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수, 유산슬, 카피추. 동시대 대중매체에서 전례 없이 활약 중인 이 신진들은 모두 ‘부캐’다. 부캐는 본디 온라인 RPG 게임용어였던 부(副)캐릭터의 준말로, 주력하여 양성하는 본(本)캐릭터 외에 부가적으로 생성하여 관리하는 캐릭터를 뜻한다.
펭수는 남극에서 온 10살의 거대 펭귄이다. EBS에서 개설한 유튜브 채널 ‘자이언트 펭TV’의 마스코트 캐릭터로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트로트가수 유산슬은 예능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의 출연자다. 유산슬 이외에도 ‹놀면 뭐하니?›에 출연한 드러머 유고스타, 라면 셰프 라섹, 하피스트 유르페우스 전부가 다 국민 MC 유재석의 부캐다. 카피추는 만천하가 다 아는 유행가 선율에 허무맹랑한 가사를 붙여 기타 연주와 함께 들려준다. 그 모두가 자신의 자작곡이라며 거짓을 고하는 그는 2003년도에 공채 데뷔한 개그맨 추대엽이 아니라 자연인 컨셉의 싱어송라이터 카피추다.
부캐와 본캐는 같은 시공간 속에서 각자의 삶을 사는 별도의 인물이라는 게 설정의 핵심이다. 대중은 이 설정을 무리 없이 받아들이는 걸 넘어서 가상의 구축에 적극 공모한다. 개중 펭수는 익명의 누군가의 부캐이면서 그 자체로 본캐라 인식되는 특수한 경우다. 펭수의 탈 안에 어떤 사람이 들어가 있는지를 캐내려는 기사마다 “펭수는 펭수다”, “눈치 챙겨”라는 비난의 댓글이 줄줄이 달린다. 대중이 펭수의 탈을 벗겨내고 싶어 하지 않는 점, 엄밀히 말해 펭수가 인형 탈이라는 사실 자체를 환기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은 흥미롭다.

