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어찌하여 다른 동물과 다른가? 누군가는 인간의 복잡한 언어 체계를 말할 것이고 또 다른 이는 인간의 비효율적인 요리법을 들어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 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인간은 기억하고 상상하는 동물이라고. 만일 인간의 이 독특한 사유 능력이 없었더라면 예술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최초의 ART가 기술에서 시작했다면 현재의 예술은 최초의 껍데기를 깨고 과거와 현재, 상상과 미래를 한계 없이 넘나들고 있다.
언제나 그렇듯 예술작품은 작품을 둘러싼 사회와 영향을 주고받는다. 우리는 예술 작품에 사회가 남겨놓은 흔적을 확인하고, 때로는 그 반대의 상황을 목격하기도 한다. 본 기사에서는 ART의 현재를 반추하기 위해 최근 활발하게 제작되고 있는 동시대 영화의 흐름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기회를 통해 현대 사회가 영화에 남겨둔 흔적들을 확인하고, 동시에 현대 사회에서 예술이 점유하고 있는 지금, 여기를 읽어낼 것이다.
과거로부터 소환한 거울이 되어 현재의 여성상을 비추는 영화들, ‹로마›(2018)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이 있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거대자본 영화와는 달리 보잘것없어 보이는 여성을 중심으로 한 작은 이야기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영화 ‹로마›는 1970년대 멕시코의 정치적 과도기 속에서 가정부 일을 하는 클레오를 주인공으로 개인과 가정(일터), 사회의 변화를 그린다. 원치 않는 임신 후 아이를 낳기로 결심한 클레오는 병원에서 이미 죽은 아이를 낳고, 클레오의 고용주이자 네 아이의 엄마인 소피아는 남편과 이별하고 홀로 가정을 책임지기로 마음먹는다. 각자의 아픔을 겪은 뒤 해변에서 서로 껴안는 이들에게 유일하게 남은 것은 아름다운 연대다. 시대가 바뀌고 가정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었지만, 끊임없이 몰아치는 파도를 맞으면서도 서로를 깊이 안아주고 타인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마지막 장면을 위해 영화가 달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예술가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노골적으로 차별받고, 동성애가 용납되지 않았던 중세의 프랑스에서 열정적이고 양 방향적이었던 여성 연인을 그린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중세의 저택에 하녀, 아가씨, 화가 세 명만이 남았을 때 세 여인은 타인이 부여한 신분을 벗어던지고 완전히 평등한 관계를 보여준다. 이들은 아픈 시녀를 돌보고 저녁 식탁에 둘러앉아 신화와 예술을 토론한다. 마치 관객에게 인생의 철학과 예술을 나누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평등과 연대라고 말하는 듯하다. 한 저택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작은 규모의 이야기지만 정밀화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운화면과 단단하고 섬세하게 쌓아 올린 이야기는 마지막 시퀀스에서 비발디의음악과 함께 폭발하며 관객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다. 가부장제에 존속되어야 하는 여성의 위치를 그리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의 사랑과 연대를 현대 사회가 당면한 문제들의 돌파구로 제시하고 있다.
‹플로리다 프로젝트›(2017)와 ‹가버나움›(2018)은 어두운 길에 사는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집 없이 플로리다의 모텔지구에 모여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핼리와 무니, 두 모녀를 중심으로 풀어나갔다. 지나치게 동화적인 총천연색의 건물과 어린아이들의 천진한 얼굴, 그리고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원색적인 욕설과 폭력의 대치는 보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었지만 계속해서 자라기 때문에 이 나무를 좋아한다.”는 무니의 대사는 이 삶 가운데서도 그들이 지닌 희망을 보여준다. 미국의 대표적인 거대자본 관광지 디즈니랜드와 자원단체에서 나눠준 빵을 먹으면서도 희망을 이야기하는 아이들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이 극명한 대비는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사회는 무엇인가를 고찰하게 한다.
어떤 이들은 갈 곳을 잃었다. 단지 집이 없다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 이들은 돌아갈 조국과 고향, 가정을 잃은 사람들이다. 레바논의 이민자거주지에 감독이 붙인 이름 ‘가버나움’은 성경에 나오는 지옥처럼 타락한 공간이다. 주인공 자인은 무책임하게 아이를 낳고 돌보지 않는 부모들과 교육도 받지 못하고 거리에 내몰린 아이들의 현실을 고발한다. 또 한명의 불법 체류자이자수용소에서 다시 만나게 된 라힐이 자인에게 던지는 처절한 질문은 마치 관객에게 던지는 듯하다. 아이는 왜 그곳에 있는가?
흑인 소년의 정체성과 성장에 대한 영화 ‹문라이트›, 동성애에 가해지는 사회적 억압에 연인과 헤어져야 했던 한부모 가정의 가장 윤희를 주인공으로 한 ‹윤희에게› 등 소수자들의 영화가 최근 해일이 되어 밀려오고 있다. 이민자, 동성애자, 빈곤층, 비백인, 여성, 노년층… 여기서 자연스럽게도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왜 소수자를 주제로 하는 예술작품이 확연히 늘고 있는 것인가? 안타깝게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타칭 소수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라 하겠다. 기득권층이 타인에게 ‘소수자’라고 이름 붙이는 행위는 자신이 정(正)이고 타인이 반(反)이라는 기만에서 비롯된다. 빈부격차는 물론 이쪽과 저쪽을 구분 짓는 갈등이 점점 심화되는 현대 사회에서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현재의 예술은 자력구제가 불가능한 그들의 삶과 사회 시스템에 초점을 맞춘다. 감독의 뜻으로 실제 이민자와 불법 체류자들이 배우로 참여한 ‹가버나움›은 큰 반향을 일으키며 네 명의 배우를 학교에 보내고 두 가정을 안전한 나라에 정착시켰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 무니를 연기한 배우 브루클린 프린스는 2018년 Critics Choice Awards(CCA)에서 “이 상을 세상의 모든 무니와 핼리에게 바친다. 우리 모두 이 심각한 문제에 동참해야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영화들의 가치는 움켜쥔 수많은 상과 수식어 그 이상에 있다. 동시대예술은 지금도 해결되지 않은 사회적 문제와 싸우고 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 사회가 가야 할 곳으로 분명하게 방향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동시대 영화들은 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타인의 곤경과 아픔을 곧 나의 문제로 만들고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설사 그것이 타인의 문제라 할지라도 우리는 풍요 속에서도 빈곤을,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아픔 속에서 재기를 능히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다. 상상력의 공감은 더 나아가 연대를 위한 행동은 사회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바다에서도 사막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이 능력이야말로 예술을 탄생시킨 인간의 재능이자, 인류를 끝없이 발전시키는 힘이다.

글 김수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