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예술원 개원 20년 기념
궁중무용 <정유진찬>

음악에 대한 조예와 관심으로 많은 음악적 업적을 남긴 세종, 임금이었지만 당대에 손꼽힐 만한 문인 화가로서 음악에 대한 관심으로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루어냈던 정조. 그리고 조선 후기까지 전해진 53수의 정재1) 중 26수의 정재에 손을 거치고, 궁중무용을 직접 창작할 정도로 무용에 조예가 깊었던 효명세자. 이들은 개혁을 추구하고, 좋은 정치를 이루었던 왕이기도 하지만 모두 예술에 조예가 깊어 문화적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는 것에서도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요즘은 박보검으로 혹은 이영으로 더 잘 알려진 효명세자. 2017년 5월 효명세자에 의해 연행되었던 기축년 진찬2)이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을 통해 재연되었다.

ⓒ한필름

재현될 시간을 기리며

1829년 2월 9일 오시(午時) 창경궁 명정전. 악사와 무동이 외진찬을 위해 자리했다. 순조 등극 30년과 탄신 40년을 축하하는 자리였던 기축진찬은 효명세자의 효 정신을 엿볼 수 있는 궁중 잔치로 세자의 대리청정 기간 동안 연행되었던 행사 중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 꼽힌다. 그중에서도 외진찬은 임금을 중심으로 행해지는 진찬이다.

그리고 2017년 5월 10일 11시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극장 야외무대. 역사 속에 있던 효명세자의 시간이 다시 재현되었다. 무대를 둘러싸며 놓인 상에는 학교의 미화를 담당해주시는 청소노동자 어머니들이 설레는 모습으로 자리하고 계셨다. 학교를 위해 노력하시는 어머니들을 이번 공연에 관객으로 초청한 것이다. 단순한 정재의 재연이 아닌 효명세자의 효 정신까지 재현되는 현장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고궁이나 국악원에서 볼 수 있었던 정재가 학교 야외무대에서 공연된다는 것을 들었을 때는 조금 낯설기도 하였고, 어수선한 분위기에 정재의 느낌이 잘 느껴지지 않을 것 같다는 걱정도 되었다. 하지만 학생, 교수님, 어머니들, 그리고 동네 주민분들과 함께 무대를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며 즐긴 이른 오후의 공연은 진찬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현대에 맞게 잘 담아내고 있었다.

ⓒ한필름

현재로 이어진 순간

이틀 뒤 창경궁에서는 효명세자에 의해 연행되었던 진찬이 같은 공간, 다른 시간 속에서 되살아났다. 조선의 마지막 무동으로 불리며 궁중정재의 명맥을 계승하시던 김천흥 옹의 복원 재연 영상을 중심으로 정재를 재연해낸 이번 공연은 순조 기축진찬에서 연행된 정재를 좀 더 깊이 있게 볼 수 있는 자리였다.

1928년 11월 효명세자는 외부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잔치 준비를 위해 진찬소3)를 설치하고 길일을 잡고, 무슨 춤을 어떤 순서로 출 것인지에 대한 것까지 직접 빠짐없이 챙겼다. 188년 후 창경궁에서 열린 <정유진찬>에서 전통예술원 무용과 박은영 교수와 무용원 이론과 예술경영 전공 전수환 교수, 학생들 또한 재연을 결정하고 날짜와 장소를 정하고, 어떻게 공연을 진행해나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노력을 춤 안에 담아냈다. 기축진찬에서 정유진찬으로 그 의의가 이어지도록 한 것이다. 공식적인 잔치와 별도로 세자와 임금 단 둘만을 위해 마련됐던 야진찬이 날씨가 좋지 않았던 탓에 미리 계획했던 문정전에서 열리지 못 하고 명정전 뒤편에서 진행된 것에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나 순조 29년 진찬이 열렸던 동일한 장소에서 당시의 시간이 재현되는 것은 살아나는 역사의 한 부분에 함께 있는 듯 의미 있는 순간이었다.

ⓒ한필름

앞으로 빛날 시간들

다음날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공연되었던 익일회작은 효명세자의 특별함을 보여주는 공연이다. 익일회작은 본래 역대 조선 왕들의 진찬과는 차별성을 띄는 잔치로 효명세자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본행사 다음날 열렸다. <정유진찬>의 마지막 순서이기도 했던 이 공연은 기존의 익일회작을 ‘함께 모여(會) 미래(翌日)를 위해 창작(作)하는 잔치’로 재해석했다. 전통예술원 무용과 학생들이 주인공이 되어 궁중정재에 대한 새로운 실험을 시도한 것이다.

오늘날에는 공연으로서의 궁중무용 무대화와 동양과 서양에 대한 경계를 해소해내는 것에 대한 고민이 있다. 그 때문인지 이번 익일회작 공연에서는 전통과 서양의 경계에서 대범한 충돌을 보여주었다. 음악원, 무용원 교수들의 자문을 바탕으로 시도된 서양의 클래식과 현대무용, 궁중정재와의 만남은 오늘날의 정재에 있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냈다. 기존과는 다른 박의 구조와 낯선 선율 속에서 맞춰 들어가는 정재의 동작들은 지금까지 봐왔던 궁중무용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현대무용과 함께 공연된 몽금척과 전통적 무대의상에 변화를 준 것 역시 인상적이었다.

시공간적 한계로 인해서 순조 기축진찬을 재연해내는 것에 있어서 의례의 모든 절차를 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창조적 계승의 시작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번 <정유진찬>에서 만났던 새로운 시도와 감각들은 새로운 진찬의 의미를 보여주는 데 손색없었다. 과거의 진찬을 기리고(讚), 이어받아(纘), 새로운 진찬으로 빛낸(燦) <정유진찬>이 메웠던 188년의 시간. 사흘 간의 잔치는 궁중무용의 빛나는 내일에 대한 기대를 남기고 그 화려한 막을 내렸다.

글 | 신혜주
1) 궁중에서 악사와 무동, 지방 관아에서 기녀들이 공연했던 악가무의 종합예술
2) 국가의 큰 경사를 맞이하여 거행되는 궁중의 잔치
3) 진찬에 관한 일을 맡은 임시 관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