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유희경

시집을 파는 서점 위트앤시니컬에는 돌연 이런 손님이 찾아왔다고 한다. 이제 막 군 제대한 청년 한 명이 제목은커녕 오직 시구 한 구절만을 들고서, 몇 년 전 우연히 본 게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며 이 책 제목 좀 알려달라는 주문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서점 주인은 한참 서가를 들춰보던 손님에게 "사람 그리워 당신을 품에 안았더니 / 당신의 심장은 나의 오른쪽 가슴에서 띄고"라는 구절이 있는 시집을 찾아주었고, 그 손님은 오래간 묵은 고민이 드디어 풀렸다며 너무나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서점 주인은 도대체 문구 하나를 찾아보겠다고 전전긍긍하던 청년의 발걸음이 가벼워지던 그 순간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한 남자손님이 함민복 시집 한 권을 8천 원 주고 구매했다"는 문장 대신에 말이다.

서점을 찾는 이들의 에피소드처럼 '시집 전문 서점'이 주는 의미가 남다른 것 같다.

사실 저희가 ‘전문’이라는 단어를 쓰진 않아요. 서점의 문턱을 높이는 단어이기도 하고, 시가 꼭 전문적일 필요도 없고요. 다만‘책’에 관해서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너무 커다란 대형서점이나 인터넷에서는 받을 수 없는 이런 작은 서점에서 느낄 수 있는 기쁨이요.

우리가 책을 고른다고 하잖아요. 상품을 소비할 때 편의를 선택하는 것과는 달리 책은 사람들이 느끼고 싶어하는 또 다른 지점에 있는 것 같아요. 만져보고 살펴보다가 받는 어떤 느낌이요.서점에 온 분들은 꼭 책을 사가곤 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수고가 아까워서가 아니라 살펴보다가 매혹되는 지점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편의와는 다른 느낌인거죠.

“사람들의 마음속에 시 하나씩은 심어주고 싶다”는 서점의 목표에 대해서는 박준 시인과 나눈이야기를 해드리고 싶어요. 박준 시인이“지하철에 있는 모든 승객이 시집을 읽는 풍경을 생각해보라고, 그건 오히려 참 끔찍한 풍경일 거라고”했거든요. 저 역시 동의해요.모든 사람이 시집을 읽을 필요는 없을테고요. 다만 이유야 어떻든 일 년에 한권쯤 시집을 읽을 여유 정도는 가질 수 없을까, 그런 맥락에서 지은 목표예요.

시인이 직접 서점을 운영하는 일도 특별해 보인다. 시인 동료들과 행사를 꾸릴 수 있겠다.

서점 주인이 시인인 건 신뢰성을 주죠. 시집을 채워 넣거나 기획할 때 동료시인을 모시는 편리함도 있고요. 또 서가를 둘러보시면 어느 시집에는 시인들의 싸인을 받아두기도 했어요. 서점을 운영하면서 동료들과 교류를 많이 나누게 된 건 저 스스로의 변화이기 도해요. 예전에 편집자로 일할 때보다 서점을 운영하면서, 누군가의 말을 들었을 때 좋은 일이 생긴다는 경험을 많이 겪었거든요. 그래서 좀 더 남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으려고 하는 편이고요. 물론 시인들이 원체 공중에 붕 떠서 사는 사람들이다 보니 들을 필요가 없는 것 같기도 하지만...방금 건 농담이고요.

서점 이름도 동료들과 이야기하면서 나왔어요. 동료 시인들과 수다를 떨다가, 제가 “위트 있는 시”라고 한 걸 하재연 시인이 “위트앤시니컬”이라는 문법에도 안 맞는 말로 이해한 것을 계기로 지은 이름이에요. 모든 이름이 그렇듯 반대도 많았지만 망설임 없이 지었고, 정확한 판단이었다고 생각해요. 쉽게 기억될 것 같기도 하고, 또 시 안에 위트와 시니컬이 모두 있다고 믿고, 열린 해석이라는 점에서 마음에도 들고요. 지금은 너무 많이 말을 하고 써서 그냥 제 이름 같아요.

위트앤시니컬 내부의 작은 간판과 유희경 시인의 초상화 스케치

최근 개점한 2호점도 역시 같은 이름이다. 시집 제목을 짓듯 또 다른 이름 욕심이 나진 않았는지.

일단 위트앤시니컬은 상호고, 프로젝트 기획 그룹이니까요. 그렇게 만들어진 이름은 널리 알려질수록 제게 좋기 때문에 매번 다른 이름을 짓는 건 홍보문제가 클 거예요. 프로젝트 그룹이라는 건 지금 공간을 카페 파스텔, 셀렉트숍 프렌테와 함께 공유하는 걸 말해요. 많이 불리기는 숍인숍 혹은 숍앤숍이라고 하죠. 이게 실질적으로 경제적 부담을 줄일 수도 있으면서 넓은 공간을 쓸 수도 있고, 여러 일을 같이 벌일 수도 있는 등 여러모로 유리한 방식이에요. 시집 서점이 많은 공간이 필요하지 않아서 좁은 공간만 써야하나 싶은데, 이 공유를 통해 큰 규모의 공간을 꾸림으로써 더 많은 행사를 하고 있어요. 이런 장점들 때문에라도 시집 서점 위트앤시니컬이 계속 가져가야할 컨셉이라고 생각하고요.

