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도 리폼이 가능할까? 리폼의 원래 뜻은 '낡거나 오래된 물건을 새롭게 고치는 것'이다. 다시말해 유행이 지나 생명이 다한 것에 심폐소생술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일반적인 리폼의 의미다. 그래서 예술과 리폼이라는 단어를 나란히 하니 얼핏 각색이나 리메이크처럼 낡은 작품을 새롭게 만드는 작업이 먼저 떠오른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그 작품들이 각색되거나 리메이크된 것은 낡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오래되었으나 낡지 않은 생명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애니메이션 <라이온 킹>으 로 재창작하는 것은 <햄릿>의 유통기한이 지났기 때문인가? 아니 다. 오히려 그 작품이 400년 동안 생명력을 잃지 않고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정말 낡아 버린 예술은 리폼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예술에서 리폼의 개념이란, 낡은 아이템을 재활용하는 '일상의 리폼'과는 다른 차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시(re-) 만든다(form)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예술에는 여러 층위의 'Re:form'이 있다. 한 번 마감한 작품을 다시금 고치는 것, 자신의 장르적 토대를 새롭게 만드는 것, 예술가로서의 자신을 다시 규정하는 것 모두 예술의 리폼이라 불릴 만하다.

추민주 연출가, 뮤지컬 <빨래> (왼쪽부터)

작품re:form - 한번만 쓴 것은 안 쓴 것과 같다.

"졸업영화는 거대한 걸작을 찍는 것도 아니고 충무로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것도 아니라고. 자기가 선택하는 영화가 무엇인지,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는 거라고."1)라는 김홍준 교수의 말처럼 졸업 작품은 일종의 출사표다. 기성작가 같은 완성도나 시장성이 졸업 작품의 본질적인 목표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졸업 작품이 그대로 데뷔작이자 흥행작, 대표작이 되기도 한다. 뮤지컬 <빨래>, <오! 당신이 잠든 사이>, <김종욱 찾기>의 경우가 그렇다. 21세기 한국 창작뮤지컬의 새 지평을 연 세 작품들은 모두 졸업작품 혹은 학교공연에서 출발했으나 업그레이드 과정을 거쳐 흥행작으로 거듭났다.

세 작품의 탄생 시기는 비슷하다. 2003년 겨울, 추민주 연출과 장유정 연출은 연극원에서 각자의 졸업공연을 올린다. 추민주 대본의 <빨래>는 음악원의 민찬홍이, 장유정 대본의 <드레싱 해드릴까요?>는 전통예술원의 김혜성이 곡을 만들었다. <빨래>는 달동네에 사는 비정규직 서점 직원 나영과 몽골에서 온 불법체류자 솔롱고를 주인공으로 저소득층 서민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이후 수정 과정을 거쳐 2005년 대학로에 진출하는데, 그 후로도 시즌을 거듭 하며 작품은 꾸준히 업그레이드되었고, 최초 7개였던 넘버는 2009 년 총 18개로 늘어나 지금의 모습에 이르게 된다. 장유정의 <드레싱 해드릴까요?>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이들의 상처에 관한 작품으로 가톨릭재단 병원에서 어느 날 사라진 환자를 추적하는 형식의 플롯을 취하고 있다. 역시 2년간 대폭 수정되어 새로운 제목으로 연우소극장 무대에 오르는데, 그게 바로 <오! 당신이 잠든 사이>다.

장유정-김혜성 콤비의 또 다른 대표작 <김종욱 찾기>는<드레싱해 드릴까요?> 공연 이후 졸업에 아쉬움을 느낀 두 사람이 2004년 다시 한 번 연극원 동료들과 3일간 공연한 50분가량의 작품이 그 시작이었다. 첫사랑 찾기를 소재로 한 로맨틱 코미디로, 대사가 많고 상대적으로 대본의 힘이 강했던 작품은 이후 1년 반 동안 노래와 음악 비중을 늘리는 방향으로 수정된다. 분량은 1시간 반으로 늘어났고 김종욱을 찾아가는 과정이나 인도에서의 만남과 이별 장면 등이 추가되며 플롯의 완성도를 높였다. 이 작품엔 단 3명의 배우만 출연하는데 엄기준, 오만석, 원기준, 신성록 등 출연 배우 대다수가 이후 더 큰 인기를 얻으면서 <김종욱 찾기>에 출연하면 일이 잘 풀린다는 속설이 생기기도 했다.

