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나해가 학교 앞에서 지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뒷좌석에 빨간 플라스틱 기와 모양의 뚜껑 때문에 조그만 집 처럼 보이는 통이 있었다. 지아가 물었다.
“달팽이가 들어 있어요?”
“아니 소라게야.”
나해가 대답했다.
지아는 손으로 플라스틱 통을 들었다. 안에 들어있는 두 마리의 소라게들의 집이 좌우로 굴러다녔다. 지아는 소라게의 집이 부서질까 봐 플라스틱 집을 양손으로 꽉 끌어안았다. 집에 도착해서도 게들은 집에서 나올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나해가 빨간 집 뚜껑을 열고 소라게 두 마리를 바닥에 놓았다. 그러고는 입술을 모아 조심스레 휘파람을 불었다. 소라게들이 그 소리에 반응했다. 지아도 덩달아 입술로 바람 소리를 내었다. 휘. 소라게들이 완전히 집 밖으로 나왔을 때, 지아는 왜 게들이 바람 소리에 나오는지 알고 있다고 했다.
“게들은 물에서 왔고 물들은 바다에서 왔고 바다에는 파도가 치니까, 바닷바람 소리인 줄 알고 나오는 거예요. 아, 그래서 소라 안으로 들어갔구나. 엄마. 소라 안에서 바닷소리 나잖아요.”
지아가 말했다.
아직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나해가 아이들을 테이블에 앉혀두고 말했다. 버클랜드 비치 모텔에서 몇 달을 살고 이스턴 비치 앞, 테리라는 지역 건축가가 만든 벽돌집으로 이사한 다음 날이었다. 나해는 세 아이를 동네 영화관 1층에 있는 자전거 가게로 데려갔다. 지아는 빨간색 스티커가 붙은 자전거와 그 비슷한 색의 헬멧을 골랐다. 바닷가에는 한눈에 담을 수 없는 야자수 몇 그루가 자라고 있었는데, 해가 바다 저편에서 떠오른 후 다시 어둠이 지긋이 해변에 깔릴 무렵까지 그 근처에만 가도 온갖 새소리가 들렸다.
그곳은 지아의 첫 번째 정거장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소리가 시작되는 그 순간부터 기어를 바꿔 매우 천천히 나무에 다가섰다. 새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일종의 규칙이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자전거를 탄 채로 야자수 나무 몸통에 자신의 왼쪽 어깨를 살포시 기대어 섰다. 그러면 어떤 때는 새들은 눈치를 채고 숨을 죽였고 어느 때는 지아의 인기척에 개의치 않았다. 점점 커지는 찡, 짱, 쨍하는 소리에 야자수 나무가 스피커처럼 울리는 것만 같았다. 지아는 더 커지는 소리에 귀가 안 들리는 지경이 된다 싶을 때쯤 손으로 나무 몸통을 밀어내며 두 번째 정거장을 향해 갔다.
오렌지색 지붕 집과 테니스 코트가 있는 집 사잇길로 식물 울타리를 왼편에 두고 들어가면 두 번째 정거장이 나왔다. 너른 잔디밭 위에 어른 넷, 다섯이 들어가서 뛰어도 넉넉한 트램펄린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지아는 첫 또래 친구들을 사귀었다. 진한 고동색의 깊은 눈과 얼굴에 퍼져있는 셀 수 없이 많은 수의 주근깨를 가진 필립은 저번에 함께 놀았던 조이를 좋아한다고 지아에게 말했다.
I like Joy but she likes this other boy at school. He is much taller than me.
그래? 지아는 생각했다. 눈치껏 필립의 슬픈 듯한 표정을 보고 조이가 필립을 안 좋아하나 싶었다.
Umm... Umm..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지아는 멈칫거렸다.
I think okay. She like you. I like Heewon.
Where is he?
Korea. I miss him all time.
