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오늘 처음 만드는 뮤지컬>

<오늘 처음 만드는 뮤지컬>의 내용은 제목대로다. 어드벤처 전문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뮤지컬 극단에 당장 며칠 뒤 무대에서 공연할 수 있는 작품이 있냐는 연락이 온다. 연출은 문의를 의뢰로 적극 수락하고 그 순간부터 부랴부랴 공연을 기획한다. 공연은 이처럼 간결하고 쉬운 방식으로 극중극의 액자를 표구하고 즉석에서 만들기 시작한다. 모든 아이디어는 객석에서 관객이 낸다. 모든 장면은 무대에서 배우들이 만든다. 그날그날 관객의 입에서 어떤 장르, 배경, 인물, 목표, 제약이 튀어나오는지, 또 그중 어떤 것이 선택되어 공연 내내 유효한 세부 사항으로 쓰이는지에 따라 공연의 내용이 달라진다.

새 이야기

관람한 날의 공연은 ‘무협’ 장르로, ‘새살이 솔솔’ 자라는 덕에 ‘103살’까지 산 주인공 ‘멘소래담’이 ‘혈도를 짚어 상대방의 생식 기능을 빼앗는 재능’으로 ‘지구정복’을 꿈꾸지만 ‘술을 마시지 않으면 무공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는’ 핸디캡을 갖고 ‘양조장’에서 시작되는 모험에 뛰어드는 내용으로 만들어졌다. 무대 위 배우들이 공연의(연출과 관련한 내용은 없다는 점에서 정확히는 공연 내용의) 각 사항을 질문하면 객석에서 산발적으로 답을 외친다. (주인공 배역을 맡을 배우 역시 관객의 호응으로 결정된다.) 그렇게 해서 정해진 것이 따옴표 안의 요소들이다. 이 요소들은 관객의 입에서 나왔지만 연출 캐릭터가 한 차례 취사선택을 함으로써 사공이 많은 배가 되기보다는 투표까지는 하지 않아도 약간의 민주적인 운영방식을 채택한다. 관객은 핵심적인 의견을 내는 존재라는 점에서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는 하지만 (무대를 한 시점으로 바라보는 위치에 놓인) 객석에 몸이 고정된 관객이라는 수동적 입장은 그대로 유지되며, 아이디어가 실체를 갖는 공연이 되면서 점차 관객이 만들 수 있는 부분과 이해할 수 있는 부분 역시 한정된다. 가사가 정해진 특정 넘버가 반드시 삽입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설정함으로써 기본적인 골조를 두고 어느 정도의 방향과 흐름을 따라가게 되기도 한다. 더 적극적인 참여, 더 극적인 전개를 원하는 관객에게는 아쉬울 수 있지만 군중에 섞여 주목받지 않으면서 편히 의견을 던질 수 있다는 사실이 거부감을 덜기도 한다.

ⓒ아이엠컬쳐

공연의 틀

관객을 공연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별다른 개연성을 갖추고자 하지 않는 도입부는 흠결이 아니라 극 내내 유지되는 일종의 태도다. 시종일관 몰입이 강요되지도 않을 뿐더러 순간순간 배우의 임기응변이나 임기응변의 실패, 배우 본인-배우 역할을 하는 배우-극중 역할을 하는 배우 사이를 오가는 행동 등으로 균열을 만들고, 일부러 균열에 망치질을 하는 연출 캐릭터를 무대 한 편에 두어 관객이 서사에 집중하다가도 이것이 ‘공연하는 공연’임을 되돌아보게 한다. 보통 무대 밖으로 감춰지는 극의 요소가 불가피하게 혹은 고의적인 장난처럼 무대 위로 튀어나오는 순간 또한 그렇다. 이미 죽은 캐릭터가 “너무 센터에서 죽어서 가장자리로 가야겠다”고 말하며 뒤로 꾸물꾸물 기어갈 때, 아마도 각 넘버에 임의로 매긴 번호를 세션 쪽에 수신호로 전달할 때, 관객은 몰입이 깨지는 데에 불쾌함을 느끼기보다는 그 순간을 특별한 재미로 받아들인다.

