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그 후

비평 전시 <비평실천>

ⓒ산수문화

예술에 대한 평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수사학>을 전거로 르네상스 이전부터 존재해왔다. 작품에 대한 글쓰기를 업으로 삼은 작가들이 등장한 이후18세기가 되면 팔레 르 와이얄에서 개최되던 살롱전이 루브르 회랑에서 성대하게 치러지면서 회화에 대해 상찬하거나 결함을 지적하는 글 들이 대중매체를 통해 쏟아졌다. 최초의 비평은 이렇게 하나의 회화를 텍스트로 온전히 구현하면서 시작되었다.

한편 2년마다 열리는 성대한 축제 살롱전은 계급과 지위를 막론하고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동시에 비평에 대한 강력한 요구를 만들어냈다. 수집가들은 자신의 화랑을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지 알지 못했고, 예술가는 작품의 판매와 관련하여 비평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특히 근대 이후 새롭게 출현한 대중은 수많은 작품 앞에서 고급취향을 선별해 낼 수 있는 판단 기준을 비평에게서 찾고자 했다. 이는 이전까지 궁정 귀족이나 영주가 계급을 통해 독점하고 있던 취향과 예술에 대한 미적 평가를 이제 비평가가 대신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탁월한 감식가들은 대중에게 예술을 알리고 그들의 확대된 취향을 만족시켜주는 중요한 매개자가 되었으며, 이후 비평이 인상비평과 역사비평을 거쳐 신(新)비평으로 나아가는 동안 비평가들은 스스로 강력한 엘리트주의 성향을 띠면서 비평-권력을 독점할 수 있었다. 그들은 특정 작품이나 작가를 호명하여 비평적 담론을 형성하는 동시에 침묵의 카르텔1)을 통해 논의에서 완전히 배제해 버릴 수 있었고, 이것은 물론 예술담론을 생산하는 최종 심급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비평의 위기라는 소문이, 죽음이라는 부고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위기의 진원을 어디에서부터 찾을 수 있을까? 1960년대에 들어서면 후기구조주의를 이끄는 일련의 이론가들이 등장하면서 비평의 카르텔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저자의 죽음’, ‘해체’, ‘다원성’에 세례를 받은 포스트모더니즘 아래에서 비평-권력을 독점한 비평가의 역할 은 이제 무용한 것이 되었다. 작품을 해석하는 미적 규범들은 폐기되거나 재배치되었고, 비평의 고정점은 매우 유동적인 것으로 변했다. 비평은 여기에 대한 하나의 대응으로 다양한 사회과학 담론들을 접목하는 학제간 연구로 나아갔으며 기호학, 정신분석학 외에도 사회과학 영역과 문화이론을 넘나들면서 점차 고도화되었다.

그러나 후기 구조주의적 방법론을 적용한 비평은 대중들에게 스며드는 대신 아카데미와 뮤지엄, <아트포럼>처럼 지적 측면이 강조되는 일부 매체에서만 소용되는 양상을 보였다. 영향력 있는 비평가를 조사한 한 설문에서 로잘린드 크라우스 같은 포스트모더니즘 논자는 하위권에 링크 된 반면, 빌리지 보이스에서 칼럼을 기고하는 대중 평론가 제리 살츠는 전체 평점에서 1위를 차지했고, 로버타 스미스 같은 비평가들은 현장과 연동된 가볍고 가독성이 뛰어난 평문을 생산하면서 대중매체나 SNS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대중적 비평이 비평 간의 질적 차이를 담보하지 못하고 "대량생산되고 대량망각"되는 글쓰기로 전락해 버린다는 점이다. 특히 <뉴욕타임즈>나 <뉴욕매거진> 같은 대중매체에 소속된 미술평론가들은 소위 주례사 평론을 통해 비평의 대상이 되었던 작품의 교환가치에 영향을 주고, 작가의 브랜드를 홍보하는 마케팅으로 기능하는 결과를 낳았다.