오늘날 정보의 생산과 유통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유롭다. 유튜브와 같은 새로운 플랫폼에서 수많은 크리에이터들이 각자의 콘텐츠로 자기 해석을 내어놓는다. 이를 마냥 긍정적으로 진단할 수만은 없다. 정보과잉의 시대는 이른바 가짜뉴스라는 난제를 내포한다. 정당들은 반대 진영의 발언을 가짜뉴스로 규정하며 설전을 벌이고, 각종 해설가들과 전달자들이 합세하면서 거대한 각축장이 형성된다. 진영의 경계가 뚜렷하고 정보의 창구가 한정되어 있던 때에는 개인이 믿을 수 있는 정보를 선택하는 일이 오히려 쉬웠을 터이다.
지난 2016년 말부터 2017년 초에 걸친 시민불복종 평화시위로 대통령이 탄핵됨에 따라 시민들은 국민이 주체가 되어 한국사회에 축적된 모순을 타파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권력구조 개편이 불발되고 보수와는 또 다른 구좌파 진영 논리의 부조리함이 드러나면서 배신감과 피로감을 토로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일반적인 정치 회의론에서 나아가 정치 발언에 귀를 기울이는 행위 자체에 환멸을 느끼는 반응이다. 대의민주주의가 정상작동하기 위해서는 믿고 뽑는 행위의 수행, 유권자의 믿음이 반영된 선택지의 제시, 믿음이 부여된 직위에서의 책임 이행이 삼위일체를 이루어야 한다. 정언컨대 그 지반은 믿음이다.
과거 훈육통치 시대에 국가는 국민에게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요한 한편 믿고 따라갈 수 있는 지향으로서의 굴종을 제시해주기도 했다. 대한민국 기성세대는 부실한 이륜차를 타고 굴종의 터널을 지나 고속도로를 달렸고, 약속의 땅으로 향하는 동안 탈 것은 종종 고꾸라졌다. 그리고 지금 세대 앞에는 싱크홀이 자리하고 있다. 매끄러운 도로 군데군데에 움푹 팬 홈, 옴짝달싹 못하도록 발을 묶어 맨 거대한 구멍, 무엇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고 어디로 인도할지 감을 잡을 수도 없는 낯선 구덩이들. 이옥섭의 영화 ‹메기›가 보여주는 것과 같은 미장센이다. 기존의 국가 이데올로기가 가진 모순이 발각되고 탈각되기 시작한 오늘날의 우리는 설득도, 약속도, 믿음도 유효하지 않은 시대에 산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무언가를 믿고 싶어 한다. 사회 속의 개인이 생을 붙잡고 삶을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믿을 수 있는 가치를 발견하고 지켜나가는 과정이 필수적이다.1 따라서 우리는 믿음을 적절히 안배하거나 안전지대에 믿음을 부여한다. 그와 같은 안전지대는 “순수하게 논리적이거나 대상적인 것으로 귀결시킬 수 없다.”2 “펭수는 펭수다”라는 말은 가면과 진짜 얼굴을 구분하는 흑백논리 위에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펭수의 탈을 벗기려는 시도에 대한 반박에는 가면까지 본질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거대한 믿음이 있다. 이 믿음은 테리 이글턴의 표현을 빌자면 “무엇 혹은 누군가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헌신과 충성”3이다. 헌신과 충성은 펭수의 성별을 구분하거나 가면이 가면이라는 점을 구태여 지적하는 대신, 남극에서 온 10살 펭귄 그대로 보아주자는 약속으로 귀결된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정치를 타인과 대화를 통해 세계를 공유함으로써 권력을 구성하는 행위로 본다. 아렌트는 시민국가에서 장구히 지속될 수 있는 권력일수록 비폭력행위에 근간을 두고 있으며, 비폭력행위는 존중할 만한 의견들의 교환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때 합의를 도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개개인 각자에게 내재된 진리를 더듬어 구체화하고 건져 올리는 과정 자체다. 의견이 오갈수록 각자의 세계가 가진 차이, 각자가 믿고 있는 진리 사이의 간격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공적 영역에서 의견 개진을 통해 구성원간의 차이를 드러내는 과정은, 경험과 감정의 공유를 통해 서로를 이해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 없다면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다수의 타인은 개인에게 위협으로 다가올 수 있다. 다른 이의 반응을 완벽하게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타인은 존재 자체로 불확실성을 내포하게 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주장했던 홉스의 개인들이 위험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택한 방법은 국가권력이라는 무소불위의 강력한 힘과 계약을 맺는 것이었다. 그러나 ‘약속’은 교환경제를 기반으로 한 ‘계약’과는 애초부터 다른 영역에 있을 수밖에 없다. 아렌트 또한 약속이 보장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았다. 아렌트는 약속에 근거를 둔 정치행위가 “인간사의 예측 불가능한 측면과 인간이라는 존재를 신뢰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은 그대로 둔 채 단순히 수단일 뿐인 약속을 통해 신뢰할 수 있는 이정표를, 예측 불가능한 섬을 불확실한 바다에 만들어두는 것”4임을 못 박는다. 요컨대 약속은 자본의 논리에서 비껴나 있다. 이 무정형의 힘이 제대로 발휘되기 위해서는 믿음이라는 특정한 연료가 필요하다.