석관동에 3호점이 필요하다.

석관동에는 손님 찾기 어려워서 엄두가 안나요. 이리 카페랑 잘 된다는 소리 못 들었는데.(웃음) 만들면 학교 도서관하고 경쟁을 해야 하나요? 그래도 여유가 더 생겼을 때, 망해도 좋을 때 서비스 정신으로는 가능할지 몰라요. 있으면 정말 좋을 테니까요.

위트앤시니컬에서 진행되는 행사는 무엇이 있는지?

우선 낭독회는 두 가지 타입이 있어요. 목요일의 낭독회라고 해서 매달 한두 번 정도 목요일마다 시 열다섯 편을 읽는 행사인데, 제가 사회를 보고 시인이 직접 자기 시를 읽는 게 첫 번째예요. 기존 낭독회가 시인과의 대화로 이뤄지면서 시보다는 시인이 주가 됐는데, 그 반대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또 다른 낭독회는 2호점 합정에서 계획 하는 참여형 낭독회예요. 시인과 독자가 시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방식이요. 또 다른 행사가 하나 있는데, 그건 깊이 읽기, 함께 읽기라고 해서 한 시인을 선정해서 아주 깊지는 않더라도 일대기 중심으로 한번 파보는 포맷이에요. 그리고 두 시간 클럽이라고 해서 플래시 몹처럼 그냥 모여서 한 시인의 책을 읽고 돌아가는 것도 있고요. 최대한 생각나는 대로 많은 행사를 해보고 싶어요.

유희경 시인의 첫 시집 <오늘 아침 단어>
위트앤시니컬 낭독 모임의 모습 ⓒ변지민

누누이 낭독의 즐거움을 강조한다. 낭독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이나 인상적인 경험이 있다면?

시는 본래 노래였고 노래는 귀로 들어야 하는 거니까요. 지금은 텍스트성이 굉장히 강해졌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노래예요. 그래서 리듬을 따라서 그걸 쓴 사람의 목소리로 읽었을 때 좀 더 정확해지지 않나 싶어요. 시인들이 그렇게 쓰고 있기도 하고요. 낭독회라는 고루한 느낌 때문에 왔다가 듣고서 좋아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처음 시를 아름답다고 생각한 건 교과서에서 이육사의 청포도라는 시를 배웠을 때예요.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선생님께서 이 구절을 읽어줬을 때, 머릿속에 이미지가 팍 떠오르는 거예요. 그게 너무 신기한 체험이었어요. 텍스트가 이미지로 변신하는 걸 체감한 최초의 순간이었고, 이렇게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었거든요. 기획자로서는 오시는 분들이 특별한 체험을 하고 가길 바라곤 하죠.

낭독 자체로 제일 좋았던 기억은 대림미술관 <구슬모아 당구장>에서 제가 전시를 했을 때예요. 의자를 나이만큼 깔아놓고 의자 위에 시를 하나씩 올려둔 다음, 사람들이 오자 제가 시를 읽고 나가버렸고, 눈치 챈 큐레이터도 읽고 뒤따라 나왔고, 사람들도 나왔고. 모두가 그렇게 시를 읽고 나온 황홀한 경험이 있었어요. 지금 앉아있는 의자, 서점에 있는 의자들도 그때 그 의자들이죠. 이게 다 작품이었어요.

시인으로서의 활동계획은 어떻게 되시는지?

서점 때문에 활동 못 한다는 얘기 듣기 싫어서 오기로 시 쓰고 있어요. 얼마 전 2월 15일에 대림미술관에서 전시했던 걸 보완해 <당신의 자리-나무로 자라는 방법>이라는 두 번째 시집을 출간했고, 돌아오는 가을쯤에 새로운 시집이 출간될 거고, 겨울에 산문집도 하나 낼 생각이에요.

이야기를 들려주던 위트앤시니컬 대표 유희경은 말을 덧붙인다. 사람들이 서점을 찾는 이유는 단순히 상품을 사기 위함이 아니라면서, 만약 소비재 충족이 목적이었더라면 인터넷 서점으로 클릭 한 번에 주문하고 말았을 것이라고. 그런데 그렇지 않고 사람들이 끊임없이 전자책이 아닌 종이책, 편의가 아닌 번거로움, 상품이 아닌 이야기를 원하는 까닭은 거기에서 생기는 남다른 가치가 있기 때문이지 않겠냐고 말이다. ‘장사될 리 없다던’ 서점 위트앤시니컬이 세워진 배경은 이처럼 셈할 수 없는 ‘책’이라는 특별한 상품 의 가치에 기대고 있다. 중고서점에서 값싸다는 이유로 순식간에 주워 담은 수만 원어치 책 수십 권과 몇 년 동안 찾아 헤맨 8천 원짜리 시집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 “사람들의 마음속에 시 하나씩은 심어주고 싶다”는 작은 서점은 그렇게 출발했고, 반년이 지난 지금에는 위트앤시니컬 2호점까지 열었다.

글 | 이지웅
사진 | 김경수
영상 | 김민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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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itncynical.net

위트앤시니컬 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