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무가 김보라

안무가 김보라의 리듬은 정반대의 두 방향을 오가며 만들어진다. 채운 다음 비우고, 만든 다음 뒤집고, 후회하는 동시에 존중하며, 예술가로서 느끼는 갈증을 출발점으로 삼으면서도 쉬운 해갈은 지양한다. 그 가운데 변함없이 쥐고 있는 한 가지 기준이 있다면 매 순간의 자기 자신이다. 인터뷰에서 가장 자주 등장한 세 단어 – 시간, 시작점, 목마름. 안무가로서 그가 매 순간 가장 예민하게 붙잡는 재료인 자기 자신을 일컫는 또 다른 표현들이었다.

시 간

인터뷰 전, 그는 무용수들과 연습실 바닥에 앉아 토론을 하고 있었다. 레퍼토리 <소무>의 재공연 연습이었다. 김보라 예술감독이 이끄는 아트 프로젝트 보라는 5월 말에 2주간 브라질과 우루과이 투어 일정이 잡혀있다. 초청작이 여러 작품이라 연습이 동시에 진행 중이다. 뿐만 아니라 이미 1년 치의 스케줄이 빼곡하다. 레퍼토리 연습은 신작보다 더 조심스러워요. 굉장히 많은 리서치와 토론을 거쳐야만 초연보다 좋은 구성이 나오거든요. 저는 주로 개념적인 시작점을 잡고 무용수나 외부에서 받는 영감으로 작품을 완성하는데, 시간이 흐르면 사람도 변하기 때문에 재공연할 때 작품이 많이 바뀌는 편이에요. 그 과정에서 작품이 발전하니까 레퍼토리가 초청되면 설레죠.

<소무> ⓒGunuKim

현재 연습 중인 <소무>는 여성의 신체를 모티프로 삼아 젠더와 여성성에 대한 페미니즘적 탐구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한편 <꼬리언어학>은 고양잇과 동물들의 꼬리 언어를 육체 언어로 형상화한 작품으로, 언어에 대해 탐구한다. <소무>는 기존의 공연에서 가장 좋은 장면들이 이미 연상이 되어 그걸 그대로 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안 되겠다 싶어서 지금 잠시 작업을 중단했어요. <꼬리언어학>은 초연 때와 방법은 똑같이 두고 거의 신작처럼 다시 짜고 있고요.

낯설게 아름답다. 김보라의 작품을 보면 공통적으로 드는 생각이다. 올해 3월에 공연한 <인공낙원>은 2년 만의 신작이었다. 출발은 ‘인간과 자연’이었지만 어느 순간 이 명제 자체가 뒤집혔다. ‘인간도 자연이라고 보면 인간이 하는 모든 행동 역시 자연에 속한다’는 생각은 제2의 자연으로서의 몸과 그 몸이 인공으로 만들어내는 낯선 아름다움에 대한 재발견으로 이어졌다. 자연으로 간주되는 것과 가공된 몸짓이 묘한 경계에서 만난다. 재료를 가공하는 방법만이 안무이고 예술이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인공낙원> 무용수들과 함께 재료를 선택, 가공하고 안무하는 과정에서 재료의 선택부터 예술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어요.

김보라가 안무를 할 때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시간이라는 개념이다. 순간의 포착도 안무의 방법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도 인간인지라 오늘과 내일이 다르고, 지금과 이따 상황이 다르잖아요. 안무할 때 제 시간에 대한 것을 순간 숨기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게 될 때 허무함을 많이 느껴요. 지금의 내 시간보다 너무 앞서가거나, 내가 지금 내 시간을 잘 알고 있는데도 이미 지나간 시간을 가져오거나 하면 항상 뭔가 잘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의 제 상태, 방향, 에너지, 공간, 시간을 굉장히 예민하게 느껴요. 제가 계속 바뀌는 것 같고 제 안에 여러 명이 있는 것 같아요.

