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자면, 나는 해적질을 일삼는다. 오늘도, 이 글을 쓰기 위해 국내에 미출간된 서적의 pdf 파일을 ‘어둠의 경로’로 구해 읽었다. 시작은 영화를 닥치는 대로 보던 시절 도저히 합법적인 경로로는 볼 수 없는 영화를 구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막막한 심정으로 인터넷을 떠돌던 나는 우연히 법이 수호하고 있는 제도 바깥의 커뮤니티들을 발견했다. 그것은 이미 앞서 나간 해적들이 개척한 해로였다. 나는 그 뒤를 따라 언어나 자본의 한계로 이동과 구입이 어려울 때 혹은 제도의 함정에 빠져 있을 때 곳곳으로 뻗어 나간 해로를 따라 항해하며 각종 파일을 건져 올렸다. 이렇게 해적질은 내게 세상과 관계 맺는 일종의 창구가 되어 주었고 무엇보다 그것은 퍽 즐겁고도 달콤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해적의 정신을 믿고 있으며, 이 글 역시 그곳에서 시작해 보려 한다.
해커 아론 스워츠(Aaron Swartz)는 2008년 발표한 「오픈-액세스-게릴라-선언Guerilla Open Access Manifesto」에서 “우리는 정보가 어디에 저장되어 있든, 그것을 복사하여 전 세계와 공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글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이미 그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스워츠의 확신, 그리고 그가 묘사하는 그 행위 주체들의 이미지다:
"한편, 문이 잠겨 들어가지 못하게 된 이들(정보에 접근이 제한된 이들)도 행동해 왔습니다. 그들은 구멍으로 잠입하고 담장을 넘어, 게시자가 가둬 둔 정보를 해방시키고 친구들과 공유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행위들은 어둠 속에서, 숨겨진 지하에서 이루어지며, 도둑질stealing 또는 해적질piracy이라고 명명되었습니다. 마치 지식을 공유하는 일이 배를 약탈하고 승무원을 살해하는 것과 같은 비도덕적인 일로 간주되어 온 것입니다."1
'구멍으로 잠입하고 담장을 넘어 정보를 해방시키고 친구들과 공유하는’ 모습이 바로 동시대 해적의 이미지다. 이제 해적들은 금과 은화가 아니라 정보-파일을 표적으로 삼는다. 하지만 스워츠가 지적했듯 이러한 행위들은 여전히 비도덕적인 일로 간주되고는 한다. 타인의 지적재산권을 침해하는 ‘도둑질’로 말이다. 물론 나는 작품을 만든 이들에게 정당한 수익이 돌아가길 바란다. 하지만 과연 합법적인 경로(시스템)이 창작자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가에 대해서 먼저 짚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각종 플랫폼의 터무니 없는 정산 비율은 이미 악명 높으며2 공식 발간된 DVD나 OTT 서비스에서 정식으로 제공되는 영화 파일이 사실 해적판을 그대로 가져가 포장만 바꾼 것이었음이 드러난 사례3는 심심찮게 발견된다. 도서관, 대여점 등이 제공하는 ‘합법적인’ 관람이 반드시 창작자의 수익으로 이어지는 것 또한 아니다. 내가 원하는 자료가 언제나 공식적인 경로에 자리하지 않는다는 문제도 있다. 해적질을 상업 시스템 내에서의 비윤리라며 논의에서 배제하기 전에 이렇게 위법과 적법의 애매모호한 경계에 놓인 현실을 이야기해 본다면 어떨까.
한민수의 『영화도둑일기』(미디어버스, 2024)가 겨냥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이다. 책은 시스템에 틈새를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는 온라인 아마추어 아키비스트, 소위 ‘해적’들과 그 유산에 관해 이야기 한다. ‘영화도둑일기’라는 조금은 자조적인 제목이 보여주듯 해적질이 ‘도둑질’이라는 오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해적질을 단순히 위법과 합법으로 구분해 다룰 수 있는 것 또한 아니다. 해적들은 천만 관객을 동원한 액션 시리즈 〈범죄도시〉나 엄청난 제작비가 투자된 해 뮤지컬 영화 〈위키드〉를 불법 업로드·다운로드하지는 않는다. 다만 산업의 선택을 받지 못한, 그리하여 판권이 유통되지 않는 영화를 자체적으로 상속할 뿐이다. 해적들은 유통 산업 바깥의 영화, 수장고에 잠들어 있는 영화, 원작자마저 소실한 영화, 정품 그러나 저품질인 영화의 대안 ··· 을 유통한다.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으면서 밤새워 공부하고 번역하여 질 좋은 자막을 제작하는 해적들도 존재한다. 이들의 유통은 사회적, 지리적 그리고 경제적인 이유로 관람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영화를 보급하는 데 기여하는데, 이렇게 자신의 작업이 산포(dissemination)되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거나 심지어는 공유 사이트에 작품을 직접 업로드하는 원작자까지 찾아볼 수 있다(41~42p). 결국 해적의 출몰 이유는 오로지 자본만을 위해 움직이는 산업과 그에 반하여 접근이 제한된 혹은 억압되거나 소외된 영화의 대안을 제시하고자 하는 영화 애호가들의 욕망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를 합법의 테두리 안에서만 소비해야 한다는 주장은 영화를 유통하는 시스템을 믿으라는 공허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1
‘오픈-액세스-게릴라-선언’ 웹사이트(https://openaccessmanifesto.wordpress.com/)에서 선언문 전문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인용한 구절은 사이트 내의
한국어번역문을 참고하여 재번역했다.
