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예술영재교육원장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

한국예술종합학교, 사람 정말 적다. 그런데 우리 학교보다도 훨씬 더 소수의 예술가 들이 모인 곳이 있다. 예술창작에 현저한 공적이 있는 예술가를 선출하는 대한민국 예술원으로 지금껏 회원을 딱 91명만 뽑았다. 그중 한명이 바로 우리학교 음악원의 설립부터 성장까지의 역사를 함께한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이다. 열정적인 선생님이자 정열적인 연주자로 일생을 살아온 그를 만나 그 자신과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물었다.

대한민국예술원 91인에 선출되다

들어가기가 아주 어려운 곳인 만큼 영광스러웠습니다. 대한민국 예술원에서 제가 거의 막내더군요(웃음).

음악원의 시작을 함께하다

초기엔 건물이 없어서 예술의 전당 5층에서 셋방살이를 했어요. 정말 열악했습니다. 그 땐 입학 실기 시험을 일주일씩 진행했는데 여름에 창문을 열 수가 없으니 죽겠더라고요. 나중엔 숨이 막힐 지경이 돼서 “제발 부탁인데 에어컨 좀 틀어달라”고 울면서 사정 할 정도였어요. 집 없는 설움이 이런 거구나 싶었죠. 그런 기억 때문인지 우리학교 첫 삽 뜨던 날도 펑펑 울어버렸어요. 제가 눈물이 좀 많아서(웃음). 돌이켜보면 그런 열악한 조건에서도 선생님과 학생들 모두 정말 열성적이었어요. 저도 오케스트라 수업에 거의 매일 들어가서 바이올린 섹션만 따로 불러 하나하나 연습시킨 기억이 나네요. 그때 한예종 학생들로 이루어진 오케스트라는 어떤 기성 오케스트라에 견주어도 손색없을 만큼 뛰어났습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선택한 이유

미국에서 십 년 유학하고 우리나라로 돌아왔더니 이건 말이 안 되더라구요. 음악가가 클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었어요. 학생들이 고3 되면 수능 준비하느라 연주를 놓아버리고, 겨우겨우 준비해서 대학에 들어가도 연습 안하고 놀기 바빴어요. 졸업 연주 심사할 때도 다른 선생님들한테 “쟤 (저 실력으로) 어떻게 졸업시켜요” 그러면 “그냥 빨리 졸업시켜, 빨리 시집가라 그래”그러는 거예요. 그때 이강숙 당시 한예종 초대 총장님이 저를 꼬드기기 시작했어요. 유학 가지 않고도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할 수 있는 학생들을 한 번 키워보자고요. 그래서 기존에 재직 중이던 국립대에서 미련 없이 뛰쳐나왔습니다.

꼬마 김남윤 바이올린을 들다

어렸을 때 언니랑 챔버 오케스트라를 보러 간 적이 있는데 바이올린이 그렇게 멋있어 보이더라구요. 그때 음대생인 언니 소개로 모 교수님을 만나게 됐는데, 저를 가르쳐보시더니 재주가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가보다 하며 1년쯤 배웠을 때였는데 이화 콩쿠르에 나갔다가 덜컥 수상해버렸어요. 그게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삶의 시작이었죠. 저 더러 그저 건강하게만 자라 달라던 어머니가 그때부터 갑자기 ‘극성 엄마’로 돌변하기 시작했습니다(웃음).

스물일곱의 김남윤 교편을 잡다

당시 저는 미국에서 차근차근 커리어를 쌓아나가던 연주자였어요. 그런데 갑자기 한국에 들어오게 됐어요. 제가 늦둥이어서 부모님께서 많이 그리워하시기도 했고, 마침 K대에서 교수직 제의도 있었거든요. 그땐 제가 한국에 돌아오면 모든 게 끝나는 것만 같아서 펑펑 울면서 들어왔어요. 그런데 막상 애들을 가르쳐보니 슬슬 욕심이 나더군요. 한두 명 정도는 잡아서 가르치면 크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에서 밥까지 해먹여가면서 가르쳤어요. 그러곤 동아콩쿠르에 나갔는데 뒤에서 명문대 교수들이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리더라구요. K대에서 무슨 콩쿠르를 나와, 웃기지도 않는다구요. 근데 제 학생 이 무대에서 연주를 정말 눈물나게 잘해줬어요. 그제야 어, 이것봐라 하고 수군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제 학생이 대상을 받아버렸어요. 그때부터 교육자로서의 제 인생이 시작된 것 같아요.

도둑 연습을 할지라도

연주자로서의 삶을 포기할 수가 없어서 연주도 병행했어요. 그때는 도둑 연습했던 기억이나요. 애들 좀 늦으면 그 순간 한 프레이즈 해보고, 또 놓고, 연습해보고 그랬죠. 입시심사 직후곧 장차에 올라 그 안에서 손가락 풀고 드레스 갈아입고 바로 무대에 오른 적도 있구요. 같이 줄리어드에 다니던 동기들이 한국에 와서 연주하고 돌아가는 모습들을 보면 씁쓸하기도 했어요. 쟤들은 저렇게 연주를 많이 하고 다니는데 난 뭐하고 있는 걸까 하구요. 하지만 학생들에게로 돌아오면 그런 건 금세 잊혀졌어요. 애들이 멋지게 연주해내는 모습은 제가 무대에 설 때랑 비교도 안 되는 희열을 느끼게 해주거든요.

