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한 소리의 떨림부터 거대한 울림까지. 숨 쉴 틈이 없던 50여 분간의 베토벤 함머클라비어 연주가 끝나자마자 그칠 줄 모르는 관객들의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베토벤 소나타 전곡 연주 시리즈의 일곱 번째 공연을 마친 2월의 어느 날, 자신의 연주처럼 한마디 한마디가 신중하면서도 따뜻함과 열정이 공존하는 피아니스트 손민수 교수를 만났다.

©Jino Park

베토벤 소나타 전곡 연주 시리즈, 그 3년의 여정
2017년도에 시리즈를 처음 시작하고 연주를 하면서 과연 마지막이 올까 생각을 했습니다. 저에게는 큰 도전이었고 끊임없이 찾아나가야 하는 긴 여정이었기 때문에 마지막 세 개의 소나타만 남겨놓으니 어딘가로 도달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요. 특히 이번 일곱 번째 연주에서 피할 수 없었던 함머클라비어 소나타를 준비하며 저 자신의 한계도 많이 느꼈고, 그걸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제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또 다른 모습의 피아니스트로 재탈피하고 있다고 할까요.

베토벤이라는 존재1
베토벤은 모든 피아니스트들에게 가장 익숙한 작곡가겠죠. 첫 걸음마를 하는 피아니스트들부터 베토벤의 초기 소나타들을 공부하게 되고, 평생 노년에 들어서까지도 끝없이 씨름하고 함께 하는 작곡가입니다. 저에게 베토벤은 음악가로서의 삶에서 가장 큰 선생님이 되어버렸죠. 베토벤을 공부하면서 논리적이고 구조적인 건축물과도 같은 음악을 어떻게 개인적이고 창의적으로 표현하는지 많이 배웠습니다. 그 속의 드라마,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놓인 비극과 희극의 공존, 한 사람의 인생을 관통하는 자기고백, 베토벤이라는 음악가가 인류에게 남기고 싶었던 것들을 제 나름의 방식으로 공부하고 이해해 나가며 또 다른 저 자신을 발견하는 것 같고요. 베토벤의 음악을 통해 한 인간이 시련을 당하고 병마와 싸우고 고통과 씨름하면서도 자신의 혼을 지키고 놓치지 않으려고 했던 정신을 배워 나가고 있는 거죠. 때문에 저에게 있어 베토벤은 자유의 상징이자 예술의 혼인 것 같습니다.

처음, 피아노와의 인연
필연이었던 거 같아요. 시작하게 된 계기는 기억이 안 나지만 어머니가 성악을 전공하셨고, 부모님이 모두 음악을 좋아하셨어요. 제가 기억할 수 있는 순간부터는 항상 피아노를 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제 선택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10대 시절 운이 좋게도 훌륭하신 선생님들을 만나서 음악가로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많이 배웠고, 저런 삶을 산다면 굉장히 가치 있는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연주에 대한 마음과 자세
타협을 하지 않는 것. 매일 연습을 하는 시간 속에서 너무나도 많은 유혹이 있어요. 음악이라는 것은 끊임없는 발견의 길이고 어떤 종착지가 있는 건 아닌 거 같거든요. 그런데 과정이 힘들다 보니까 중간 중간 ‘이제는 올 만큼 왔다, 내 종착지구나’ 이런 생각으로 스스로에게 보상을 주고자 하는 유혹들이 많은 거 같아요. 그래서 가능한 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자 노력을 하고 쉬운 길, 예를 들면 장점만 드러날 수 있는 곡들은 피하려고 하고 있고요. 오히려 저에게 도전이 되고 약점이 드러나는 곡들에 더 마음을 써서 한 단계씩 넓혀 나가려고 하는 것이 제 음악적 가치관인 것 같습니다.

