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도운 브레익스, 서울>

미술 전시와 다른 예술을 감상하는 일의 가장 명확한 차이는 바로 관람 시간의 자유도다. 영화를 비롯해 모든 공연 예술은 러닝타임이 있고 대개 그 시간을 충실히 따랐을 때에야 감상을 했다고 말하지만, 미술의 경우에는 관객이 얼마든지 관람 시간을 선택할 수 있다. 미술관에 갔을 때 그림 앞에서 서너 시간을 멍하니 보내는 관객이 있는 한편 어느 관객은 작품을 보는지 마는지 쓱쓱 전시실을 지나가는 풍경을 우리는 마주하곤 한다. 이러나저러나 그들은 모두 전시를 관람한 관람객이다.

때로는 러닝타임을 강제하는 예술 장르가 폭력적이라고 비판하거나 반대로 시간과 무관하게 단번에 한 풍경을 이미지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미술 장르의 특징을 문제점으로 지적하기도 한다. 물론 감상하는 시간을 많게 혹은 적게 투자했다고 해서 그것이 좋거나 좋지 않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매체가 일방적으로 떠안게 되는 관람 방식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해볼 필요가 있다. 매체적 특징이자 때때로 문제처럼 이야기되는 이 두 가지 사항을 어떻게 이야기해볼 수 있을까.

<도운 브레익스, 서울> ⓒJapil Eun

개시

아트선재센터에서 전시했던 이주요와 정지현 작가의 <도운 브레익스, 서울(Dawn Breaks, Seoul)>은 그런 매체적 고민에서부터 출발한다. 하루에도 전시물과 동선이 계속 바뀌는 전시를 우리는 기존 전시의 관람 유형으로 인식할 수가 없다. 전시 기간 내내 두 작가는 끊임없이 작품을 빼고 더하고 수정하면서, 완성된 작품으로 전시 시작과 끝이 연속되는 기존 전시와 차별점을 만든다. 미술 전시라는 점에서 관객들은 여느 때처럼 마음대로 전시실에 머무르는 시간을 선택할 수 있지만 여기에는 어떤 공연예술적인 성격이 일어난다.

나아가 세 차례의 퍼포먼스를 계획함으로써 직접적으로 공연예술의 성격까지 더하고 있다. 퍼포먼스는 전시에 놓인 설치물 주변을 움직이거나 그들을 사용하면서 전시 공간에 약간의 변용을 준다. 퍼포먼스 직전과 직후의 풍경이 계속해서 달라진다. 일반적인 공연예술처럼 엄격하게 짜인 동선이나 대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회차마다의 성격을 엄밀하게 구분하지도 않지만, 일련의 퍼포먼스를 통해서 앞서 말한 전시의 형식적 특징에 일정한 균열이 생긴다. 그러한 퍼포먼스는 매체적 질문을 던지는 이 전시의 콘셉트를 더욱 강하게 한다.

결과적으로 관람객들은 많은 이유에서 당황할 수밖에 없다. 여느 전시처럼 이미지를 포착할 수 없는 전시가 결코 아니어서다. 애당초 전시가 바뀐다는 조건, 그러한 전시 풍경이 무대가 되어 퍼포먼스에 따라 변화한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는 순간 이러한 당황은 더욱 증폭된다. 과연 내가 보고 있는 게 맞는 것인지 계속해서 되물을 수밖에 없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관객들은 어쩔 수 없이 공연 예술을 보듯 무작정 전시장을 서성이지만 그것이 어떤 러닝타임과 이해에 다가갈 가능성도 희미해 보인다.

도운 브레익스 2015, 퀸즈뮤지엄 뉴욕 ⓒ이주요, 정지현

균열

작품이 무대가 되는 전시,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바뀌는 전시. 과연 두 작가는 여기에서 무엇을 시도하고 목표하는 걸까. 많은 사람들이 현대미술의 난해성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의 어떤 극단에 치달은 전시 형식 같다. 어떤 사람들은 금방 전시장을 빠져나가고, 어떤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이냐며 러닝타임을 늘린다.

군데군데에서 움직이는 작품과 주위에서 움직이며 뭔가를 말하고 행동하는 퍼포머들 사이에 내러티브는 계속해서 미끄러지거나 이동하고 있다. 남아있는 것을 선택한 관람객들은 그러한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맞닥뜨려야 한다. 명확히 표명될 수 없는 실체를 만나 마치 분위기와 같은 요소들을 돌아보다가 결국 그 모든 것을 쪼개진 말과 행동의 의미로 비워두게 되는 결과다. 형식뿐만이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확실한 캐릭터를 주지하지 않는 두 작가는 관객들의 인식에 혼란을 가하는데 열중하고 있다. 막연히 볼 수밖에 없고 그로써 도무지 인식할 수 없는 무언가를 인식한다. 어느 하루를 개시시키는 도운(Dawn)에 균열을 가하는(Breaks) 전시 제목만이 이 맥락을 설명하고 있다.

도운 브레익스 2015, 광주비엔날레 ⓒ이주요, 정지현

전시는 계속될 어떤 실험으로 보인다. 아시아문화전당에서의 협업을 서울로 옮긴 이번 전시는 이전보다 꽤 많은 수정이 가해졌으며, 전시의 기본적인 주제 아래서 앞으로도 완성을 향해 나아갈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어쩌면 더 큰 타임라인을 그려서 따로따로 열리는 전시 모두가 한 주제 아래 계속되는 매체적 실험인 것 같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전시를 관람했을 때 마땅히 파악되던 이미지가 의도적으로 미끄러지는 상황, 그리고 그것을 더욱 더 세심하게 미끄러지게 하는 실험을 엿보는 과정을 따라가는 것이 흥미롭다.

두 작가는 일반적으로 알 수 있는 나이라는 차이점만을 정보로 제공한 채 계속되는 협업을 보여줄 것으로 보인다. 과연 미완성을 완성시켜나가는, 잡힐 듯 말 듯한, 그리고 어쩔 수 없음을 인식하는 순간에 도달했을 때 또 무엇을 시도할 수 있을까. 완성되지 않을 전시를 완성시키는 실험이 인상적이다. 전시는 결과적인 이미지로 남지 않고 멍하니 생각하고 떠올리게 되는, 러닝타임이 무한하거나 제로에 수렴하는 모습을 만들고 있다. 언제도 마주할 수 없는 시간이다.

글 | 이지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