지아는 희원의 툭 튀어나온 귀와 발그스레한 볼을 떠올렸다. 종종 85번 버스 종점과 자기 집을 지나 언덕을 함께 걸어 올라가 지아를 먼저 집에 데려다주던 희원이. 중학교에 가면서 만나기가 어려워졌지만, 3월 뉴질랜드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고 하니 편지와 사탕을 건네주었는데, 그 과일 모양 사탕은 무거운 유리병에 들어있는 것이었다. 다 먹지도 못하고 책상 위에 두고 왔는데 아빠가 먹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지아는 생각했다. 필립은 한국이 많이 머냐며 희원이 놀러 오면 같이 바닷가에서 조이와 자신과 더블데이트를 하자고 말했다.
이곳의 날씨는 꽤 변덕스러웠다. 집에서 왼쪽 창에 비가 내릴 때 오른쪽 창은 햇볕이 쨍쨍한 경우도 있었다. 비가 오는 날은 민달팽이들이 창문에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기어가는 모습을 반대편에서 보는 것이 처음이었던 아이들은 하나씩 달팽이 선수를 정해, 누구의 달팽이가 먼저 올라가나 시합했다.
아이들은 저녁 시간 디저트를 먹으러 맨발로 옆집 해리엇 아줌마네로 뛰어가곤 했는데, 발을 디딜 때마다 밤마실 나온 달팽이가 밟혔다. 그러면 아이들은 소리를 질렀다. 퍽 (달팽이 깨지는 소리) 꺅 (아이의 비명) 파파팍 (달팽이 깨지는 소리) 꺅 (아이의 비명). 이쯤 되면 뛰기를 멈출 수도 없었다. 그저 신속하게 움직여 아줌마네 집 앞 젖은 잔디에 발을 문질러댔다. 아침에 나와서 보면 길가에는 저녁에 벌어진 잔혹한 참사의 잔여물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자전거를 끌고 요리조리 피해 집에서 도로 쪽으로 나가는데 지아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갈매기는 달팽이를 먹을까?
이스턴 비치에 있는 갈매기들은 온종일 배고파했다. 사람들이 뭐라도 먹고 있으면 잔뜩 달라붙었는데, 조금 더 큰 크기의 갈매기들이 나타날 때면 작은 갈매기들은 공격을 당할까 봐 몸을 웅크리고 음식 곁에는 가지도 못했다. 그 모습을 여러 번 지켜봤던 지아는 갈매기들에게 육지 음식을 먹여보리라고 마음을 먹었다. 지아는 달팽이를 모으기 시작했다. 집 앞에 있던 달팽이들로 반쯤 채워진 병을 들고 바닷가로 나갔다. 비슷한 모양의 고둥도 먹지 않을까? 사람들도 먹으니, 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저번에 고둥을 잔뜩 주워 나해에게 가져다줬었는데, 나해는 이 고둥들은 한국에서 먹던 고둥과는 다른 종이니 써서 먹지 못한다며 그냥 바닷가에 갖다 버리라고 하긴 했었다. 그래도 갈매기는 먹을지 몰랐다. 지아는 물이 나가길 기다렸다가 달팽이가 든 병에 고둥도 주워 담기 시작했다.
달팽이와 고둥이 들어있는 병 안에 손을 넣어 잡히는 대로 고둥과 달팽이를 갈매기에게 던져 주었는데 처음에는 관심을 두고 부리로 낚아채다 금세 모두 흥미를 잃고 물가로 날아 가 버렸다.
갑자기 불어온 바닷바람 때문에 얼굴에 모래를 맞은 지아는 촉촉한 잔디밭에 살던 달팽이들이 난데없이 소금기 가득한 바닷모래에 부드러운 살을 비비면 아플까 싶었다. 집으로 돌아갈 길이 너무 멀 거 같아 달팽이들을 다시 병에 주워 담고 고둥들도 이제 물이 찬 바다에 던졌다. 바다에 무리 지어 떠 있는 갈매기들이 물 속 고기를 사냥하는 모습을 관찰하고 있는데 조이와 필립이 멀리서 걸어오며 지아의 이름을 불렀다.
Do you see that cave over there?
굴? 지아는 눈을 슬며시 찡그리고 필립이 고개로 가리킨 곳을 더 집중해서 보았다.