한국의 상황은 어떨까? 비평의 위기 앞에서 비평가들은 우선 원고료만으로 생존할 수 없는 구조적 모순 안에 놓여있다. 미술전문지의 고료는 정확하게10년 전과 달라진 것이 없고, 지면은 여전히 한정적이지만 늘어난 필자들로 경쟁은 치열해졌다. 비평가들이 겪는 이러한 경쟁과 생존에 대한 불안은 비평을 황폐한 저널리즘-평론과 이론과잉으로 점철된 학술적 비평 사이 그 어딘가에 위치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심각한 점은 더 이상 비평이 미술시스템 안에서 어떤 유의미한 기제로도 작동하지 못하는 데 있다. 깊은 회의주의, 비평가가 정치적인 것에 대해 혹은 개별 작품 조차 비평의 올바른 거리를 상정할 수 없다는 불신이 위기를 이루는 가장 깊은 심연이다. 어떻게 비평가는 스스로의 다양한 아비투스2) 안에서 문화적으로 분리되어 올바른 거리를 유지할 수 있을까? 동시대 미술계에서 비평이 가진 모종의 정치적 권위는 다원주의와 비평의 위기 아래 모두 거부된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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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산수문화에서 열린 <비평실천>은 이러한 위기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실천적 공간처럼 보였다. 작가들을 섭외 하고 작품을 선보이는 대신, 비평이 미궁에 빠져있다는 전제 아래 동시대에 활동하는 젊은 비평가들을 모아 한권의 책을 만들고 외부의 텍스트 생산자들이 참여한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진 전시였다. 섭외된 5명의 비평가들은 서로 상이한 배경과 실천을 보여준 필자들이었다. 큐레이터와 비평가의 절충 모델을 고민하는 김정현과 온라인 비평-플랫폼 운영자이자 신생 공간 담론에 집중하는 권시우 이외에 작가이자 비평가로서 작가주의적 글쓰기를 지향하는 안진국, 저널리즘과 결합한 평론을 수행하는 이기원, 그리고 위 네 명과 모두 구분되는 정치적 차원의 비판적 비평에 관심을 두고 있는 홍태림 등이 참여했다. 전시장에 들어온 관객들은 이들의 비평문으로 엮인 책을 읽고 복사해 가져가거나 프로그램을 관람하는 방식으로 전시를 경험할 수 있었다.

책의 첫머리이자 전시 서문에 해당하는 <미궁에서 벗어나기> 에는 “생각해보면 요즘과 같은 시기에 비평문 하나를 읽기 위해 전시장에 향하는 관객을 상상하기란 어려워 보인다.”라고 쓰여 있었지만, 실상 전시는 상당한 수의 관람객들이 방문하면서 막을 내렸다. 참여 비평가들의 글에서도 비평이 당면한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다루면서 비평과 문학의 관계를 고민하거나 새로운 이미지를 모색하는 비평, 혹은 큐레이터십으로 확장하는 비평의 가능성을 논하면서 생산적인 대안들이 이어졌다. 마침 미술계에 새로운 비평 매체와 플랫폼이 태동하는 상황에서 젊은 비평가들이 제시한 대안적 관점들은 비평의 위기에 대응하는 유의미한 시도처럼 보였다. 그리고 여기에 위기의 자취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비평의 위기는 사실 소문만 무성할 뿐, 실체 없는 유령이었던 걸까? 비평은 무관심 속에서 고립되었던 것이 아니라 그 조용한 환대를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한 건 아닐까? 비평을 향한 기대와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을 전시는 그러나, 책으로 엮인 비평문이 전시 이후 전량 폐기되면서 의문을 낳았다. 기획자는 전시 이후 공개한 서문 마지막 글에서 “그러나 텍스트를 따라간다 해도 당신은 길을 잃을 것”이라 말했다. 어쩌면 비평이 당면한 가장 시급한 난제는 비평을 매개하는 텍스트 자체에 있는지도 모른다. 모더니즘 방법론을 거부했으나 탈구조주의적 글쓰기로 나아갈 수 없는 비평의 곤궁. 텍스트의 폐기는 다원주의와 비평의 특수성 사이에서 텍스트로서의 비평이 겪는 모순을 반영하고 있다. 전시는 하나의 사건으로서 비평이 막연한 기대와 내재적 당착 사이에서 지루하게 진자운동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이것이 위기 이면에 높인 비평의 가장 동시대적 단면임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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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은중
1) 동일 업종의 기업이 경쟁의 제한 또는 완화를 목적으로 가격, 생산량, 판로 따위에 대하여 협정을 맺는 것으로 형성하는 독점 형태
2) 특정유형의 환경을 구성하는 조건에 의해 생산되는 것으로, 실천과 재현을 발생시키고 구조화하는 원칙으로서 지속적이고 치환이 가능한 성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