원석을 알아보는 법

딱 보면 ‘저거, 시키면 되겠다’, ‘아무리 잘난 척해도 넌 아니야’ 그런 게 보여요. 어렸을 때 재주 있고 빨리 빨리 잘하는 애들 쉽게 못 믿어요. 오히려 조금 둔한 듯 느린 듯한 친구들이 잘하더라구요. 바이올리니스트 임지영이 그랬어요. 한 선생님은 어릴 때 지영이를 답답한 학생으로만 생각했는데 저는 쟤 괜찮다고 클 거라고 장담했어요. 과연 서서히 트이기 시작하더니 열아홉에 퀸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일등을 하더라구요. 저는 뭔가 보인다 싶으면 막 잡아끌어요. 수많은 학생들이 핑계를 대면서 안 따라오지만 몇몇은 그걸 꼭 잡고 따라와요. 그런 애들이 돼요. 사실 이 시대에 천재는 없어요. 옛날 작곡가 베토벤, 브람스, 모차르트는 ‘야, 어떻게 이런 멜로디와 화성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 만큼 정말 천재예요. 그런데 지금은 없어요. 그보단 학생들이 철들기 전까지 부모님 역할이 중요해요. 본인과 선생님 그리고 부모님이라는 삼박자가 잘 맞아 들어가야 한 명의 훌륭한 음악인이 탄생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한 번밖에 들어주지 않는다

저는 애들을 야단치지 않아요. 싸워요. 그림과 영화는 고칠 기회가 있지만 음악은 무대에서 한 번에 뿜어내지 못하면 끝이거든요. 그래서 학생들한테 늘 하는 말이 첫 번째에 잘 해야 한다, 사람들은 한 번밖에 들어주지 않는다는 거예요. 실수하지 않는 정도로는 안 되고 여유가 있어야 해요. 연주자가 무대에서 떨고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면 청중도 덩달아 불안해지거든요. 그러려면 결국 연습뿐인데, 임지영은 퀸엘리자베스 콩쿠르 나갈 때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파스를 감을 정도로 무섭게 연습시켰어요. 물론 학생들이 어깨며 손, 팔, 허리까지 아픈 거 보면 안타까워요. 그렇지만 다른 분야의 어느 누구든 그 정도 안 힘들겠어요? 애들이 앓는 소리하면사람 죽는 거 팔자라고, 쉽게 안 죽는다 그래요. 그렇게 엄하게 가르치다보니 호랑이 선생님 같은 이미지가 생겼나봐요(웃음).

열정적인 선생님 정열적인 연주자

연주라는 건 나를 최대한으로 발산해서 청중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작업이에요. 그런데 학생들을 보면 자기감정을 다 발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저는 그걸 끄집어내려고 온갖 노력을 다해요. 애들 앞에서“이 부분은 이런 느낌 안 드냐”며 춤도 추고 “여기선 이렇게 나와야 되는 거야”하고 노래도 부르고, 이야기를 막 지어내면서 “여기 이 마디는 그런 느낌 같지 않니?”하며 정말이지 별짓을 다 해요.그 무언가를 끄집어내지 못하면 제가 미칠 것 같아서 안 되겠거든요. 예전에 다른 학교에서 애들 가르칠 때 하도 소릴 지르니까 옆방 선생님들이 줄줄이 다 도망간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한 번 좀 우아하게 가르치려고 노력해봤어요. 얘 거기는 말이야, 하면서 점잔을 빼는데 벌써 목이 뻣뻣해지면서 병이 도지려 하더라구요. 에라 모르겠다 다시 소릴 지르기 시작했더니 싹 나았어요(웃음). 저는 연주할 때도 그래요. 정말 제 얘기를 청중에게 마음껏 발산하면 청중도 거기에 호응하리란 생각으로 열정적으로 연주해요.

제2의 작곡가

매혹적인 곡이요? 어떤 곡이든 들어보면 매혹적이에요. 어떤 곡이든 매혹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게 연주자고요. 연주자는 그 곡에 대한 제2의 작곡가라고 할 수 있어요.

예술가에게 정년은 없다

우리나라는 만 65세로 정년퇴직하게 되어 있는데, 줄리어드에는 92세에 학생들 가르치시는 분도 있어요. 예술가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음악이 풍부해지거든요. 저는 예술가 에게 정년은 없다고 생각해요.

음악원 학생들

정말 열심히 연습해요. 특히 몇몇 열심히 하는 학생들이 분위기를 만들면 다른 학생들 까지 더 열심히 하는 거 같아요. 그렇지만 사실 초기 학생들은 더 열정적이었어요. 그때는 서로 더 끈끈하기도 했고, 실력도 어떤 기성오케스트라에 견줘도 아깝지 않을 정도였죠. 사실 학생들이 다른 관심사를 잠시 접어두고 연습에만 매진하면 좋겠단 바람이 있어요. 다른데 신경 쓸 시간이 있을까요?

Re:form 한예종

한국예술종합학교 정말 특별하고 특수한 학교예요. 그런데 지금은 점점 우리나라 교육 제도를 따라가는 것 같아 속상해요. 예전엔 우리학교 입시가 참 자유로웠어요. 예를 들면 한 학생이 연주를 하는데 자꾸 실수를 해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 상당히 잠재력이 있는 친구예요. 분명 잘할 수 있는데 자꾸 틀리니까 제가 연주를 멈췄죠. 편안하게 생각하고 다시 한 번 해보자 그랬더니 판타스틱하게 해내더라구요. 지금은 경직된 분위기에서 실수하면 떨어뜨리는 식으로 변해가고 있는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저는 한예종이 큰 성취를 이루었고, 또 이루어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25년밖에 안된 학교에서 이 만한 성과를 내는 경우가 세계적으로 드물거든요. 다만 앞으로도 이러한 성취를 이어가려면 우리학교가 탄생할 때의 그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글 | 성민규
사진 | 김경수
영상 | 김민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