‹손민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 시리즈 7›, 2020년 예술의전당 공연 ©목프로덕션

나를 있게 한 사람들
영향을 받은 훌륭한 연주자가 많죠. 라흐마니노프의 전집음반을 학창시절 처음 들었을 때 일주일 간 밤을 새며 CD가 닳도록 들었던 기억이 있어요. 어떻게 피아노를 이렇게 칠까, 감탄에 감탄을 하면서. 그리고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인 부조니의 몇 남지 않은 레코딩들을 들어보면 음악이라는 것을 이렇게 다르게 노래해도, 이토록 확신에 차서 누군가를 설득할 수 있다는 걸 느끼죠. 물론 그 밖에 수도 없는 연주자들이 있지만, 저에게 멘토이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연주자는 저의 선생님이죠. 러셀 셔먼 선생님은 제 인생의 모든 영역, 정치, 사회, 문화, 스포츠, 과학, 종교까지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신 분입니다. 저는 선생님의 생각, 선생님과의 대화를 통해 제 가치관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을 빼놓고는 저의 인생을 논할 수가 없을 거 같아요.

연주자와 교육자, 그 경계 선상에서
저는 사실 연주자와 교육자로서의 삶은 경계선이 없는 거 같아요. 왜냐면 제가 학생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연주에 관한 부분이니까요. 오히려 제 연주자로서의 모습이 학생들에게도 영향을 끼치니 늘 자아성찰을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학생들에게 보여지는 하나하나가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엄격해지려 하고 더 나은 모습으로 보여지길 바라죠. 교수가 되고 매일의 생활에서 바뀐 점이 있다면 아침형 인간이 되어야겠더라고요. 연습을 늦은 시간까지 해보기도 했는데, 그러면 쫓기는 마음으로 연습을 하게 돼요. 차분하게 고요한 마음으로 발견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없어지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일찍 일어나서 연습을 하는 과정이 제일 필요했어요. 미국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할 때 선생님이 저에게 해주신 말씀이 딱 한 가지였는데, ‘네 루틴을 찾아라’였거든요. 당시에는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가 정말 시간에 쫓기는 생활을 하다보니 그것이 왜,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죠.

한예종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장인정신이라 해야 할까요? 보통 음악원 피아노과 학생들을 보면 정말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다뤄왔고, 흐트러짐이 없어요. 다른 길을 가야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들처럼. 그래서 대부분의 학생들이 정말 집중력이 강해요. 절제(discipline)라고 하죠? 피아노를 치기 위해선 연습실에 틀어박혀 여러 유혹을 참아내야 되고, 안 되는 한 악절, 한 마디를 해내기 위해 오랫동안 붙잡고 앉아 있어야 하거든요. 피아노 연주는 어떻게 보면 스포츠에요. 자신을 단련해야 되고, 손의 근육도 키워야 되고. 여기 학생들은 이런 훈련을 의무감으로 하기보다는 정말 내가 하고 싶다, 내가 해내야 한다는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하는 거 같아요.
다만 조언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인스턴트 컬처(Instant Culture)라고 하죠. 순간적으로 나를 보여주는 것에 사로잡혀 빠르게 자신을 어필하려 하는 문화가 자리 잡은 거 같아요. 물론 소셜 네트워크의 힘에는 긍정적인 부분이 있죠. 그렇지만 클래식 음악이라는 건 어떤 면에서 고전 소설을 공부하는 것과 비슷한 점이 많거든요. 철학가들이 자기 생각을 풀어내려 애썼던 것처럼 작곡가들은 글이 아닌 음악으로 풀어낸 것이니까요. 끝없이 생각하고, 다시 자기 생각을 지우고, 정리해서 단순화하고. 그 안에서 알맹이들을 찾아내는 작업이니 힘든 일이죠. 때문에 할 수만 있다면 저는 제 학생들이 그런 순간적인 유혹을 참아내고 여러 번 사고의 시간을 거친 다음 중요한 메시지를 만들어냈으면 합니다. 정말 아름다움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을 해보자고. 눈에 반짝이는 것도 중요한 것일 수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아름다움이라는 건 마음 깊이 오랫동안 남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요.