저기 절벽에 패인 부분을 굴이라고 말하는 건가? 지아는 생각했다.
There?
Are you going to scare her Phillip?
조이는 장난 가득한 눈으로 지아를 쳐다보는 필립을 툭 치더니 고개를 저으며 소리를 내지 않고
It’s a LIE.
거짓말이라고 지아에게 입을 크게 벌려 말했다. 지아가 어렴풋이 알아들은 이야기는 이 바닷가에서 어떤 여자가 물에 빠져 죽었는데 시신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떠나간 사람을 기다리던 여자가 어느 날 미쳐버려 배를 틀어 절벽을 받고 물에 빠졌는데 여자를 찾지 못했단다. 해가 지고 어두워지면 그 보트가 부딪쳐 패인 굴에서 그 여자가 나와 눈이 마주친 사람을 바다로 불러들인다는 것이었다.
So have you seen her Phillip?
조이가 필립에게 추궁하듯 물었다.
I am just letting Jia know. Just in case.
절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지아가 사니까 알려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지아는 성북동 집에서 한 겨울에 달아난 애완 달팽이들이 봄이 되었으니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고 그날 이후 지아는 멀리서라도 해가 지기 시작하면 그 굴이 있는 쪽은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집 뒤에 있는 동굴을 매일 더 깊이 파는 사람이 있다.
굴을 파다 보니 암석이 나와 캄캄한 가운데 그것을 깨뜨려 나갔다.
점점 암흑. 두 개의 동굴을 더 가지게 됐다.
물이 더러우니 굴을 먹지 말라고 했다.
눈이 보이지 않아도 내 굴은 내가 안다.
손으로 파낸 굴이라 만지면 손이 안다.
굴을 파서 나오는 돌로 정원에 돌길을 놓았다. 동굴이 길이 되었다.
매일 해가 뜨면 나는 동굴로 들어가 더 깊이 판다.
날카로운 굴 껍데기가 있으니 되도록 바닥에 발이 닿지 않게
수영했으나 결국 파도에 밀려 온몸에 상처가 났다.
이곳에서는 무엇도 가져가면 안 돼요.
억울해져서 돌로 굴을 깨서 그 자리에서 먹어버렸다.
한두 개 보다 많이 깨서 갈매기도 먹으라고 던져줬다.
갈매기는 시큰둥해서 내가 다 먹어버렸다.
해변에 앉아 있으니, 사람들이 그랬다.
저기 저 굴 보여 사랑을 기다리다 지친 사람이 탄 배가
언덕을 들이받아 난 자국이란다.
그날 오후, 막내의 학교에서 전화가 왔었다. 영어를 능숙하게 하지 못하는 나해였지만 아이들의 교육에 관해서는 어떤 작은 부분도놓치지 않으려 했다. 모든 것이 열려 있는 것만 같았다.
“소피, 잠시 제가 집을 비운 사이 아이들 먹을 것 좀 챙겨주겠어요? 1시간 뒤에 영어 선생님이 오시는데 잠시 막내를 데리러 가야 될 일이 생겼네.” 나해는 옆집에 사는 같은 처지의 중국 여자에게 부탁했다. 그녀는 아이들을 타지에서 홀로 보살핀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설명을 하지 않아도 정확히 나해의 말을 이해했다. 소피는 걱정하지 말라며 자기애들이랑 같이 음식을 먹일 테니 천천히 오라고 어설픈 영어로 답했다. 나해가 막내와 집에 도착했을 때, 지아와 수아는 소피의 집에서 음식을 먹고 영어 과외까지 마친 상황이었다.
“지호, 책가방에 있는 거 다 꺼내봐.”
나해는 감정적으로 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었다. 나해는 한숨을 쉬며 머뭇거리는 지호 앞에 책가방을 놓았다. 책가방 안에는 어른의 주먹보다 큰 돌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이걸로 뭘 하려고 한 거니 지호?”
