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 없이 읽을 수 있고 쓸 수도 있지만 쉬이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이 있다. 심지어 그 단어들은 종종 짝을 지어 우리 앞에 나타난다. 문득 묘한 단어들이 짝을 짓지 않았던 때가 그리워진다. 그나마 그들이 독립된 하나의 단어로 존재하던 과거에는 사전을 들춰 대강의 의미라도 짐작할 수 있었던 탓이다. ‘그 왜, 그런 거 아닌가? 막 그런 거 있잖아.’ 의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애처로운 구술을 뒤로하며, 서로의 손을 단단히 잡은 단어들은 더 멀리 달아나버린다. 다소 장황해졌지만 ‘융합예술’이라는 용어를 처음 접했을 때의 심정을 설명하기 위한 서두였다. 복잡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단어를 하나하나 쪼개어 본다. 우선 ‘융합’과 ‘예술’로 나눈다. 융합이란, 다른 종류의 것이 녹아서 서로 구별이 없게 하나로 합하여지거나 그렇게 만듦. 또는 그런 일. 뒤이어 예술이란, 특별한 재료, 기교, 양식 따위로 감상의 대상이 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인간의 활동 및 그 작품. 각 단어의 정의를 두어 번 소리 내어 왼 후 조심스럽게 두 단어의 의미를 조립한다. ‘다른 종류의 것이 녹아서 서로 구별이 없게 하나로 합하여 만들어진’ + ‘특별한 재료, 기교, 양식 따위로 감상의 대상이 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인간의 활동 및 그 작품’. 어디 보자, 활자의 차원에서는 보다 명료해졌지만 어째 ‘그 왜, 그런 거’, ‘막 그런 거’ 보다 훨씬 멀어진 느낌이다.

이처럼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융합예술에 대해 뭐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융합예술센터장 장재호 교수 역시 융합예술이란 ‘정의하기 힘든 예술’, ‘지금으로서는 규정할 수 없는, 규정되지 않은 예술 활동’이라고 한 인터뷰1)에서 밝힌 적 있다. 아, 원래 그런 거였어? 마음이 탁 놓이면서도 그 한편에서 ‘그래도’라는 접속사가 슬금슬금 기어 나온다. 그래도 정의할 수 없다는 한 마디로 융합예술이라는 용어를 저 멀리 달아나게 둘 순 없지 않을까. 지구 바깥의 우주 역시 무한대로 팽창하고 있지만 그래도 인간은 우주왕복선을 쏘아 올리니까. ‘아, 우주는 뭐라 말하기 힘든 공간입니다.’하고 돌아설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고로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융합예술, 혹은 그것에 가장 가깝다고 여겨지는 그 미확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우선 융합예술이라 여겨질 수 있는 것의 특징에 대해 생각해 본다. 방 안에 앉아 우주의 특징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모호한 일이지만 일단 정신을 집중한다. 우선적으로 생각나는 것은 융합예술이 가진 모호성이다. 앞서 말한 규정하기 힘든 것이 융합예술이 가진 속성이라면 기존 예술의 틀에서 설명하기에는 언어가 다소 힘에 부치는 작업이야말로 융합예술이라 부를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러한 선상에서 꼽아볼 수 있는 예술가가 있다.

김희천, <바벨>

일민미술관의 <뉴 스킨: 본뜨고 연결하기> 전시에서는 김희천 작가의 작업 <바벨>을 이렇게 설명했다. “주위에 실재하는 물건, 장소 등을 사진 촬영한 후 3D 프로그램을 통해 본뜬 공간을 임의로 재현하여 이어 붙입니다. 이렇게 제작된 작가의 영상은 모두 작가 개인의 일상과 경험으로부터 발췌되었지만,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를 스페인어로 읽는 목소리와 함께 상영되면서 적당한 거리감을 형성하고 있습니다.”2)<바벨>에서는 현실과 비현실, 2D와 3D, 사진과 영상, 한국어와 스페인어가 뒤섞여 기묘한 아우라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김희천 작가는 과거 인터뷰에서 이러한 작업이 사진-2012년 말로 예견된 세계 멸망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에서 출발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같은 인터뷰에서 “아직도 이 작업을 사진 작업이라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3)고 말하기도 했다.

