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드라마는 흐른다. 시간을 거슬러 오르기도 하고, 힘센 양심은 힘센 부조리를 이기기도 한다. 누명 쓴 죄수의 탈옥 스토리는 이제 자막 없이 감상할 수 있게 되었으며, 선악은 다각화되고 재벌은 도깨비로 변했다. 웹 드라마가 성장을 거듭하는가 하면 K-드라마의 수출과 흥행은 더 이상 낯설지 않을 정도다.

시간여행

현실이 삭막할수록 사람들은 과거를 그리워한다. ‘그네들’이 사회를 틀어쥐고 있던 2012년 여름, 한 드라마가 대중문화의 르네상스 시대를 향해 무전을 보내는데, 바로 <응답하라 1997>이었다. 하숙집에 한데 모인 전라도와 경상도 욕쟁이와 허당들이 복작거리며 사람 냄새를 풍겼고 이는 지친 현대인들에게 활력이 되어주었다. 거기엔 고독한 현대인의 우울함이나 인간관계의 치열한 계산 대신 가족과 친구들, 유머와 다정함이 있었다. 개성 있는 캐릭터와 현실감 있는 에피소드, 그리고 주인공의 남편이 누구인지 추리해나가는 재미까지 더해져 이 드라마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후 과거로 돌아가는 드라마들이 다수 제작되기 시작했다. <나인 : 아홉 번의 시간 여행>은 한 기자가 어긋난 오늘을 바로 잡기 위해 이십 년 전으로 되돌아가는 시간 여행 드라마로 예측하기 어려운 서사와 긴장감 있는 전개로 많은 마니아층을 만들어냈다. 이후 <응답하라 1994>, <응답하라 1988> 등 응답하라 시리즈의 열풍이 계속되는 한편 <시그널>에 이르기까지 지속되던 타임슬립물의 유행은 공교롭게도 촛불 혁명이 새로운 시대를 요구하던 올해 초를 기점으로 한풀 꺾이기 시작했다. 올해 1월에 방영된 타임슬립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는 ‘언제까지 시간 여행만 할 거냐’는 비판에 시달리며, 의인이 부조리를 바로 잡아나가는 <김과장>에 동시간대 점유율 1위를 빼앗겼다.

<시그널> ⓒtvN

강하고 정의로운 사람들

드라마 <김과장>에서는 한 성깔 하는 머리 좋은 김 과장이 갖가지 부정과 불합리에 맞서 현실을 바꾸어 나가는가 하면 <자체발광 오피스>의 주인공 호원은 시한부 선고를 받은 이후 할 말 다하는 슈퍼 을이 되어 사회의 수많은 을들의 속을 시원하게 뚫어주었다. 정회현 작가가 자신의 직장생활 경험을 반영해 집필한 것으로 알려진 <자체발광 오피스>는 2016 MBC 드라마 극본공모 당선작이기도 하다. 이처럼 의인이 등장해 민폐와 꼰대, 진상들에게 화끈하게 한 방 먹이는 드라마는 2017년 특히 많은 관심을 받으며 지속적으로 방영되고 있다.

드라마 <역적>은 의적 홍길동이 연산군의 폭정에 맞서는 이야기로 지혜와 힘을 발휘해 부조리한 양반들을 심판함으로써 통쾌함을 안겨주었다. <힘쎈여자 도봉순> 또한 초인적인 힘을 지닌 도봉순이 각종 협박과 연쇄 납치사건 등을 해결하며 보는 이들에게 대리만족을 느끼게 했다. 이처럼 뚜렷한 선악 구도로 속을 뻥 뚫어주는 드라마들이 있는가 하면 어느 한 명 선뜻 선이나 악으로 구분하기 어려운 드라마도 있다.

<자체발광오피스> ⓒMBC

절대 선과 절대 악의 파괴

국내 최고의 집도 실력을 갖춘 전도유망한 외과 의사, 그 실력을 가난하고 억울한 환자들을 살리는 데 쓴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다못해 늦게라도 심경의 변화가 일어나 개과천선한다면 좋을 텐데 주인공은 끝끝내 변하지 않고 세상을 떠난다. 줄거리만 들으면 망한 드라마 같지만 최고 시청률 20%를 넘긴 2007년 작 <하얀거탑> 이야기다. 천재 의사 장준혁은 국내 최고 대학병원의 외과 과장이 되기 위해 청탁과 부정을 서슴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의 오진으로 한 암환자가 억울하게 숨을 거두었을 때도 무죄를 받기 위해 끝까지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그를 비난하지 않았다. 그 잘난 의사가 간성 혼수로 신문을 거꾸로 읽고 있을 땐 오히려 가슴 아파할 정도였는데, 그건 장준혁의 처신이 너무나 현실적이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선악의 이분법을 깨는 드라마는 이후 박경수 작가의 <추적자>, <황금의 제국>, <펀치> 등으로 맥을 이어오다 최근 <귓속말>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2017년 작 <귓속말> 또한 선과 악으로 선뜻 양분할 수 없는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던 정의로운 판사 이동준은 거대 권력의 음모로 구속될 위기에 처하자 결국 변절하고, 신영주 또한 살인 누명을 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수많은 범법 행위를 저지른다. 사람들은 이들을 욕하지 않는다. 사실 어느 누구라도 저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거대 로펌의 두 라이벌까지 가세해 서로의 뒤통수를 치고 손잡기를 반복한다. 이 드라마는 현대 사회가 더 이상 선악으로 간단하게 양분될 만큼 단순하지 않으며, 복잡하고 다각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귓속말> ⓒMBC
<피고인> ⓒMBC