다른 이를 믿기 전에 선행되어야 할 것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다. 우리는 상대에게 다가갈 수 있고 약속을 지킬 수도 있는 나를 먼저 믿어야 한다. 그러나 군데군데 뚫린 싱크홀은 그마저 녹록치 않게 만든다. ‘자본주의 미소’, ‘자낳괴(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와 같은 우스개 섞인 신조어들은 물신주의 앞에서 도덕률을 무시하거나 본심과 행동을 분리하여 행동하게 되는 세태를 꼬집는다. 신자유주의 사회는 개인들에게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남으라고 권고한다. 인간이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며, 이 세상에서 믿을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고도 말한다. 역설적이게도 신자유주의를 내면화한 개인에게는 믿음이 없다. 그들은 자신의 가치조차 확신하지 못한다. 믿을 수 있는 것은 돈, 말로 약속된 돈뿐이다. 허공의 돈과 바닥에 팬 싱크홀을 동시에 살피면서 발을 옮기기란 쉽지 않다.
어디서도 안전지대를 발견할 수 없다면 페르난두 페소아처럼 ‘나’라는 영토의 경작지를 여러 군데로 나누어보는 것은 어떨까? 포르투갈의 문인 페소아는 글을 쓸 때 80여 개나 되는 이명(異名)을 사용했다. 페소아의 이명은 “자신의 개성 바깥에 존재하는 저자가 쓴 것으로, 완벽히 저자에 의해 만들어진 개인”5으로서의 부캐였다. 알바루 드 캄푸스, 히카르두 헤이스, 알베르투 카에이루 등의 이명-부캐들은 제각기 다른 역사와 성격, 필체를 가지고 페소아와 동시에, 그러나 다르게 호흡하고 글을 썼다. 페소아는 이명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받아 적기를 반복하면서, 자기 본질이라는 단 하나의 이데아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불안에 잠식되지 않고 맞서 싸웠다. 그는 다양한 목소리와 이름들을 통해 자신 속의 차이를 적대하는 대신 직시할 수 있었다. 이렇듯 파편화는 곧 분권화이자 다중화 작업이기에 전체주의 혹은 중앙집권주의에 대한 미학적인 대항기제로 작동할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이옥섭, ‹메기›

개인들이 탈중심화 전략을 취한다고 해서 사회적 연대의 가능성이 희소해지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한 펭수의 예를 들어보자. 펭수는 공공연히 EBS의 사장 김명중을 호명한다. “사장님이 (친구처럼) 편해야 회사도 잘된다”는 펭수의 일침은 많은 이들의 동의를 얻으며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일방향인 것처럼 보였던 줄기찬 호명은 결국 응답을 이끌어낸다. 김명중은 펭수에 대한 대중의 열광에서 EBS가 나아갈 방향성을 모색하겠다는 다짐을 밝히는 한편 ‘자이언트 펭TV’의 당년 2월 콘텐츠에 얼굴을 비치기도 했다. 요컨대 펭수는 자신이 소속된 조직의 최고 권력자를 소환해내고, 그 인물로 하여금 보다 공개적인 창구로 화답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펭수가 부각시킨 수평적인 기업문화의 가치가 EBS라는 거대기업의 이미지로 흡수되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작년 말 EBS의 인기 어린이 프로그램 ‹생방송 톡!톡! 보니 하니›의 성인 남성 출연자가 미성년자 MC에게 폭력적 언행을 한 정황이 포착되었을 때, 사건을 축소하려는 제작진에 분노한 네티즌들은 온라인에서 김명중 사장의 이름을 불러대며 해결을 촉구했다. 이에 EBS는 대국민사과를 하는 한편 논란의 주범인 남성 출연자들을 출연금지 조치시키고, 어린이·청소년 출연자 보호를 위해 프로그램 제작 가이드라인을 개편하기로 결정한다. 펭수의 호명과 호출로 인해 한 사람의 이름과 얼굴, 그가 가진 직위의 중요성이 대중에게 각인되었고, 문제 상황이 발생했을 때 펭수의 바통을 이어받은 전 국민이 그 이름을 직접 호명함으로써 조직의 빠른 대처와 올바른 후처리를 유도한 것이다. 이번 사태는 시민의 직접 호명이 가지는 무게를 환기시켰을 뿐 아니라 호명의 형태로 나타난 약속 이행의 요구 저변에는 직위에 따른 역할 수행이 올바르게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공통의 믿음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켰다. 호명의 힘은 하나의 사건이 해결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호명은 계속해서 지켜보겠다는 약속이다. 또한 사회가치체계가 정상작동하지 않을 경우 대중 혹은 시민들이 한데 모여 믿음을 배반한 권력자를 소환해내고 끌어내릴 수도 있다는 암묵적인 경고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게 펭수라는 한 부캐의 인형 탈과 그에 부여된 개개인의 믿음으로 가능해진 작은 진보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종종 무엇을 믿을지, 누구를 믿어야 할지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내던져진다. 실상 믿음을 발휘해야 할 때는 결과를 미리 따져보거나 확신할 수 없을 때가 많다. 한나 아렌트가 지적했듯 믿음 자체는 수지에 안 맞을뿐더러 위험부담이 크다. 믿는 것보다 믿지 않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믿어야 한다. 믿어야 행동할 수 있고 행동만이 변화를 일으킨다. 믿지 못하더라도 허무주의의 싱크홀에 빠지지는 말자. 피아 식별을 강조하는 데서 나아가 본인을 포함한 모든 이를 타자로 치환하는 사회는 언제나 허무라는 자기불신을 먹고 자란다.