구자하, <롤링 앤 롤링>

이러한 모호성의 연장선에서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예술가, 구자하 작가는 최근 네덜란드에서 수여하는 2017년도 YAA4)재단예술상을 수상하여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다큐멘터리 연극 연출가이자 작곡가로 활동하고 있는 그의 대표작으로는 <롤링 앤 롤링>과 <쿠쿠> 등이 있다. 하지만 ‘공연’되는 그의 작업의 특성상 직접 네덜란드로 날아가 두 눈으로 그가 만들어낸 작품을 볼 수는 없었다. 다만 어렵사리 그의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짧은 클립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쿠쿠>의 티저 영상이었다. 영상의 전면에는 한국 사람에게는 익숙한 동명의 전기밥솥이 등장한다. 그리고 전자밥솥은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취사 완료를 알리던 그 목소리-로 누군가의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나의 할아버지는 오차즈케를 좋아하셨어….” 해킹된 영상 속의 밥솥은 끊임없이 빛을 내며 무기질적인 목소리로 일제강점기에 머슴을 살았던 할아버지와 오차즈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처음 본 사람이라면 고개를 갸웃거릴 작업이다. 이러한 갸웃거림은 구자하의 작업에 모호성과 비규정성을 부여하는 요소이다. 그의 작업이 “한국사회의 비극적이고 역사적인 이슈들을 통해 유럽 사회를 되돌아보게 하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외에서 평가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 예의 갸웃거림은 조심스러운 끄덕거림으로 변화한다. 조심스러운 끄덕거림, 지금 이 시점에서 융합예술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제스처가 아닐까.

태싯그룹, <Game Over> ⓒTacit Group on Vimeo

조심스러운 끄덕거림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차지 않는다면, 조금 더 확실한 움직임을 융합예술로 보는 시각 역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 융합예술을 예술과 기술의 결합으로 보는 시각이다. 그 지점에서 이야기 하고 싶은 작업이 두 가지 있는데, 흥미롭게도 모두 예술가 그룹의 작업이다. 태싯그룹의 <Game Over>와 파트타임스위트의 <나를 기다려, 추락하는 비행선에서>가 그것이다. 태싯그룹은 앞서 말했던 장재호 교수가 속해있는 2008년에 결성된 미디어 아트 그룹이다. 주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기반으로 작업이 이루어지는데, 우연적인 기계음과 이에 반응하는 이미지를 다룬 것들이 많다. 그렇기에 그들이 만들어내는 사운드나 이미지의 조합, 그 경우의 수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다. 2015년에 공개된 <Game Over>의 경우도 그렇다. 단순히 여섯 명의 사람이 게임 ‘테트리스’를 플레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테트리스 블록이 쌓이고 형태를 이루고 사라지는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사운드와 함께 상응하는 이미지가 스크린에 떠오르게 된다. 일견 계산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그들의 작업을 이루는 것은 치밀하게 계산된 알고리즘과 프로그래밍이다.

파트타임스위트, <나를 기다려, 추락하는 비행선에서>

미술 기반 불완전 협동체 파트타임스위트의 <나를 기다려, 추락하는 비행선에서>는 2016년 서울시립미술관 <네리리 키르르 하라라> 전시에서 공개되었다. 천으로 둘러싸인 작은 공간 안에서 관람자들은 머리에 착용하는 VR(가상현실) 기기를 통해 360도 카메라로 촬영된 화상을 접한다. 여의도 벙커 공간, 공사장 한복판, 좁은 고시원, 전자쓰레기처리장, 광장 등의 풍경이 VR 기기를 통해 보여진다. 파트타임스위트는 360도 카메라를 사용하여 “전방위적 시선을 열어놓음으로써 마치 공간이 열려있는 듯하며, 현실적인 공간을 경험하는 듯한 일루젼”을 의도하고 VR 환경을 구현하여 “무한한 자유와 현실감의 비젼을 약속하면서도 더욱 강력하게 신체를 포박하며 ‘나’의 자리를 제명시키는 VR 공간의 은폐된 특징을 이용하고 과장한다.”고 설명했다.5) 이 두 그룹의 작업은 모두 특정한 기술을 통해 작업이 가진 아우라와 힘을 극대화하고 있다. 기술과 예술의 융합이라는 점에서 융합예술이라는 것의 외곽선을 조금 더 뚜렷하게 해 주는 듯하다. 하지만 온전한 선이라기보다는 점선에 가까운 것이어서 ‘이것만이’ 융합예술의 전부라고 말하기는 아쉬운 면이 있다.

수많은 단어들을 사용해 ‘융합예술’ 단 한 단어를 설명하려 해 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는 예견된 결과다. 앉은 자리에서 우주를 완벽히 설명해낼 수 없듯이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그 형태를 바꾸어갈 융합예술을 정확히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융합예술이 자아내는 리듬은 불규칙적이고 듣기에 편하지 않을 수 있으며 때로는 아예 들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규칙한 리듬도 리듬이며 듣기에 편하지 않은 것도 리듬, 심지어 리듬이 없는 것 역시 하나의 리듬일진대, 그 리듬을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융합예술의 리듬, 그 미확인의 리듬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 시대의 예술가들은 그것에 귀를 기울이고 나아가 서툰 손뼉으로라도 리듬을 맞추며 걸어나가야 한다. 고개를 조심스럽게 끄덕이면서, 점선의 틈을 메우면서.

글 | 박하빈
1) 한국예술종합학교 신문 2016년 5월 7일자
2) 일민미술관 인스타그램
3) 김송요, 매거진<K-Arts> 17호 아티스트 인터뷰
4) Young Artfund Amsterdam
5) 파트타임스위트 홈페이지 www.parttimesuite.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