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卒業] 명사. 파생어 졸업-하다. : 지금까지 학교에서 쌓아왔던 Z가 다시 A가 되는 순간. 가장 치열했던 나의 고민이 이제는 내 것이 아니게 되거나 멀게 느껴졌던 타인의 문제가 당장 나의 문제가 될 수 있는 상태.

6년의 학업을 마치고 졸업을 앞둔 지금 드는 생각이다. 그간 치열하게 싸워왔던 예술의 완성도, 평등, 정치적 올바름은 한 발짝 멀어졌고 외국어점수, 전세보증금 대출, 면접 때 입을 옷차림이 내일의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학교에서 보낸 시간이 완전히 무용한 것은 아니었으니 그것은 예술가가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진실을 목격하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러나 용기를 가지고 진실을 전달하는 이에게는 진실 그 이상의 숭고함이 있다. 가부장제와 식민지 제도 안에서 박해받는 여성의 해방을 그린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가 그러했고 우리 사회가 직면한 빈부격차와 신분 상승에의 욕망을 다룬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그러했다. 2020년 영상원의 졸업 작품들을 들여다보고 그동안 우리가 당면해 왔던 사회 문제들이 예술에 남긴 징후들을 통해 지나온 시대를 작품 속에서 다시 읽어본다.
다큐멘터리 ‹해일 앞에서›는 2017년 페미니스트들이 세운 첫 국내 페미니즘 정당 ‘페미당당’의 창당에서 시작해 2년 반 간의 활동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2016년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이후 괄목하게 성장한 국내 페미니즘 운동은 지금도 활발하게 성행 중이다. 작품 안에서 ‘페미당당’은 퀴어 퍼레이드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퇴진 시위에 참여하고 여성 인권단체 우먼 온 웹(Women On Web)1의 대표 레베카 곰버츠와 함께 안전한 임신 중지 합법화를 촉구하는 퍼포먼스 시위를 진행한다. 한편 영화는 페미당당의 단체로서의 활동 내용뿐 아니라 당원 개개인의 신념과 그 신념을 지닌 개인이 직면하는 어려움 또한 세세히 기록한다. ‹해일 앞에서›는 깊은 사유 끝에 정돈된 여자들 개인의 이야기와 하나의 단체 이야기가 양립함으로 완성된다. 작품은 정당 내에서 일어난 갈등과 불화도 솔직하게 다룬다. 결국 페미당당은 당원들의 동의하에 잠정적 휴식기에 돌입한다. 그리고 2019년 4월, 66년 만에 드디어 낙태죄가 위헌 판결을 받는다. 휴식 중이던 페미당당은 물론 수많은 사람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환호하며 행진했다. 누가 이 현실을 영화보다 덜 극적이라고 할까?
현대 사회에서 가정의 모습은 계속해서 변화하는 중이다. 1인 가구, 유사가족, 반려동물을 동반한 가정 등 다양한 형태의 가정이 존립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가족이 머물 곳일 것이다. 그러나 도시의 끝없는 젠트리피케이션에 의하여 개인이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임대할 수 있는 공간은 점점 작고 낡고 초라해지고 있다. 다큐멘터리‹이별유예›와 시나리오 ‹홈 스윗 홈›은 최소한의 공간을 잃어버린 가족들의 이야기다. ‹이별유예›는 감독과 감독 가족의 공간에 관한 자전적 작품이다. “공간은 삶과 연결되어 있다(...) 어딘가 부족한 공간은 어딘가 부족한 삶을 만든다.”는 내레이션은 흩어진 가족들이 불완전한 공간이나마 점유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전달한다. 혼자 사는 아버지의 집을 모른다는 것은 그의 생활이 가정에서 송두리째 떨어져 나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정에서 분리된 아버지의 직업이 끝없이 떠돌아야 하는 화물차 운전수인 것조차 인간의 지낼 곳에 대해 고찰하게 한다. 등장인물의 자조적인 발언, “누구에게도 폐 끼치지 않고 이대로 죽는 것이 꿈이다.”는 비단 일부의 소망은 아닐 것이다. 시나리오 ‹홈 스윗 홈›은 도시에서 밀려난 무주택 가족이 시골로 떠나지만, 그곳에서도 외국인 노동자들과 경쟁하며 결국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집이 없어 모텔과 찜질방을 전전하는 가족, 태국에서 온 이주노동자 부부, 서울에서 유학하는 지방출신의 대학생은 모두 개인적 공간을 확보하지 못하고 가정에서 와해된다. 현대 사회가 직면한 심각한 주거 문제와 동시에 과거와는 너무도 달라진 가정의 형태조차 예술 작품 안에서 능히 읽어낼 수 있다.
한편, 이야기와 캐릭터는 물론 그들이 존재하는 세계를 오롯이 탄생시키기 위해 손끝으로 분투하는 애니메이션과의 졸업 작품들도 있다. 단편 애니메이션 ‹모두, 귀로›는 눈 속에 조난한 이의 귓속에 사는 소리들이 그를 살리기 위해 나름의 방법으로 애쓰는 과정을 작가만의 색깔로 보여준다. 만화 ‹징켄스담의 바다›는 누구나 고민해봤을 자기 성장과 관계 맺음에 대한 이야기를 어색한 사이였던 두 소녀가 가까워지는 과정을 통해 나눈다. 이처럼 작품을 창작하는 것은 세상에 없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또한 작가의 속에 내밀하게 가지고 있었던 세계를 예술로 승화시킴으로써 더 많은 이들에게 선보이는 기회이기도 하다.
여섯 살 즈음 낮잠을 자다 불현듯 깼을 때의 기분을 기억한다. 몇 시간 전까지도 놀았던 방이 더없이 낯설고, 어두컴컴해진 밖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아직 너무 무서울 뿐이다. 결국 아이는 안온했던 시간에서 불과 얼마간이 지났을 뿐인 집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지금껏 싸우고 화해하며 익숙해진 곳에서 떠난다는 것은 이러한 불안과 공포를 가져온다. 그러나 몇 년 전을 생각해 본다. 학교 또한 내가 노력하고 적응해야 할 낯선 곳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지나간 시대의 진실은 작품으로 인해 현재로 거듭나며 새로운 A가 될 것이다. 예술가는 진실을 목격한다. 그리고 말한다. 감히 셀 수 없이 많은 방법으로.

글 김수림
1 법적으로 금지되어 안전한 임신 중지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는 국가의 여성들이 안전하게 임신을 중단할 수 있도록 돕는 네덜란드의 비영리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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