매력적이고 엉뚱한 발상들

“검사 월급 얼마 되지도 않는데, 때려치우고 로펌 들어갈까?” 하고 남편이 물었을 때, 아내는 지금 이대로의 그가 좋다며 검사로 남아달라고 말한다. 귀여운 딸은 아버지 품에 안겨서 동요를 흥얼거리며 볼에 입 맞춘다. 사랑스러운 가족들을 떠올리며 기분 좋게 잠든 어느 날 아침, 그는 죄수복을 입고 교도소에 수감돼 있다. 자신이 아내와 딸을 죽였다는 것이다. 그는 이 모든 사건이 한 사이코패스 재벌 2세에게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재벌 2세의 약점은 그가 진짜 재벌이 아닌 쌍둥이 동생이라는 사실뿐이다. 연초에 방영된 드라마 <피고인>은 줄거리만으로도 궁금증을 유발하는 매력적인 발상으로 출발해 시청자들이 마지막 회까지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지난해 종영한 <질투의 화신> 또한 재미있는 발상에서 시작한다. 자존심 강하고 터프한 마초 기자가 어느 날 유방암에 걸린다면? 희극일까 비극일까? 형의 장례식장에서 통곡하던 그는 유방암 치료용 보정 브래지어를 어머니에게 들켜 변태로 몰리며 얻어터지는데, 이처럼 아프면서도 유머러스한 설정은 암이라는 소재에도 불구하고 드라마의 톤을 매력적으로 만들어주었다.

<도깨비> ⓒtvN

CEO에서 외계인으로, 로맨스 변천사

첫사랑이 죽고 시간이 흘러 다른 남자를 만난다. 잊었다고 믿고 결혼하려는데,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다시 나타난다. 윤은경, 김은희 작가의 2002년 작 <겨울연가> 줄거리로 첫사랑과 기억상실이라는 소재로 인기를 끌었다. 이 드라마는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열광적인 반응을 얻어 한류의 시초가 되기도 했다. 반대로 일본의 원작이 한국으로 날아온 경우도 있다. 동명의 일본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2006년 작 <연애시대>는 남자의 비밀로 인해 헤어진 남녀가 서로의 연애를 질투한 끝에 다시 결합하는 과정을 현실적이고 담백한 톤으로 그려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다. 2013년에는 비슷한 설정의 <로맨스가 필요해2>가 방영되어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겨울연가>와 <파리의 연인>, <시크릿 가든>이 CEO나 재벌 2세 등 기업가 남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면 2013년 <별에서 온 그대>를 기점으로 판타지 로맨스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표독한 시어머니’의 자리는 ‘필연적으로 소멸될 운명’이 대체하게 되었고, 시청자들은 현실의 발암러들을 드라마에서까지 상기할 필요 없이 마음 놓고 로맨스에 몰입할 수 있게 됐다. 올 초 방영된 <도깨비> 역시 가슴에 꽂힌 검이 뽑히면 죽는 도깨비와 그 검을 뽑지 않으면 죽는 도깨비 신부의 우울한 운명을 다루며, 타인에 맞서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존재의 운명 그 자체에 집중함으로써 보다 큰 울림을 주었다.

<혼술남녀> ⓒtvN

먹방, 드라마에 진출하다

2016년 드라마 <혼술남녀>는 첫 장면부터 먹방으로 시작한다. 깔끔한 테이블 위로 육류와 해산물이 오르고, 옆에는 맥주 한 잔이 놓여 있다. 정장 차림의 남자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나는 혼술이 좋다”고 말한다. 애인에게 차였다며 엉엉 우는 친구의 하소연을 들어주느라 졸린 눈을 비빌 필요도 없고, 직장 상사의 비위를 맞추느라 소중한 휴식의 기회를 날릴 필요도 없다. 그저 낮 동안 일하느라 수고한 자신에게 혼자만의 시간과 함께 작은 선물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 드라마는 <식샤를 합시다> 시리즈와 더불어 젊은 남녀의 불안과 로맨스, 그리고 맛있는 음식을 감상하는 즐거움을 동시에 주었다.

한국 드라마가 세계 각국에 진출해 많은 수익을 거두며 축배를 드는 사이 스물여덟의 한 조연출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혼술남녀>가 화제를 모으며 종영된 지 불과 며칠만의 일이었다. 사전제작이 어렵고 선진국처럼 매주 한 편씩만 제작하기도 어렵다는 사실은 익히 들어 알지만, 사고가 나도 외양간조차 고쳐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사회 곳곳에서 시작된 개혁의 바람이 불고 불어 마침내 이곳 어두운 곳까지 닿았으면 좋겠다. 정의가 부조리에 맞서 승리하는 스토리, 이제는 드라마가 아니라 현실이어야 한다.

글 | 성민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