안무가로서의 작업 방식도 시간에 따라 변했을까. 개인적인 기억을 바탕으로 만든 데뷔작 <혼잣말>을 발표한 지 6년의 시간이 흘렀다. 직접 제 몸을 가지고 방법을 찾아가면서 만든 솔로작품이 <혼잣말>이었어요. 지금 보면 부끄러운 면도 많지만 한편 내가 이럴 때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굉장히 대범하고 용기 있게 다이렉트로 꽂는 부분들이 있어요. 그것도 나였다는 것을 계속 상기시켜주는 작품이죠. 사실 내성적인 성격이라 처음엔 안무가로서 무용수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관객에게 어떻게 다가갈 것인지 두려웠어요. <혼잣말> 이후에 세 명, 다섯 명, 아홉 명으로도 하고 싶어서 차근차근 무용수를 늘려갔던 것 같아요. 지금은 말 이상의 무엇이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게 돼서 소통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고 있어요.

<혼잣말> ⓒ아트프로젝트보라

시작점

김보라는 작품의 모티프나 소재를 ‘시작점’이라고 부른다. 그 시작점에 대하여, 종종 이런 평이 등장한다. “선택하는 소재가 독창적인 것은 물론 동시대성을 갖고 있다. 그렇게 바라봐주신 분들 덕분에 그런 말들이 생기고 저에 대한 시선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저는 지금의 저한테 가장 흥미로운 소재를 골라요. 제 흥미를 배제하고 ‘해야 될 것 같은’ 것을 선택하는 순간 항상 실수하고 후회하더라고요. 만약 제 소재가 관객들에게 독창적이라고 여겨진다면 감사한 일이죠. 하지만 공연을 한 즉시 저한테는 더 이상 독창적이지 않게 되어서 다시 목마름을 느껴요.

안무가이자 무용수인 김보라의 시작점 중 하나가 바로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이다. 우리나라에선 무용의 기술적인 부분의 비중이 큰데 저는 그런 면에서는 잘 못 춰요. 그런데 학교 이름 덕분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졌고 그 덕에 누굴 쫓아가려는 생각은 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막상 졸업 후 제 작업을 시작하니까 그게 자괴감으로 바뀌었어요. 학교 다니는 내내 제가 누군지 잘 모르고 마치 제가 학교인 것처럼 살았던 거죠. 학습한 모든 게 후회스러울 정도로 바닥을 친 적도 있어요.
그런데 그 학교생활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겠죠. 그래서 학습을 했던 그 상황도 존중하고, 학습했던 것을 후회했던 그 상황도 존중해요. 학교 교육의 장단점이 굉장히 오묘하게 교차해요. ‘과연 학교가 필요할까?’ ‘예술이 필요할까?’ 그런 의문을 품게 되는데 그걸 알려준 게 또 학교거든요. 실기과의 커리큘럼은 굉장히 많은 방법과 기술을 가르치고요, 오히려 그걸 경험했기 때문에 지금은 확 자유를 얻은 것 같아요. 일단 꽉 채워야 비울 것들이 생겨나고 그때 비워야 빈 것도 느껴진다고 그러더라고요. 꽉 채워지지 않은 상황에서 비우려고 하면 계속 소비만 하게 되죠. 학교는 이걸 알기 위해서 꽉 채워져 있던 시간들이 아니었나 싶어요. 이제는 ‘이건 나랑 맞구나’ ‘이건 아니구나’ 이렇게 계속 비워가는 과정이죠.

안무가로 데뷔하기 전부터 무용수로 주목을 받았다. 안무가와 무용수,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멀 수도 있는 두 개의 분야다. 확연히 달라요. 그 둘은 다른 직업이에요. 무용수일 때는 만나는 안무자에 따라 제가 많이 변했던 것 같아요. 안무는 지금 작품을 하고 있는 제 상태를 굉장히 잘 알려주는 작업인 것 같아요. 굳이 무대에 출연하지 않더라도 저를 바라볼 수 있고 제 이야기가 무용수들로 인해 공존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죠.