초안을 만드는 것 못지 않게 초안을 수정하는 것은 어렵다. 많은 작가들이 초안을 수정하는 것을 싫어하거나 어려워하기에 그들을 채찍질하기 위한 "한번만 쓴 것은 안 쓴 것과 같다"는 격언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어떤 세 편의 졸업 작품은 성공적으로 리폼되었기에 뮤지컬 작가 및 연출가로서 추민주와 장유정의 이름을 각인시키며 소극장 창작 뮤지컬의 시대를 연 전설의 작품이 되었다.

뮤지컬 <김종욱 찾기>, 뮤지컬 <오! 당신이 잠든 사이>, 장유정 연출가 (왼쪽부터)

장르 re:form – 유일하고 하나뿐인 이름을 얻는 콜럼버스들

잠비나이의 이일우는 말한다. "음악을 할 때, 국악의 카테고리에서 음악을 하겠지만 음악 하는 순간만큼은 국악인이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는 음악인이 되어야 한다. 이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이런 팝송과 맞짱을 뜨는 음악을 만들어야 하는데, 국악 안에서만 음악을 만들고 표현하면 결국은 그 국악 안에서만 연주하고 듣는 곡이 나온다."2) 장르란 단지 관습이기도 하지만 예술가에겐 그들이 발을 디딘 토대 다. 장르를 리폼한다는 것은 이웃동네는 어떤 땅에 서있나 참고하며 영감을 얻는 수준이 아니라 지금 선 땅의 경계를 지우고 전혀 새로운 형태의 경계를 그려낸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공한 모험가들 은 유일하고 하나뿐인 자신의 이름을 얻는다. 잠비나이를 수식하는 말들이 이를 증명한다. "세상에 없던 음악", "잠비나이는 잠비나이다."

2009년 결성해 국악기로 록을 연주하는 그룹으로 이름을 알리며 해외에서 더 많은 주목을 받은 잠비나이는 이른바 퓨전국악 장르에 포섭되지 않는 자신만의 명확한 음악세계를 갖고 있다. 이전의 퓨전국악의 접근이 '국악기로 서양음악을 연주하는 방식'이었다면 잠비나이의 접근은 전통주법과 호흡법을 살려 국악기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소리를 극대화하되 동시에 현대의 음악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잠비나이의 음악은 다양한 장르의 장점, 특히 록의 친숙함과 강렬함을 수반하면서도 풍류 정신 같은 전통음악의 고유함을 간직3)하는 독보적인 색깔을 갖는다.

한편 또 다른 '세상에 없던 음악'을 만드는 태싯 그룹(Tacit Group)의 도구는 디지털 테크놀로지다. 태싯 그룹은 완성된 작품보다 음악이 만들어지는 환경과 과정에 주목한다. 이들은 작곡을 하는 대신 퍼포머의 즉흥적인 자판 조작을 사운드와 이미지로 연결하는 알고리즘을 구축한다. 공연에서는 여러 명의 퍼포머가 게임을 하듯이 자판을 조작하고 이를 통해 발생하는 사운드와 이미지가 재즈 연주자들의 즉흥연주(jam)처럼 작품을 완성한다. 그래서 때로 '이것도 음악일까? '하는 생경한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태싯 그룹이 관객에게 요구하는 것은 이 생경한 느낌 그대로를 즐기고 그 안에서 새로운 지각과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나 태싯 그룹의 작업을 반드시 음악 작업으로만 정의하기엔 부족하다. 이들은 공연장, 미술관, 건축물 등 다양한 장소에서 작품을 발표하며 알고리즘 아트뿐만 아니라 멀티미디어 공연, 인터랙티브 설치 등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다. 태싯 그룹의 장르를 정의하려면 아마도 잠비나이의 경우처럼 그들의 이름 자체를 장르로 규정해야 할 것이다.