2
2020년 팬데믹 당시 영화 수입사들이 국내 OTT 서비스의 정산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며 서비스 중단을 선언한 바 있다. 영화수입배급사협회에
의하면 IPTV의 영화 한 편당 정산 금액이 3,000원일 때 국내 OTT
서비스의 편당 관람료는 100원에 불과하다. 넷플릭스가 〈오징어
게임〉의 흥행에도 불구하고 제작진에게 러닝개런티를 주지 않고
수익을 독점했다는 이야기도 유명한데, 작품의 저작권이 어디까지나
넷플릭스에 있기 때문에, 흥행에 따른 모든 이득 또한 넷플릭스가
가져가는 것이다. 자세한 내막은 아래 기사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서정민, “영화수입사들 OTT에 서비스 중단, 콘텐츠 정산 방식 논란
확산하나?”, 《한겨레》, 2020,08. 06, 성기평, “재주는 ‘오징어
게임’이, 수익은 넷플릭스가?”, 〈우먼타임스》, 2021,10. 03.
3
고전영화의 경우 정식 출시작 DVD는 거의 99% 이상이 불법 복제판으로,
자막 역시 씨네스트에 올라온 자막을 무단 사용한 것이 대부분이다.
네이버 시리즈온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João
César Monteiro)의 〈노란 집의 추억
Recollections of the Yellow House〉(1989)은 씨네스트의 macine이라는 유저가 만든 자막이 그대로
사용되었다. 영상 소스 역시 그 출처를 신뢰하기 어려운데, 웨이브나
시리즈온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정성일의 〈카페 느와르〉(2009) 판본을
보면 화면 녹화 프로그램인 반디캠(Bandicam)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즉, 화면 녹화를 통해 만든 영상 파일이 정식 서비스에서
판매되고 있는 것이다. 이 사례들은 모두 『영화도둑일기』에서
가져왔다. 한민수,『영화도둑일기』, 미디어버스(2024), 19p.
여기서 우리는 질문할 수 있다. 영화를, 더 나아가 모든 예술 작품을 합법적으로만 소비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해적질과는 별개로, 완전한 성역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 일찍이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이 말한 바 있듯이, 소유란 ‘도둑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작권법이 수호하는 것은 무엇인가? 세바스찬 뤼트거트(Sebastian Lütgert)는 “저작권 산업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세계는 당신이 부르는 모든 노래가, 당신이 기억하는 모든 이미지가, 당신이 만든 모든 케이크가, 당신의 모든 춤 동작 하나하나가 다가올 수백 년간 당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의 ‘지적 재산‘이 되는 세계다.”4라 말했다. 그렇다. 저작권법이 그토록 엄중히 수호하고자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유주의 시장경제다. 땅을 포함하여 지구상의 거의 모든 것을 사유화한 자본은 마침내 한계 없는, 항구적인 축적 모델을 찾아냈다. 지적 재산, 그것만이 잠재적으로 무한히 확장되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의 영역이다. 모든 공유 사이트를 단속하는 저작권법과 유튜브로 대표되는, 사용자가 곧 자원인 미디어의 ‘프리미엄’ 구독 등이 가리키는 것은 자본이 지적 재산을 동시대의 주된 소유 형식으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러한 시대적 맥락 속에서 해적질이 단지 불법적인 일이나 비윤리적인 아나키즘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전용으로서의 한 방식이라 주장하고 싶다. 해적질은 사용의 권리를 박탈하고자 하는 소유권 체제 확장에 대한 도전이며 우리의 것을 되찾아오려는 작업이다.