나해는 며칠전 대문 옆 창문이 깨져 있던 게 생각이 났다. 당연히 하굣길에 짓궂은 고등학생 아이들이 밖에서 던진 돌 때문일 것으로 생각했었다.
“설마 깨진 창문도 네가 던진 돌 때문이었던 거니? 돌로 창을 깬 것도 잘못이지만 거짓말 한 건 더 나쁜 거야.”
“트레이닝하는 중이에요. 잘하려고”
지호는 꾸물거리며 말했다. 올해 막 아홉 살이 된, 다른 친구들보다 덩치가 큰 지호는 학교에서 열리는 운동회에서 투포환 대표가 되었던 것이었다. 점점 무거운 돌로 매번 더 멀리 던질 수 있었고, 자신도 몰랐던 예상외의 힘으로 닿을 수 없을거라 생각했던 거리의 창문을 그만 깨버린 것이었다. 더 멀리 던질 힘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된 지호는 스스로에게 놀람과 동시에, 깨진 유리 파편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것이었다.
나해는 매일 아이들의 학교가 끝날 시간에 맞춰 악기들을 차에 실었다. 아이들의 학교는 모두 10분 거리에 있다. 학교가 끝나면 악기 수업이 있었다. 제각기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아이들은 선생님의 집에서 개인지도를 받는다. 큰 애는 피아노, 둘째는 첼로, 셋째는 바이올린, 거기다 큰 애는 피아노 선생만 해도 셋이다. 피아니스트와 첼리스트인 교수 부부는 각각 큰애와 둘째를 같은 시간에 가르친다. 그나마 다행이다. 큰 애들을 먼저 떨구고 막내를 데려다주면 얼추 시간이 맞는다.
딸들의 수업이 끝나는 시간이 되면 아이들을 픽업하고 바로 셋째한테 간다. 다음 주에는 수업이 없다. 공연이 잡힌 선생님들의 리허설을 보는 것도 아이들에게 좋은 경험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선생님들을 소개한 유진 엄마의 말이 떠오른다. 기술적인 부분은 무조건 따로 새끼 선생을 붙여서 해야지. 예술적인 부분을 충족시키면서 애들 대학까지 연결해 줄 선생은 이 둘이 제일 나아. 그래 다행이다. 애들 교육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건데 참 감사하다. 아이들을 위해 이렇게 좋은 선생님들을 연결해 줄 분을 만나다니. 하나님이 도운 게 분명하다. 영어 때문에 망설였지만, 한국 교회에 가길 잘했다. 그때도 그랬다. 아이들 영어 선생님이 신문에 난 장학생 공모 기사를 오려서 친절하게도 형광색 펜으로 필요한 서류들, 오디션 날짜며 표시해 왔다. 딸애들이 둘 다 음악을 하니까 한번 시도해봐요. 난 바로 그 둘을 준비시켜서 오디션을 보게 했고, 큰 애들이 되고 나니 막내는 선택의 문제였다. 음악 장학생으로 학교에 들어가면 학교에서 하는 모든 음악 행사에 참여해야 한다. 아이 아빠가 그런 행사에 와주면 아이에게 참 좋겠지만 그는 이곳에 없다. 아니 단 한 번이라도 그는 나와 아이들과 함께한 적이 있었던가. 그는 항상 이곳에 없었다. 내가 이곳에 있어야 한다. 나는 그의 아내이지만 동시에 아이들의 엄마다. 나는 엄마로서 내 삶에 집중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내게 부여한 자리이다. 나해(娜海)야, 바다는 누구냐고 선생님이 물으셨지. 내 삶은 그것으로 충분히 이어질 수 있었다. 아이들을 위해서 나는 아내라는, 여자라는 모호한 자리를 내려놓을 수 있다. 그가 집에 오는 시간에 맞춰 귀걸이를 하고 기다렸던 젊은 내가 문득 떠 오른다. 그때는 그랬다. 내가 집에서 그를 기다렸다. 밥을 해도 첫 번째로 그의 밥을 떠서 이불 사이에 넣어 놓았다. 너는 자식들이 있잖아. 그런데 나의 그녀는 아무도 없어. 나밖에 없다고. 그의 그녀가 얼마나 불쌍한지 통곡하며 우는 연수를 바라보며 나해는 얼굴 가장자리부터 점점 마비되고 가슴까지 그 감각이 계속되어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어지고 말았다. 나해는 그 밤, 운이 없는 여자라며, 자신의 제자로 들어와 기도 드리라던 여자의 진한 눈썹이 떠 올랐다. 분명 문신이었을 거야.