“믿으셔야 해요.” ‹메기›에서 간호사인 윤영이 병원 부원장 경진에게 힘주어 건네는 이 한 마디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장소로 써 달라는 기증자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설립된 사설병원 안에서 울려 퍼진다. 윤영은 약속불이행의 토대 위에서 구축된 장소가 기능을 상실한 계기는 불신과 의심이라는 사실을 알고, 이를 돌이킬 방법은 믿음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안다. 영화는 이어지는 전개를 통해 무조건적 믿음과 합리적 의심의 적절한 안배만이 정상사회를 가능케 하는 ‘행동’의 근간임을 명시한다.
모두가 동시에 각자 다른 진실을 붙들고 흘러가기에, 우리는 모노포니의 동일 선율 위에서는 살 수가 없다. 필요한 것은 다성부의 폴리포니 선율들이다. 때로 우리는 한데 모여 호모포니의 주선율을 합창할 수도 있다. 단일하지는 않아도 잘 어우러지는 이 선율들은 유사시에 큰 힘을 발휘할 것이다. 우리는 몇 년 전 이 사실을 경험한 바 있으니 조금 더 큰 믿음을 가지고 조금 더 자주 상기해내야만 한다. 우선 각자 노래를 부르자. 아무 노래라도 부르자. 노래가 화음이 되고 화음이 함성이 되고 함성이 지반을 울린다면, 어쩌면… 중요한 무언가가 바뀔지도 모른다. 바꾸어야한다는 믿음이 있다면, 어쩌면.

