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조네, <잠자는 비너스>, 1508
베첼리오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 1538

조르조네의 그림으로 알려진 <잠자는 비너스>. 풀밭 둔덕의 우묵하게 그늘진데 이부자리를 깐, 그러나 이불은 덮지 않은 채 모로 누운 여인이 정면을 향하고 있다. 배경은 모호한 자연 풍광이다. 여자는 오른팔로 팔베개를 하고 있어 겨드랑이가 드러나 있고, 팔의 안쪽에 있는 연한 피부와 긴장상태로 당겨진 가슴 역시 내보인다. 반대편 손끝은 음부를 가리며 시선의 흐름을 만든다. 오른다리는 왼다리 안으로 숨겨져 왼쪽 허벅다리부터 섬세한 발가락의 끝으로 쭉 뻗은 살결까지의 곧고 온화한 선에 집중하는 데 일조한다.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어떨까. 비너스는 눈을 뜨고 정면을 보고 있다. 오른손에는 꽃다발을 쥐었고 미세한 갸웃거림으로 턱은 당겨졌으며 눈은 치떴다. 공간은 침실과 회랑이 문을 사이에 두고 나뉘는 대신 연결된 것처럼 보이는, 우르비노의 궁전으로 묘사 된다. 비너스가 누워있는 곳 너머로는 건물을 이루는 기둥과 복도, 장식적인 벽감, 대수로운 배경이자 지물로 존재하는 인물들이 있고 비너스의 등 뒤로는 커튼이 드리운, 인위적인 위치의 어두운 벽이 놓여 <잠자는 비너스>와 같은 구도로 빛과 시선이 타고 흐르는 방향을 만든다.

'로커비 비너스'라고도 불리는 벨라스케스의 작품 <거울 앞의 비너스>로 넘어오면 뒷모습이 캔버스를 가로지른다. 침실의 벽 쪽으로 몸을 틀어 흰 등과 엉덩이를 내보이고 있다. 유선형으로 머리맡이 솟은 침상으로부터 비너스의 시선이 향하는 벽면까지는 심도가 낮고 원경 또한 없다. 어린 큐피드가 들고 있는 거울을 통해 흐릿하게 비너스의 얼굴이 비친다. 화폭의 가운데를 차지하는 거울에 비친 비너스의 얼굴로, 발갛게 칠해진 뺨과 뿌옇게 보이는 시선이 이쪽을 향하고 있다고 어림짐작한다. 왼다리는 접혀 오른다리 아래로 가려져있고 이번에 빛을 받아 광택을 내는 것은 종아리와 어깻죽지의 도드라진 굴곡이다.

그리고 이 여인들의 계보는 마네의 <올랭피아>로 이어진다. 커튼으로 막힌 벽은 건너편까지 시야를 확장하지 못하게 한다. 상대적으로 조그맣고 미성숙하게 느껴지는 체형과 낮은 채도의 피부색은 풍만하고 싱그럽기 보다는 건조한 감촉이고 정면을 응시하는 눈빛, 목과 팔에 두른 장신구와 머리에 꽂은 꽃, 발에 걸친 뮬, 샅에 걸쳐져 유독 그림자가 짙게 묘사된 손, 따라서 거기 모이는 시선, 검은 고양이와 꽃다발을 들고 서 있는 검은 피부의 여인이 화면을 나누어 채우고 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거울 앞의 비너스>, 1647~1651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1863

이제는 닮은꼴이라는 사실이 너무도 익숙할 법한 네 작품을 견주는 일은 그럼에도 여전히 회자된다. 그것은 이 그림들이 원형의 등장 이래 끊임없이 형태와 서사를 바꾸어가며 재현되며, 그러면서도 시대 순으로 가장 앞선 것을 오리지널로 두는 대신에 제각각 중요한 작품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화폭을 가로질러 비스듬히 누운 이 여인들은 계속해서 의미를 바꾸거나 덧입는다. 고요한 르네상스 누드의 전형, 자신감과 성적매력을 내보이는 실제 귀부인 초상으로서의 비너스, 바로크식 볼륨감을 통해 청수함과 은밀함을 등치한 비너스, 비너스라는 명명으로 신성화한 '음전한' 여성 누드의 꺼풀을 벗기고 고유명사로 불리는 사람의 살갗을 그린 그림까지 각각의 작품이 보여주는 이미지와 이미지가 놓인 맥락은 공동의 주형 (鑄型)을 틀로 삼고 있더라도 결과적으로 아주 다르게 운용된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들은 시간이 지나며 사람들에게 새로이 인식되었고 다른 질문을 하게 만들었다. 지금의 관객은 조르조네나 티치아노의 비너스는 고상한 작품이고 마네의 올랭피아는 선정적인 작품 이라고 말하지 않고, 르네상스 비너스는 왜 홀딱 벗고 침의도 담요도 덮지 않은 채 밖이 훤히 내다보이는 곳에서 오동통한 맨살을 드러내고 있어야 하는지 지적할 수 있다. 마네가 신화로 포장한 여성 누드 앞에서의 관음적 태도를 꼬집고 있다고 말하는데 더해 애초에 여성은 벗은 채로만 미술관에 들어갈 수 있는지도 물어볼 수 있다. 19세기에는 백안시되어 훼손을 염려해야 했던 <올랭피아>가 역사적으로 재평가되는 한편, 미술관에 안전히 걸려있던 <거울 앞의 비너스>는 1914년 서프러제트 운동가였던 메리 리처드슨에 의해 난도질됐다. '현대의 가장 아름다운 여성인 팽크허스트를 사지로 몰아가는 정부에 대항해, 신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의 초상을 훼손하고자 했다'는 이유였다. 창작의 순간 어림했던 작품의 위상, 의미, 가치는 비평의 켜를 쌓으며 또다시 변모한다. 그러나 매순간 비평 은 검열이 아니며 비평의 존재는 작품의 형식적인 아름다움이나 역사적 가치, 탄생의 맥락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화적 위치를 점검하게 만든다. 그렇게 창작과 비평은 작품을 변주하는 동력이자 그 자체로 변주의 프로세스가 된다.

1920년 발표된 <둘리틀 박사 이야기>의 최신 번역판 앞장에는 다음 과 같은 요지의 일러두기가 실려 있다.

'이 작품이 쓰일 때의 인종차별적 관념이 작품에 들어가 있다. 영미권의 다른 출판사들처럼 그런 대목을 빼고 출판하는 것도 고려해 보았지만, 아무리 뛰어나고 훌륭한 사람이어도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적 환경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는 법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이 사랑받는 이유는 그 결점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책이 처음 발표되었던 시절의 독자와 달리 지금 우리는 잘못된 묘사를 알 수 있다.'

본래 가진 좋음과 나쁨을 알기. 아무도 다치지 않게끔, 점차 더 건강한 방식으로 건강한 이야기를 하기. 인간이 아무리 악하고 모자라도 인간의 예술은 위대할 수 있는 이유도 어쩌면 여기 있지 않나 싶다. 한 점의 캐논을 완벽하다고 믿고 거기 머무는 대신 자꾸만 변주를 시도하고, 꼭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창작과 비평을 통해 또 다른 세상을 설계해내는 것. 그 과정이자 방법은 그러니까, 예술이 할 수 있는 일이면서 예술이 해야만 하는 일이고, 예술이 해서 좋은 일일 것이다.

글 | 김송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