엄마 뭐해? 잠에서 깬 아이가 묻는다. 그냥 앉아 있어. 어둠 속에서 엄마가 대답한다. 아이는 서서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그러다 조심스레 다가와 엄마 근처에 있는 소파에 앉는다. 엄마 울어? 아이가 묻는다. 엄마는 움직이지 않는다. 아이는 엄마와 그렇게 한참을 같이 앉아 있었다.
음악실 건물에서 과학실까지 가는 길은 꽤 긴 시간이 걸렸다. 음악실에서 나와 매점과 간호실을 낀 좁은 길을 걸어 올라가면 학교 광장이 나왔고, 오른편에 미술실 건물이 보였다. 미술실을 지나자마자 열매를 떨구고 노랗게 물든 나뭇잎들도 마저 다 떨구던 나무 너머로 하얀 학교 채플이 보였고 그제야 왼편에 과학실이 있었다.
지아는 항상 열려 있던 예배당에 가끔 혼자 앉아 있곤 했는데, 그곳은 나무 냄새가 가득했고 오른편 창문으로 빛이 들어왔다. 지아가 그곳에서 다른 누구를 본 일은 교장 선생님이 유일했는데, 그녀는 맨 앞자리에 앉아 기도하고 있었다. 지아는 그런 그녀를 보며 그녀도 무언가를 피해 이곳에서 쉬고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수업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고도 될 수 있는 한 느긋하게 채플을 빠져나갔다. 지아는 과학 시간에 원소주기율표라고 적힌 그림을 미즈 데이비스가 보드에 거는 것을 보았다. 대문자와 소문자 그리고 숫자들이 왜 네모,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그 네모 하나하나에 들어가 있는 원소들의 의미와 성질에 대해 배워 가는 수업은 지아의 궁금함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대답하고 나면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앉은 자리에서 팔을 베고 잠을 자기 시작했다. 어느 하루 수업이 끝나고 어수선한 분위기에 잠이 깬 지아는 미즈 데이비스와 그녀만이 교실에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나서야 멋쩍은 마음에 급하게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괜찮아. 혹시 지금 시간이 괜찮다면 너와 함께 가고 싶은 곳이 있어.”
미즈 데이비스는 선생들만 다닐 수 있는 작은 문들을 열어 건물 안에서 건물 안으로 지아와 함께 통과해, 학교 안에 있는 콘서트홀에 도착했다. 콘서트홀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곳은 깜깜했다. 조명 스위치의 위치를 몰랐던 그녀는 지아에게 불을 켜달라고 부탁했다. 지아는 능숙하게 조명을 키고 무대 위 구석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를 감싼 검은색 커버를 벗겼다.
지아는 얼떨떨하게 미즈 데이비스를 바라봤다. 덩치가 큰 몸집에 두 갈래로 땋은 허리까지 오는 긴 회색빛 곱슬머리, 여유 있는 하얀색 리넨 셔츠를 입고 있는 그녀는 수줍어하고 있었다. 지아는 자신이 요새 치고 있는 피아노곡을 과학 선생에게 들려주는 것이 어떤 의미일지 알 수 없었지만 이내 피아노 뚜껑을 열고 의자의 높이를 조절했다.
라흐마니노프 프렐류드 C# minor
그녀는 아무런 요동 없이, 멈춤 없이, 말없이 그곳에서 지아의 음악을 들어줬다. 연주를 마치고 한참 뒤 미즈 데이비스가 입을 뗐다.
