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학교의 문턱에서
예술학교의 신입생이라니. 나름 높은 경쟁을 뚫고 입학했다는 자부심을 느끼는 것도 잠시, 무척이나 불안하다. 곧 시작되는 학교생활은 매 순간이 고비일테다. 배움이 깊어질수록 내가 그리 단단하지도, 똑똑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마주해야하기 때문이다. 입시를 거치며 허겁지겁 쌓아올렸던 지식의 틀은 무너진다. 확고했던 신념과 전제에 금이 가고 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에 몸이 시리다. 당연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보인다. 그 시절을 우리는 어떻게 지나왔을까. 어려움의 순간마다 필요했던 건 충분한 지식과 비상한 재능보다도 혼란과 균열 자체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그리고 그 지난한 과정을 같이 헤쳐나갈 수 있는 동료들이 아니었을까.

0학년 0학기: 제로 에듀케이션
올해로 두 번째 진행되고 있는 ‘제로 에듀케이션’은 예비 신입생들에게 그러한 필요를 채울 수 있는 기회였다. 예술지성인을 모토로 인문, 사회, 체육, 과학 등에 이르는 전반적인 교양교육을 제공하는 예술교양학부는 2019년부터 예비 신입생을 위한 제로 에듀케이션을 운영하고 있다. 30여명 내외의 인원과 일주일 정도의 커리큘럼으로 구성되었던 작년과 달리 올해는 약 75명(영상원 22명, 연극원 26명, 미술원 17명, 음악원 1명, 무용원 6명, 전통원 2명)에 이르는 학생들이 A, B, C반으로 나뉘어 3일 간 (2020.2.4~2.6) 6개의 수업을 듣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제 막 새로운 세계로 자신을 던져야 하는 신입생들에게는 피기 직전의 꽃봉오리와 같은 싱그러움과 탄력이 느껴졌다. 어떤 마음으로 이곳에 왔는지 궁금해졌다. 전통예술원 무용과 정예지는 “낯을 가리는 편이라 고민했지만 그래도 입학했을 때 아예 모르는 사람으로 지낼 수도 있는 친구들과 교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왔다.”고 했다. 정예지의 말처럼 인터뷰에 응한 학생들 중 많은 수가 타원 학생들과 만나 교류하고 싶어 참여했다고 밝혔고, 일부는 전공공부나 작업을 하는 데 있어 인문학적인 기초가 필요하다고 느껴 오게 되었다 했다.

벌어지는 틈 사이로
6개의 수업에서 신입생들이 맞닥뜨린 첫번째 메시지는 스스로에 관한 성찰적 태도를 갖출 것, 회의와 번복의 순간이 와도 당황하지 말 것. 복도훈 교수가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서 던진 화두는 ‘우리가 안다고 생각했던 합리와 이성이 얼마만큼 확고한 것인가?’였다. 복 교수의 말에 따르면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에 지혜롭게 답했던 오이디푸스도 사실 불완전한 지식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데카르트 이후의 인간에게 확고하게 자리잡은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은 늘 의심의 대상이어야 한다. 앞으로 배우게 될 지식은 지금까지의 신념과 스스로의 정체성을 흔들 수 있으며, 그 순간은 반드시 온다.
‹왜 지금 신화인가?›는 그런 순간들이 닥쳤을 때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이야기’임을 알려주었다. 민승기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신화의 내용 자체보다는 그것이 지금의 나, 지금의 인간에게 늘 다르게 다가가기에’ 치열하게 읽어야한다. ‘혼돈 상태인 인간의 머리와 마음 속에 질서를 부여해주는 것이 바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야기를 읽어내는 작업을 통해 현실의 의미를 어떻게든 찾아내고, 그럼으로써 버티고 견딜 수 있다. 나아가 이야기는 조금 더 나은 세계를 꿈꾸고, 계속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동력이 되어준다.
이전 두 수업이 프리뷰 또는 ‘이론편’이었다면 ‹예술과 아름다움›은 ‘실전편’의 예제와도 같았다. 강의를 맡은 조선우 교수는 ‘예술은 과연 아름다워야하는가?’라는 질문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기존의 미 개념과 부합하지 않아도, 인간의 생각과 마음에 틈을 내는 예술이 좋은 예술’이다. 예술의 존재 목적과 방향성으로 아름다움만을 내세우는 어떤 당연함에 대한 저항의 마음을 가지는 것, ‘그래서 좋은 예술은 진정 무엇인지’ 끝까지 고민하는 것이 예술가들의 몫이다. 어쩌면 가장 고집스럽고도 강하게 자리잡을 수 있는 전제, ‘예술은 아름다워야한다’는 생각을 깨뜨리는 새로운 관점을 접하며 어떤 눈빛들은 흔들렸지만 동시에 호기심으로 빛났다.

손을 내밀어 서로를 붙잡기
조금은 버거울 수도 있는 수업들을 듣고 방송영상과 이고은은 “겁도 나는 것 같다. 교수님들이 얘기해주시기를, 학생들이 학교생활을 할수록 더 칙칙해진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그렇다. 앞으로의 예술학교 생활에는 스스로와 예술에 관한 고민이 끝없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그 길을 혼자서는 갈 수는 없다. ‹스토리텔링 워크숍›은 바로 이 두 번째 난관에 대한 힌트가 되었다. 수업은 작은 놀이에서 출발했지만 나중에는 모두가 참여해서 유기적인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주제에 따라 장면을 구성하는 훈련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 속에서 신입생들은 전공과 상관없이 협업을 통해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내며 짧지만 치열하게 함께하는 즐거움을 누렸다.
거의 모든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힐링 수업이라고 꼽은 ‹Who are You? 2020›도 서로를 알아가는 기쁨을 다른 방식으로 가르쳐주었다. 상대방을 알아본 후 그 사람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소개하거나 학교에서 해보고 싶은 것들을 여러 사람들과 공유한 뒤 어떤 기대와 소망들이 있는지 나누는 활동 속에서 신입생들의 투박하지만 단단한 각오들을 엿볼 수 있었다. 또 예술가로만 한정될 수 없는, 평범한 한 사람으로서의 단면들을 서로 어떤 편견도 없이 보여주고 받아들이는, 새해 덕담처럼 따뜻한 광경이 펼쳐졌다.

아쉬움도 있었다. 학생들은 공통적으로 자신의 전공이든 타전공이든 실기수업을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을 원했고, 따라서 강의 위주로 구성된 커리큘럼을 아쉬워했다. 또한 6개의 수업이 가장 적절한 순서와 흐름으로 배치되지 못한 것이 문제로 언급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로 에듀케이션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생각해보지 않은 질문을 던져보고, 나 자신에 대해 돌아보고, 다양한 배경의 친구들이 가져온 각자의 세계를 잠시라도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 신입생들은 수줍게 말했다.
예술학교의 문턱을 넘어온지 오래된 지금, 나와 친구들은 잊어버린 시절을 생생히 겪고 있는 신입생들에게 이제 남은 건 직접 ‘살아내기’다. 밀려오는 혼란과 균열의 파도에 부딪히고 깨지기를 두려워 말고, 서로의 손을 꼭 붙잡길. 전공에 대한 부담감보다 설렘과 활력이 넘칠 때 적절한 지적 자극과 공동체적 작업을 경험한 그들이 이 특별한 기억을 품고 예술학교의 고단함을 이겨낼 수 있기를 바란다.

글 황은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