<꼬리언어학> ⓒJinyoung Lee

목마름

갈증을 이야기할 때마다 그가 향하는 방향이 조금씩 보였다. 아트 프로젝트 보라는 2013년 창단한 프로젝트 그룹이다. 그룹의 목표이자 고민은 안무자에 의해서 무용수들이 존재하는 수직구조가 아닌, 모두 창작자로 만나서 함께 꾸려가는 진짜 프로젝트 그룹이 되는 것이다. 각자의 주체성과 방향이 따로 있고 모였을 때 그것이 시너지로 작용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멤버들의 각자 창작 활동에 길을 열어주고 싶고 그 방법을 계속 찾고 있어요.

<프랑켄슈타인>, <꼬리언어학>, <Thank You> 등 초기 대부분 작품에서 안무가이자 출연자였던 김보라는 최근 <소무>와 <인공낙원>에서는 바깥으로 나온 안무가가 되었다. 안무 방법은 찾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소통해야 될지 고민될 때 항상 함께 출연했었어요. 출연을 하다 보니까 뭔가 더 찾겠다는 집념이 쉽게 사라질 때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수월하게 가지 않고 돌아갈지언정 밖으로 나와서 해보자는 멋진 포부로 나왔는데, 지금도 쉽지는 않아요.

김보라에게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너무 어렵고 알고 싶어서 계속 찾아다니는 것 같아요. 계속 작업을 하기 위해서 끝까지 못 찾았으면 하는 마음과 찾고 싶은 마음이 공존해요.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눈과 드러내는 몸이 다 다르고 또 계속 변하는데 그 변하는 것을 찾는다는 게 오히려 틀린 게 아닐까 어느 순간 드러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근데 인간인지라 자꾸 찾으려고 여러 방법을 쓰게 되더라고요. 그럴수록 공허해질 때도 있어요.
지금 재공연하는 <소무>는 2년 전 작품인데, ‘낯선 아름다움’을 찾아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저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그 목마름이 한도 끝도 없더라고요. 2년 전 객석에서 봤을 때 굉장히 구조가 잘 짜인 무용처럼 보여서 오히려 아쉬웠는데 이번 재공연 때는 그것을 과감하게 확 뒤집어 보고 싶어요.
여성에 대해 말하는 작품을 계속하려면 앞으로는 성(性)에 대한 것에서 벗어나 존재에 대한 것에서 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 ‘여성성’을 목적으로 두고 달려가는 과정이 오히려 더 구태의연하고 구조적이고 억압적인 것 같고요. 목적으로 두지 않고 제 작품 안에서 살아있다고 인정한다면 그냥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인공낙원> ⓒ최나랑

다시, 시간

인터뷰를 마치며 3년 뒤의 김보라는 전혀 다를지 모른다는, 그래서 3년 뒤의 그와 10년 뒤의 그가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만을 전제로 한 답변들이 흔들리지 않고 단단해 보였던 이유는 그가 매 순간의 자기 자신을 가장 기민하고 명확하게 붙잡는 예술가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지난 궤적들은 중심 없이 오고 간 흔적이 아니라 김보라만의 고유한 리듬이 되었다. 올해 발표한 <인공낙원>은 만드는 과정에서 ‘이 작품은 호불호가 확실히 갈렸으면 좋겠다. 색깔이 단단하고 진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처음으로 한 작품이에요. 2년 전 <소무>는 반대로 ‘우리의 생각을 모두가 느꼈으면 좋겠다. 함께 공존해서 이 공간을 꽉 채웠으면 좋겠다.’ 그런 작품이었죠. <인공낙원>에서 했던 생각이 지금 제가 안무가로서 원하는 방향인 것 같아요. 내년, 내후년, 10년 후에는 또 달라질 수 있겠지만 지금은 관객의 호불호가 확실한 작품을 하고 싶어요. 그러려면 제가 안무를 하는 과정도 확신 있고 명확해야겠죠.

글 | 김윤영
사진 | 김경수
영상 | 박하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