“네가 음악을 한다고 말은 들었는데 나는 한번도 들어보지 못해서 궁금했었어. 이게 이번 학기 너에게 내는 나의 과학 시험이야. 너는 그냥 이렇게 하고 싶은 것을 하면 돼.”
펌프 하우스에서 열리는 젊은 음악가들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지아는 수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둘러 가방을 챙기고는 나해가 기다리고 있을 주차장으로 간다.
“손이 차갑진 않니? 히터 틀었다. 빵 싸 왔으니 먹어라.”
들리는 목소리에 답하지 않고 창문을 보았다. 비가 와서 맺힌 빗방울들이 또르르 하고 한 번 더 내린다. 살짝 머리가 아픈 것 같아 이마를 창문에 대보니 시원하긴 한데, 이내 다시 머리가 깨질 듯한 날카로움이 느껴졌다.
“오늘 학교는 어땠니?”
나해가 물었다. 지아는 다시 창문에 머리를 기대었다. 차가워 잠시 마비가 온 듯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가 바로 날카로운 통증으로 이어져 머리가 깨질 듯이 울리는 것이 느껴졌다. 지아는 이마를 다시 차가운 표면에 기대면 느껴지는 차가움이 날카로운 통증으로 변하는 것을 펌프하우스로 가는 내내 반복했다.
연주장에 도착하니 익숙한 얼굴들이 이곳저곳에 보였다. 지아는 이 곡으로 몇 번을 무대에 섰는지 세어보다가 작은 한숨을 쉬었다. 같은 얼굴들과도 몇 번을 마주쳤던가. 그들도 같은 곡으로 몇 번을 다른 무대에 섰을는지 몰랐다. 오늘은 특별히 로지도 온다고 했다. 별생각 없이 화장실에 가서 온수를 틀고 손을 녹였다. 손목까지 따뜻한 물로 데워야지. 손목을 따뜻하게 하면 온몸이 데워진다고 로지가 말해 주었다.
무대에서 지아의 이름이 불렸다. 그녀는 손을 꽉 쥐었다 피며 무대 위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객석에 앉은 사람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둠 뒤에 숨었다. 지아는 그 어둠 속에서도 나해와 로지가 앉아 있는 위치를 기억했다. 그녀는 차분히 의자의 높이를 조정하고 건반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고 기다렸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그 순간 건반을 누르기 시작한다.
벌써 도돌이표를 넘지 못하고 처음으로 돌아간 것이 몇 번째인지 관중들은 세기를 포기했다. 듣고 있는 모든 이들이 곡의 반복되는 모티브가 도돌이표를 벗어나기를 바랐다. 지아는 그 방법을 알지 못하는 듯했고 그 반복은 모두가 같은 꿈 안에 갇힌 것만 같은 마음을 만들어냈다. 어느 순간부터 지아는 빠르기도, 강약도 조절하는 법을 잊은 듯했다.
지아는 피아노를 치다 문득 잠에 들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녀는 자신이 지금 곡의 어느 부분에 있는지를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저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을 눈으로 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자신의 손가락이 치고 있는 음들은 자신의 귀에 들리는 음들의 그림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아는 찬찬히 머릿속에서 악보를 훑어보고 있었는데 손가락이, 머릿속에 있는 악보 속에서 다음 장으로 넘기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는 순간 연주는 끝나 있었다. 지아는 곡이 끝남과 동시에 눈을 떴다.
1. 여자는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한 장신구 공방 앞에 놓여있는 돌을 보았다. 크기가 크지 않았는데 막상 들어보니 무거웠다. 둥근 곡선으로 이루어진 윗부분에 비해 날 선 절벽같이 떨어지는 옆면이 마음에 들었다. 공방 안으로 들어가 누군가에게 당신 것이냐 물었다. 그는 나무 사다리를 만들다가 고개를 들고는 강에서 주워 왔다고 말했다. 그녀는 가져가도 되겠냐고 물었고 그는 흔쾌히 돌을 건넸다.