부록

여기까지 썼을 때, 내 안의 회의론자가 삐죽거리며 입을 열었다. “너조차도 못 가지는 믿음이 중요하다는 게 이 글의 결론인 거네. 어떻게든 마감만 해내면 상관없다는 건가?” 회의론자 옆에는 언제나 솔직할 것을 주장하는 이가 서 있다. 오랜 친구다. 요즘은 좀 멀리할 필요도 느끼지만. “너는 너 자신의 생각을 정직하게 보여주는 글을 써야 해!” 더 영리한 녀석도 지지 않고 맞선다. “글은 일관성 있는 체계여야 하고 그럴듯하게 읽히기도 해야 하는데, 세상에 믿을 게 없다고 말하면서 끝낼 순 없잖아?” 이상주의자가 꿈을 꾸듯 말을 보탠다. “어쨌든 인류가 진보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면 안 돼...”
글 중반부터 날뛰기 시작한 이도 있었다. “한나 아렌트? 제대로 끌고 와서 제대로 사용했다고 ‘확신’할 수 있어?” 교열자는 그이랑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 나를 달래는 어조로 말하기 시작한다. “키워드가 너무 많지 않은지 살펴봐 봐. 탈중심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건지, 어쨌든 하나의 강력한 연대가 필요하다는 건지, 지금의 이 현상이 퇴행적이라는 것인지 진일보했다는 것인지…” 그렇다고 교열자가 편집증자랑 다른 주장을 하는 것만은 아니다. “바흐친 인용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편집증자가 잽싸게 끼어들어 말을 받는다. “정치 이야기를 할 거면 랑시에르를 언급하는 게 낫지만, 아렌트와 랑시에르의 관계도 봐야 하는 게…” 편집증자의 짝꿍은 바쁘다. 그는 내가 읽어야 할 책과 정기간행물의 목록을 작성하는 중이다. “극장정치, 이미지정치, 미디어정치 개념을 알아야 하고, 한국사회 속 믿음의 다양한 층위와 양상들을 짚고 넘어가려면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분석을 해야 하고, 이 글이 사실적 상대주의의 모순으로 해석될 위험이 높다는 점도 고려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퇴고 전까지 이 책과 이론들을 꼭 참고하지 않으면…”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 안에는 게으른 낙천주의자도 산다. “그런 거 일일이 신경 쓰면 쟤 마감 못 해. 공부야 나중에 하면 되지~” 낙천주의자의 다리를 베고 누워 빙글빙글 웃는 저치는 누구인가? “역시 프로 외양간 수리공이라니까. 소가 또 들어온다는 보장이 있어?” 늘 자신만만한 나-변호인은 구석자리에서 벽만 본다. 이 친구는 언제 입을 열어야 하고 언제 쥐 죽은 듯 있어야 하는지 잘 안다. 하지만 친구여, 나한테는 지금 네가 필요한데? “얼른 끝내, 이제 끝낼 시간이야.” 현실주의자가 내 귀에 대고 속삭인다. “더 붙잡고 있을 순 없어. 넌 지금의 최선을 다했어.” 그래, 이게 현재의 내가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결과물이라 이거지. 나는 그의 의견을 따르기로 한다. 이렇게 또 한 편의 글을, 무수한 ‘나’들을, 그들이 하는 말들을 흘려보낸다.

수없이 많은 ‘나’들이 고개를 들고 제 목소리를 낸다. 그들 모두가 나를 지지하고 믿어주는 건 아니다. 무시하고 싶은 ‘나’도, 차라리 없는 편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드는 ‘나’도 있지만, 이들조차도 다 나다. 어떤 ‘나’가 목청을 높이면 다른 ‘나’들은 숨을 죽이기도 하고 견제의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덕분에 나는 나 자신을 마냥 긍정하거나 한없이 부정해야 한다는 부담을 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일상적인 충돌과 합의의 과정을 내면화한 덕분에 더 잘 살 수 있다고도 믿는다.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불화는 필연적인 것이며, 나의 정신은 불안과 자유 사이에서 균형을 잡다가 붕괴하고 증축되기를 반복한다. 내가 바라보는 세계는 확장된다.

어떤 옛 노래가 말했던가,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이 쉴 곳은 없다고. 그 노래가 말하지 않은 내용을 덧붙이고 싶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기에 나는 비틀댈지언정 살아갈 수 있다고. 평생토록, 어쩌면 한 개인의 생을 넘어서까지 당신의 목소리를 간직할 수도 있다고 말이다.

글 이상현
1 하승우, ‹장르연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수업 L343, 2019. 3. 14
2 미하일 바흐친, ‹말의 미학›, 김희숙·박종소 옮김, 길, 2006, 428쪽
3 테리 이글턴, ‹신을 옹호하다: 마르크스주의자의 무신론 비판›, 강주헌 옮김, 모멘토, 2015, 55쪽
4 권정우·하승우 공저, ‹아렌트의 정치: 한나 아렌트의 정치이론과 한국사회›, 한티재, 2015, 97쪽
5 페르난두 페소아, ‹페소아와 페소아들›, 김한민 옮김, 워크룸프레스, 2014, 3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