2008년 발매된 손민수 교수 앨범

콩쿠르, 음악에 순위를 매긴다는 것에 대하여
콩쿠르에 대해 바르톡이라는 작곡가가 한마디로 정의 내린 적이 있어요. “콩쿠르는 경주말들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음악에 순위를 매긴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잖아요.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자면 콩쿠르는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음악하는 사람들은 너무 많고 기회는 부족하다보니 콩쿠르가 연주기회를 얻는 계기가 되어준다면, 지금 세계가 그렇게 돌아간다면 어쩔 수 없죠. 다만 저는 준비 과정에서는 성공이라는 목표를 최대한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공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살아간다면 잃어버리는 것들이 많아요. 음악과 나 사이에서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들, 추구하고자 하는 것들을 자꾸만 타협해야 되니까요. 물론 콩쿠르도 또 하나의 연주 무대라는 점에서는 좋은 기회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순진한 생각일지 모르나 삶에서 내 음악의 길을 가겠다는 흔들리지 않는 목표를 세우고 찾아 나간다면 그 뜻은 통할 거라고 믿고 있어요. 쉽지 않은 길이겠지만.

음악으로 풀어낼 소망
저에게 신념이라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일단 음악을 통해서 세상에 손을 내미는 것을 하고 싶어요. 지금은 가르치는 일과 연주 생활, 저만의 프로젝트를 이뤄나가고 있어 당장 할 수 있는 부분은 제한되어 있지만 사실 하고 싶은 일들 중 하나는 학생들과 함께 ‘찾아가는 음악회’를 하는 것이에요. 지금처럼 관객을 오시게 하는 방법에서 벗어나 저희가 먼저 찾아가서 음악회를 만들면 필요한 사람들이 쉽게 음악을 들을 수 있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좀 막막한 꿈이지만 음악을 통해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할 수 있고 메시지가 필요한 순간에 메시지를 전달 할 수 있는, 그런 일을 정말 해보고 싶습니다.

2013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콜론극장에서의 연주

함께 지켜내야 할 노래들
사실 음악하는 학생들이 제일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자연보호인거 같아요. 왜냐면 우리가 노래하고 있는 것들이 다 자연을 노래하는 것이니까요. 새들을, 바람을, 시냇물을, 그리고 별과 하늘을 노래하는데, 지금 그것들이 너무나도 피폐해져 가고 있잖아요. 사실 베토벤은 ‘나는 사람보다 나무가 더 좋다’고 늘 이야기했던 사람인데, 지금 이렇게 자연이 망가져 가는 것을 느낀다면 누구보다 앞장서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요. 음악가라면 우리가 마음껏 누리고 있는 아름다움을 후대에도 전해주기 위해서 어떤 마음을 모아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할 것 같아요. 저도 앞으로도 어떠한 역할이라도 할 수 있다면 음악을 통해서 참여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bliss. 사전에는 ‘더없는 기쁨, 지복(至福), 행복’이라 실려 있다. “Follow your bliss” 선생님이 늘 하셨던 말씀이라 마음에 새기고 있는 글귀라며 소개한 이 문장이 아마 손민수 교수를 가장 잘 설명하지 않을까 싶다. 마음속에서 얻어지는 기쁨의 길을 찾아가라, 그러다 보면 그 여정 안에서 반드시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변화하며 또 다른 모습을 찾아 나가게 될 것이다. 그런 끝없는 ‘찾아냄’이 바로 음악가의 삶이라고.

글 윤해인 | 영상 김건희
1 손민수 교수의 베토벤 전곡 소나타 앨범은 올해 9월 발매될 예정이라고 한다. 길게는 평생에 걸쳐 경험해 온 베토벤이라는 사람에 대해 2020년의 손민수가 남기는 발자국이기에, 수없는 고민의 흔적들이 담길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