2. 돌은 박스에 담겼고 실리콘에 파묻혔다. 숨을 못 참겠다 싶을 때쯤 누군가가 칼로, 한때 찐득하게 달아오르던 실리콘의 배를 가르고 돌 표면에 절대로 떼어지지 않을 것처럼 붙어있던 핑크색 살점을 움켜쥐었다. 돌은 자기 피부가 벗겨지는 줄 알고 너무 놀라 몸을 웅크리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별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뭔가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오른편 위쪽 구멍에 살던 개미 친구가 작별을 고하는 소리에 슬그머니 왼쪽 눈을 떠 보니 가끔 강가에 비치던 자기 얼굴이 실리콘에 찍혀져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무엇인가가 뒤바뀐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얼굴의 푹 팬 부분은 툭 하니 나와 있어서 패인 주름들이 나온 주름들이 되어 있었다. ‘신기하네.’ 어느덧 두려웠던 마음을 잊고는 자신과 붙어있다가 이제는 멀어져 가는 실리콘 살점 덩어리를 바라보며 돌이 말했다.
3. 혼자서 오랜 시간을 앉아 있었다.
4. 어느 날 보니 옆에 무엇인가가 놓였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기는 힘들었다. 아무리 말을 걸어도 말이 없는 그것은 어떤 허연 것이었다. 하나에서 둘로, 순식간에 열이 넘어가 셀 수가 없었다. 어디에선가 본 듯한 그 모습은 본 적이 없는 것이었고 매일 그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하다 잠에 들었다. 잠에 들었다 깨어나 보면 더 많은 수의 그것이 있었는데, 그 알 수 없음이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어디에서 만났을까. 강가의 기억을 떠올려 봐도 저렇게 허연 애들은 없었다.
5. 그들끼리 뭐라고 속닥거리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그 어떤 것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
6. 돌은 자신과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앉아 있는 그들과 혼잣말을 주고받기도 했다.
7. 돌은 점점 그들의 소리에 익숙해졌다. 가끔 한 단어씩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들을 것만 같은 마음도 들었다. 문장을 만들어 가는 순서의 패턴이 추측 가능해졌달까, 하여튼 어느덧 그들의 속삭임을 배경음악 삼아서 낮잠도 자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8. 강에서 듣던 소리가 떠올랐다. 물이 오르던 소리 물이 내려가던 소리 계절에 따라 들리던 모든 움직임의 소리, 그중 가장 좋았던 소리는 비가 강물에 떨어져 나던 소리였다. 때가 맞을 때는 그 비가 내 몸에 부딪혀 소리가 나기도 했다. 하늘에서 내려오던 물도 강의 물과 마찬가지로 때론 내 몸을 쓰라리게 했지만 말이다.
9. 비의 얼굴들이 기억났다. 강물의 얼굴들이 기억났다. 물의 얼굴들은 항상 다시 돌아온다. 조금 시간이 걸릴 뿐이다.
10. 실리콘 살점을 무자비하게 뜯어내던 손이 허연 것들의 소란에도 끄떡없이 하나씩 들어다 옮기기 시작했다. 거의 던져진 허연 것들은 서로 부딪혀 비명을 지른다. 주변으로 허연 것들의 허연 가루가 떨어진다.
11. 어느덧 나는 그들 틈에 묻혀있다. 더 이상 눈을 뜨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주위로 보이는 것은 내 얼굴을 닮은 허연 얼굴들뿐이다.
12. 나는 눈을 감고 개미가 살던 오른편 위쪽 구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휙휙 이번에는 곡조를 붙여서
휘휘 휘이이 휘,
13. 모두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휘휘 휘이이 휘. 휘휘 휘이이 휘. 휘휘 휘이이 휘.
휘휘 휘이이
휘 휘휘휘이이 휘 휘휘휘이이이휘이 휘 휘휘이이이 휘휘히이이이휘
휘휘 휘이이이 휘 휘 이 휘 이 휘 이이이 휘 휘 이이 휘 휘 휘
산처럼 쌓여있던 우리는 균형을 잃고 쓰러졌고 떼구루루 땅바닥을 굴렀지만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글 박수지
연극원 극작과 서사창작전공 전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