ⓒ아이엠컬쳐

살찐 기량

관객의 아이디어는 배우의 기량과 결합해 몸집을 키운다. 배우들은 인물을 입체적으로 만들고 다음 행동을 충동하기 위해 이어달리기처럼 무대 위로 출동해서 전사를 구축하고, 그때그때 필요한 역할로 옷을 갈아입거나 소품을 챙겨 새 국면을 만든다. 주인공의 이름이 멘소래담이기에 새로운 캐릭터의 이름은 자연스레 안티푸라민, 후시딘, 바세린이 되고, 장르가 무협이기에 함께 수련을 한 동무와 무림의 고수인 스승이 등장한다. 배우들의 활약은 이야기의 외연을 확장시킨다. 안티푸라민이 후시딘에게 ‘사매’라고 부를 때, 필살기로 여래신장을 사용할 때, 무협의 클리셰를 능숙하게 답습할 때 공연은 거기에 조응하는 관객과 각별한 관계를 맺고 힘을 얻는다. 장르를 설정하는 것 자체가 해당 장르 내 새로운 서사를 구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장르의 가장 익숙한 부분을 매만져 공감하는 재미를 주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공연이 배우의 활약에 따른 관객의 활약 역시 요청한다는 걸 보여준다. 고정된 레퍼토리가 지속적인 연구와 분석을 거친다면 매일매일 다른 내용으로 꾸려지는 이 공연의 경우 사후 장기적인 독해의 과정이 생략된다. 관객은 즉각적인 평가, 직관적인 감상으로 작품과 만나야 한다. 배우의 기량은 공연을 풍요롭게 만들고, 관객의 기량은 공연을 풍요롭게 볼 수 있게 한다. 술을 마셔야 무공을 펼칠 수 있다는 주인공이 취권의 도식적 동작은 사용하지 않을 때, 다른 배우가 남긴 단서가 복선으로 활용되지 못할 때, 중요한 것처럼 등장했던 디테일이 처음의 의도와 달리 맥거핀으로 남을때 아쉬움이나 의문을 느낀 관객과 그렇지 않은 관객 사이의 감흥은 달라지기 마련일 것이다.

ⓒ아이엠컬쳐

극장 경험

공연을 극본이나 실황 영상으로 접하는 대신 극장에서 직접 볼 때 관객이 겪는 것은 단순 생동감이나 현장감을 넘어선 극장 경험이라고 할 만하다. 객석과 무대, 조명과 음향, 연기와 연출 그리고 예기치 못한 순간의 포착이 만드는 바로 그 경험. <오늘 처음 만나는 뮤지컬>은 극장 경험의 뮤지컬이기도 하다. 관객은 이 공연을 통해 극장이라는 특정한 장소에서만 할 수 있는, 누구도 미리 예상할 수 없는 경험을 맞이한다. 동시에 이야기에 직접 개입한다는 면에서 극/뮤지컬이라는 매체에 대한 경험이기도 하다. 비단 관객뿐만이 아니다. 이 공연은 배우에게도 마찬가지로 공연 경험-실습의 시간을 제공한다. 이들 역시 반복 연습을 통해 하나의 레퍼토리를 완전히 익히는 대신 즉각적인 액션-리액션을 훈련하고, 마스킹된 위치에 쏟아지는 조명이나 고정된 타이밍에 연주되는 음악 없이 극장을 능동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김태형이 연출하는 <오늘 처음 만드는 뮤지컬>의 재미있는 점은 그날 만들어진 작품이 조금쯤 만족스럽지 못하더라도 그 자체로 관객을 실망케 하기보다는 도리어 다음 회차, 이전 회차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한다는 데 있다. 특히 뮤지컬을 즐겨 보는 관객 중에서도 같은 공연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기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오늘의 커튼콜, 오늘의 제스처, 오늘의 애드리브가 아닌 오늘의 러닝타임 전체가 새로워지는 이 공연에 회전문 욕구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오히려 서로 다른 회차에 공연을 처음 보는 관객들이 반복해서 제시하는 의견이 무엇인지 짚어내는 ‘같은 그림 찾기’가 공연의 재미가 될 수도 있다.

한편 자칫하면 잘못 미끄러지기 십상인 개그의 감수성은 객석과 무대에서 서로 단속해주어야 할 법하다. 정해진 대본이 없기에 퇴고도 없고,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짧기에 바로 내놓은 말이나 행동이 부적절할 수 있다. 객석과 무대 쌍방이 참여하는, 배우가 본인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수정할 수 있는 공연의 장점 중 하나는 말하자면 덕업상권, 과실상규가 아닐까.

글 | 김송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