 때문이라고 꼽았다. 그리고 자신의 팀원들과 오랫동안 함께 하기 위해서는 한국 영화 제작 시스템의 내실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현장에서는 대부분 같이 움직이고 일하는 시스템이다 보니 기쁨과 슬픔, 힘듦,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아요. 그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혼자 감당하라고 하면 저는 못 할 것 같아요. 이 작업만의 매력이 있어요. 영화팀만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의 차원이 다른 것 같아요.”
그가 들려준 영화 ‹기생충› 제작 중에 세트장에 태풍이 지나갔던 일화를 통해 함께하는 사람과 영화에 대한 사랑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전주에 ‹기생충› 박사장의 부잣집을 만들어 놓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태풍이 온 적이 있었어요. 태풍이 꽤 세서 세트가 날아갈 수도 있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세트를 보호하는 작업을 했지만, 아직 촬영할 것들이 많이 남아 걱정이 됐고 그날 미술팀 모두 세트에서 밤을 지새웠죠. 사실 임시 건물로 만든 곳이기 때문에 그러면 안 되는데 이걸 그냥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어요. 무너질 때 무너지더라도 우리 눈으로 확인하고 대처 방법을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죠. 그날 하루를 함께 버텼어요. 정말 절실했던 것 같아요. 다행히 무사히 태풍이 지나갔는데 우리의 염원 같은 것들이 통하지 않았나 싶어요.”
“지금껏 오랫동안 같이 일했던 우리 팀이 앞으로도 더 오랫동안 함께 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각 분야가 미국처럼 더 전문화가 되어 일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해요. 미국은 봉준호 감독님이나 저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분이 아직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세요. 하지만 우리는 원로 감독분이나 오랜 경험이 있는 스텝이 영화를 못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분들이야말로 훌륭한 영화를 만들었던 감독과 스텝이었고, 우리나라의 영화를 이끌던 분들이셨는데 지금도 함께 일하면 시너지와 경험을 함께 공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런 시스템을 만드는 것도 미술감독으로서 고민하는 부분 중 하나예요.

영화 ‹해무› 전진호, 2014 ©상상공작소

관찰자의 기술
그는 프로덕션 디자이너를 희망하는 친구들에게 조언을 남겼다.
“보는 눈을 키워라. 보고 싶은 것, 좋은 것만 보려고 하지 말고 그렇지 않은 것, 나쁜 것들도 두려워하지 말고 많이 보려고 노력을 해야 해요. 그런 것들이 쌓이면서 좋은 자신의 자산이 된다고 생각해요.”
“정말 중요한 것은 사진을 찍기보다는 기억하려고 노력을 하는 것이 잔존가치가 높은 것 같아요.”
그는 미적 이미지의 홍수 속에 쉽게 얻은 레퍼런스보다는 도서관에서 힘들게 찾은 자료들이 값어치 있고 귀하게 쓰일 수 있다며 과정의 성실함을 더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자신이 학창 시절 교수님들께 하사받은 말을 후배들에게 꼭 전하고 싶다고 했다.
“모든 일을 할 때는 진정성으로 일해라”
“항상 등 뒤에 큰 칼을 꽂고 다녀라”
그는 당시에는 그 말이 공감되지 않았지만 일을 계속하면서 더 와 닿는다고 했다. 그에게 진심을 담아 일한다는 것은 결국 ‘영화라는 큰 작업은 작은 과정 하나하나를 소중히 생각할 줄 아는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등 뒤에 큰 칼을 차는 것은 영화의 규모가 커지고 함께 하는 스텝들이 늘어나면서 마주했던 결정의 순간에 망설임 없이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용기를 말한다.

낯익은 두려움
그가 일하면서 편하게 했던 작품이 있었을까? 10년 전 70~80%가 세트에서 촬영된 ‹하녀›(2010)도 실제로 바다에 나가 촬영한 ‹해무›(2014)도, 지금 ‹서복›(2020)까지 그의 필모그래피에는 비슷한 설정, 환경이 거의 없다. 모든 작품이 그에게는 도전이었다.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 해보지 않았던 것에 대한 도전이 좋아요. 해왔던 것들이 편하긴 하지만 그런 것은 재미가 떨어지고, 제가 재밌지 않으면 잘 안 나와요. 도전해서 만들어낼 때 결과물이 재미 있어요. 지금도 실은 새로운 영화를 하면서 두려움에 떨기도 하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아요. 물론 좋지 못한 결과 때문에 사람들한테 질타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제가 하려고 한 이상 두려워하면 안 되고 제 자신을 독려하면서 더 좋은 에너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글 신기철 | 사진 최요한 | 영상 강주희 · 전지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