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자이고 정책가이면서 비평가이자 운동가인 심광현을 만났다. 그를 부를 수 있는 말들은 서로 다른 것들로 보이지만, 심광현에게는 결코 그렇지 않다. 그의 삶 자체가 이 모든 것들을 가로지른다. ‘문화/과학’, ‘이론/실천’ 등 전혀 다른 것들을 분리된 채로 두지 않으면서도, 하나로 융합해버리지 않는 변증법이 여기에 있다. 그 자체로 한국 현대 예술 비평의 역사인 옛이야기, 최근의 미학적 사유들, 그리고 예술 정책 문제까지. 그와 함께 나눈 이야기들을 지면에 눌러 담았다.

교수님이 비평 활동을 시작하시던 시기에 대한 이야기부터 듣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당시 비평계의 풍경이 궁금합니다.
전두환 정권 시기인 1983년에 미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당시 기성 교수들은 보수적인 커리큘럼을 고수하고 있었기에 정규 수업은 거의 형식적으로 들었고, 본격적인 공부는 학생들끼리 세미나를 꾸려서 했습니다. 새로운 텍스트를 이리저리 구해 나누어 읽고 공부했죠. 그런 공부를 바탕으로 아도르노(Theodor Adorno) 미학의 핵심 개념인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습니다. 예술의 자율성은 사회적 실천과의 변증법에 따른 ‘상대적 자율성’으로 재해석돼야 한다는 취지였습니다. 석사 과정 졸업 직후 서울미술관에 기획실장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때가 마침 민중미술 운동이 본격화되던 시기였어요. 1985년 가을에 ‘민족미술협의회(이하 민미협)’가 창설되었습니다. 민미협의 창립 멤버가 되었고, 저는 비평분과를 맡았습니다. 그렇게 전시도 만들고 글도 쓰면서 활동을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민중미술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성하셨던 ‘미술비평연구회’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요? 그 모임 출신 비평가들이 지금까지 미치고 있는 영향을 생각해보면 또 하나의 중요한 국면이라고 생각됩니다.
다방면에서 활동을 하다가 6월 항쟁이 있었던 1987년에 박사 과정에 입학했습니다. 1987년 전까지는 흩어져있던 운동 세력들이 모이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항쟁과 대선이 끝나고 나서는 운동권 내부의 갈등이 심화되기 시작했어요. 민미협 내부에서도 계파가 있었습니다. 저는 소수였던 PD그룹에 속해 있었죠. 그러던 중 1989년에 주류 계파였던 NL그룹이 민미협을 나가서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으로 독자 노선을 선택합니다. 그러다 보니 조직 개편과 인력 충원이 필요했고, 그때 새로운 후배들을 키울 생각으로 ‘미술비평연구회(이하 미비연)’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미비연은 민미협과 별도의 조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1989년에는 사상 표현의 자유가 어느 정도 개방되고 있었습니다. 본격적인 연구를 할 수 있는 조건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죠. 미술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넘어서 비판적인 관점에서 장기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1990년을 넘어가면서 본격적으로 미비연 출신 평론가들이 배출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튼튼한 미학적 배경을 가지고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와 비평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미술계에서는 좌우 이념을 떠나서 환영받았습니다. 그때 한국 미술계의 지형이 전체적으로 급변했다고 봅니다.

‘미술비평연구회’뿐만 아니라, 그 즈음 최근 100호를 발행한 학술지 «문화/과학» 또한 창간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90년 초반에 국내 미술계에서는 그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세계정세는 혼란 속에 있었습니다. 동구권 붕괴가 엄청난 사상적 혼란을 가지고 왔죠. 저는 그러한 상황을 어떻게 가로지를 수 있을까를 계속 고민했습니다. 변화하는 정세 속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비판적 연구를 지속할 방법을 고민하여 만든 이론지가 바로 «문화/과학»입니다. 당시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의 총무였던 강내희 교수의 제안으로 함께 창간을 준비했습니다.

문화연구 이론지인데 ‘과학’이라는 단어가 제목에 들어가 있는 점이 특이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문화/과학’인가요?
«문화/과학» 내부에서도 자주 나오는 질문입니다. 이론지를 만들 때부터 그냥 ‘문화연구’로 제목을 정하자는 것이 주류 의견이었습니다. 제가 ‘문화/과학’이라는 이름을 제출하고 거의 6개월 동안 논쟁을 펼쳤죠. 결국 제 의견이 받아들여졌습니다. 당시에도 문화계에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과학’이라는 말에 대한 기피, 혹은 비판적 거리가 있었습니다. 맑스의 ‹자본론›도 자본주의를 ‘비판’해서가 아니라 사회구성체와 생산양식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통해 자본주의의 역사를 ‘과학적’으로 규명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지요. 문화를 과학과 분리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파편화의 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와 과학은 구분되지만,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화와 과학을 ‘/’로 연결했죠. 사회과학과 자연과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 인간, 창조, 상상력 같은 것들은 자연과학적 엄밀성과 구분은 되지만, 완전히 분리되어서는 안 되는 것들입니다. ‘문화/과학’은 과학만 내세우는 과학주의와 문화만 내세우는 문화주의를 동시에 비판하는 변증법입니다. 그것은 맑스의 작업이 정치경제학이 아니라, 정치경제학 ‘비판’이었던 것과 연결될 것입니다.