잠비나이, 태싯 그룹 (왼쪽부터)

예술가의 self-re:form - 두 명의 예술가와 n개의 이름

금을 지우고 다시 그리는 사람이 있다면, 금을 자유롭게 넘어 다니는 사람도 있다. 여러 영역을 넘나들기에 그들이 리폼하는 것은 예술가로서의 자기 자신이다. 그러므로 물리적으로는 두 명이지만 두 개 이상의 이름, 그 이상의 정체성을 가진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한국무용을 전공하는 무용수였고 연극 및 영화 연출이자 작가이기도 한 김남건은 배우로서는 백석광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그가 2004년 동아무용콩쿠르에서 대상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미 유명하다. 물론 영역을 넘나든 셀프 리폼의 역사의 의미가 획득한 이름에 있는 것이 아니다. n개의 이름, n개의 정체성은 필연적으로 좋은 재료가 되어 한 명의 예술가의 몸 안에서 융합되기에 의미 있다.

배우 백석광에게서 당대성을 발견하고 <혜경궁 홍씨>의 사도세자로 발탁한 이윤택 연출은 "몸에 대한 감각은 물론 말에 품위가 있다"고 그를 평하기도 했다.4)

무용을 했기에 몸을 잘 쓰는 배우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연기의 몸과 무용의 몸은 너무 달라서 둘을 연결 짓는 것이 마치'수채화 잘 그리는 사람이 기타도 잘 칠거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백성광은 말한다. 오히려 다양한 영역의 경험을 통해 그가 얻은 것은 '비교 분석의 잣대'다.5)
요컨대 여러 영역에서 온 재료들이 그에게서 1차원적으로 조합되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에 비추어 다른 한 가지를 더 분명히 이해하게 되는 깊은 수준의 융합이 일어나는 것이다.

한편 흡입력 강한 1인 퍼포먼스로 주목받으며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 수상 후 최근 미술 전시까지 영역을 넓힌 정금형의 배경에는 연극, 무용, 애니메이션이 있다. 백석광의 경우처럼 정금형이 예술가로서 이명(異名)을 쓰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금형세트 프로그램>처럼 자신의 작업을 설명하는 적확한 언어로서의 중의적인 이름을 가질 뿐이다. '금형'에는 '어떤 물건을 만들기 위한 틀'이라는 뜻이 있는데, 정금형은 작품에서 과연 자신의 몸을 금형으로 이용한다. <진공청소기>와 같은 마임극에서 기계는 그의 몸 '금형'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으로 인해 다른 의미의 물건 혹은 타자로 다시 태어난다. 또한 신체예술가인 정금형의 작업에서는 좀 더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몸의 리폼'이 일어난다. <호모호모>, <트리스탄>에서 그의 신체는 기괴한 방식으로 재현되며 인간의 신체에 대한 관습적 감각을 뒤흔든다. 그의 이런 시도들은 인간신체의 관성으로부터 벗어난 상태 '자유의 극한'6)을 향해간다. 거침없는 탐색과 셀프 리폼의 역 사를 가진 이의 작업이 자유의 극한을 향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배우 백석광이자 연출가 김남건, 정금형 작가 (왼쪽부터)

새 것을 만드는 것이 도전이라면, 있는 것을 바꾸는 것 역시 도전이다. 도전의 보상은 좋은 작품이거나 세상에 없던 장르이거나 예술가 스스로의 이름일 수도 있지만 그중 가장 영예로운 것은 예술로서의 생명력이다. 일상의 리폼은 낡은 물건에 새 생명을 주지만 예술의 리폼은 작품에 낡지 않을 생명력을 준다. 예술의 리폼은 미처 낡기도 전에 이미 이루어진다. 그렇게 낡지 않는 것은 살아남는다.

글 | 김윤영
1) 트위터, 김홍준봇(@kimhongjun_bot)
2) 정지연, <스트리트H> 2015년 9월호 인터뷰 기사 중
3) 양은영・전인수, 「전통음악의 현대화를 통한 세계화」 pp.46-64, 『문화정책논총』, 2016
4) 송은아, <세계일보> 인터뷰 기사 중, 2016.6.28
5) 최윤지, 매거진 <K-Arts> 14호 인터뷰 기사 중, 2015
6) 김효, 「"기관(器官, organ) 없는 신체"의 노마디즘-정금형의 ≪금형세트 프로그램≫」, pp.103-109,
    『연극평론』,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