문화계나 인문학계가 과학적 방법론에 비판적 거리를 두는 것은 과학적으로 환원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한 입장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과학주의와 과학을 구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과학은 인류의 고유한 유산 중 하나입니다. 문제는 과학주의라는 이데올로기, 그리고 그것이 자본주의와 만나는 지점에 있죠. 알튀세르도 철학의 고유한 역할이 이데올로기 비판을 통해서 과학을 과학주의 이념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비평에서도 과학적 관점은 중요합니다. 비평 그 자체가 과학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과 과학의 ‘트랜스크리틱’일 것입니다. 예술의 재료와 매체, 창작과 수용의 역사적 컨텍스트 등에 대한 과학적 인식 없이 좋은 비평이 나오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예술과 비평은 과학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과학을 발판으로 인간과 사회와 자연의 역동적 상호작용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도약하는 것이지요.

과학에 대한 입장에서 나아가 최근에는 더 구체적으로 인지과학에 대한 탐구를 펼치시는 지점이 흥미롭습니다.
물리학이나 생물학을 꾸준히 공부해왔습니다. 예술과 과학의 만남이라는 주제를 오랜 시간 탐구해왔죠. 생물학에서의 뇌과학, 물리학에서의 복잡계 이론을 철학과 다시 링크시키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서양 철학의 중요한 국면을 열어낸 칸트는 자연과학자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 유명한 3대 비판서는 칸트가 그 당시 가장 첨단의 뉴턴 물리학을 받아들이고, 또 업그레이드하는 작업이기도 했습니다. 칸트는 그렇게 시대의 한계 속에서 자연과학적 문제 의식을 받아들여 자신의 사유를 확립했지만, 그 이후 철학자들에게서 그런 모습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를 지도를 그리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지역별로 세부적인 지도를 만들다가도 언젠가는 그것을 합쳐 전체 지형을 파악할 수 있는 지도로 연결해야 합니다. 부분과 전체의 피드백을 통해 지구본까지 그릴 수 있게 되는 것이죠. 뇌 과학의 성취를 통해 뇌 자체의 지도는 아주 세밀해졌는데, 그것을 철학의 영역과 연결한 것이라 할 수 있는 마음의 지도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스피노자, 칸트, 맑스, 프로이트를 자연과학의 문제와 연결해 나가며 지식의 통섭과 순환을 촉진할 수 있는 이론적 틀을 새로 구성하는 것이 저의 기획입니다.

학술적인 활동과 동시에 ‘문화연대’, ‘민중의 집’, 최근에 ‘지식순환협동조합’ 까지 실천적인 운동을 어떻게 계속 병행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그것도 ‘이론/실천’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젊었을 때부터 맑스, 앵갤스, 레닌, 그람시, 알튀세르 등의 학자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해왔습니다. 이들이 했던 것이 바로 ‘이론/실천’입니다. 이론과 실천을 분리해도 안 되고, 그 둘을 화학적으로 융합해버려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론만 추구하면 관념론에 빠지고, 실천만 한다면 기계적 유물론에 빠집니다. 큐레이터 시절부터 이론적으로 연구한 것이 실천적으로 어떤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직접 해보면서 검증하고, 피드백하는 과정의 훈련을 통해 그런 변증법이 몸에 배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 예술 정책 전반에서 공공성 담론을 이끄시기도 했습니다. 오히려 최근에는 공공 기금 의존성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기도 하는데요. 이런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 또는 공공재 형식은 예술의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닙니다. 예술의 충분조건은 자본과 국가권력에의 예속을 비판하고 생명의 자율성과 협력을 증진하려는 노력에 있습니다. 예술의 공공성 증대는 예술의 상품화에 대한 보완책이기는 하지만 공공성에만 의존할 경우 예술의 존재 이유는 사라집니다. 예술의 공공성이 증대되면서 할 수 있는 것은 많아졌지만, 오히려 자율성을 갉아먹는 것이 문제입니다. 없는 것을 만들어서 하는 것이 운동이고, 예술입니다. 사라져가는 것을 살려내고, 남들이 안 하는 것을 다시 하는 것이 예술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환경을 탓하기보다는 환경을 활용해서 더 창의적인 것을 만드는 것이 예술가적 태도일 것입니다. 제도가 만들어 놓은 틀에서만 움직이면 예술가가 아니죠. 지금의 공공성이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기존의 공공성을 해체하고 새로운 공공성을 제시하는 것도 필요할 것입니다.

자본이나 제도 기금의 바깥을 상상해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면 그 이유는 기존의 것을 재구성하기 위해서입니다. 터전을 아예 버리고 갈 순 없습니다. 국가 장치를 회피하는 것은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도피일 수 있습니다. 제도를 가로지르고 재구성해야 합니다.

오늘날 젊은 예술가, 비평가들에게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오늘의 세계가 기후위기와 코로나19, 정치경제적 위기와 생존의 위기 등이 맞물려 혼돈으로 치닫는 것은 일시적 현상이 아닙니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보다 더 거대한 문명사적 이행기의 현상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낡은 것의 해체로 불안과 적대와 고통이 증가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문명 창조의 기회가 열립니다. 사회적 관계의 변화 대신 인공지능혁명/4차산업혁명에서 그 희망을 찾으려는 것은 낡은 기술결정론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인공지능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가능하도록 각자에게 잠재된 다중지능 네트워크의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인간혁명’을 통해, 자연과 사회와 개인적 삶의 선순환을 촉진하는 문명전환의 새 길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에 필요한 상상력과 창조력의 사회화를 위해 예술의 적극적 역할이 시급한 때입니다.

글 권태현 | 사진 김경수 | 영상 김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