생각해 보면 해적질은 꽤 오래전부터 우리에게 주체적인 전용으로서 기능해 왔다. 정부의 검열을 피하기 위한 해적판의 유구한 역사를 떠올려 보라. 시스템에 물리적 손상을 주지 않으면서 그것에 성공적으로 진입하는 시도, 이러한 맥락에서 해적질은 일련의 틈새를 만든다고 할 수 있겠다. 해적은 틈새를 이용하여 시스템의 자원을 (재)전유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스템의 붕괴를 부르기보다는 그 가능성을 촉진시키는 어떠한 개입이다. 우리는 결코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고 마냥 순응할 수도 없는데, 푸코의 정치적 행위 이론을 빌려오자면, 모든 종류의 지배, 통제, 규율 장치는 필연적으로 외부의 규범에 완전히 저항하지도, 또 완전히 순응하지도 않는 사용자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어떠한 영토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만 그 영토를 약탈하여 소유의 장벽을 넘어서고자 할 뿐이다. 이는 때때로 폭력일 수 있겠으나 떨어져 있는 가능성의 덩어리5들을 줍는 일이며 권력 없는 자들의 권력을 만드는 전술로서의 실천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앞서 이는 예술가의 일이다.
한편 애비게일 드 코스닉(Abigail De Kosnik)은 「해적질은 문화의 미래다Piracy Is the Future of Culture」라는 강렬한 제목의 텍스트에서 불확실한 미래에 디지털 데이터가 살아남을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에 대해 예측한다. 바로 살아남게 될 데이터가 공식적인, 제도적인 아카이브에 보관되어 있지 않으리라는 가능성이다. 다만 코스닉은 디지털 문화가 아마추어, 즉 “동시대의 문화 산업이 ‘해적’이라 칭하는 사용자들, 어떤 지적재산권 법이든 노골적으로 무시하며 디지털 파일을 업로드하고 다운로드하는 P2P 파일 공유 프로토콜의 사용자들에 의해 보존될 것”6이라 주장한다. 이는 『영화도둑일기』에 등장하는 한 해적의 말과 맞닿아 있다. “당신이 무언가를 좋아한다면, 다운로드하세요. 그건 아마 거기에 영원히 있지 않을 겁니다. (···) 해적질은 보존입니다. 당신이 무언가를 좋아한다면, 그걸 불법 복제하세요.”(35p) 불확실한 미래에서 디지털 데이터 보존의 운명이 전문 집단이 아닌 해적들에게 달려 있다는 코스닉의 주장은 적어도 내게는 설득력 있게 들린다. 익명의 해적이 말한 “무언가를 좋아해서 불법 복제”까지 감수하는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해적들의 콘텐츠를 보존[다운로드]하려는 욕망은 좋아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그리고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만큼이나 강력한 동력도 없기에, 결국 좋아하는 무언가의 소멸이 두려워 불법 복제를 무릅쓰고 소장하려는 욕망은 역설적이게도 소멸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된다. 이렇게 각각의 사용자들(해적들)은 온갖 파일들의 사본을 가진 아키비스트가 된다. 그리고 언제나 모든 곳에서 그렇듯 “복수의 장소를 가진(multiply-sited) 아카이브는 단일한 장소를 가진(singly-sited) 아카이브만큼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7
4
Sebastian Lütgert, 「Together against the Mafia: Godard, Scorsese,
Bit Torrent」, 『Journal of the Moving Image』, 2009, 27p, 임의로
번역했음을 밝혀 둔다. 원문: “The copyright industries present us
with a world where every song you sing, every image you remember,
every cake you bake, every dancing step you make, will never be
yours, but a matter of “intellectual property”, for centuries to
come.”
5
아녜스 바르다,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
The Gleaners and I〉(2000).
6
애비게일 드 코스닉, 「해적질은 문화의 미래다: 붕괴 이후 미디어
보존에 대한 사변Piracy Is the Future of Culture: Speculating about Media
Preservation after Collapse」, 『Third Text』, Vol. 34, 2019, ‘아마도 독자’님의 티스토리.
블로그 번역문에서 재인용.
7
6번 각주와 같은 글.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는 그의 마지막 저서 『해적 계몽주의』8에서 국가 권력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자율적으로 조직된 초기 해적 사회를 조망하며 새로운 역사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세간의 인식과 달리 해적 사회는 포용적인 환경 속에서 온갖 문화가 뒤섞이며 가히 실험적일 정도로 평등했다. 이러한 해적 사회는 ‘리버탈리아(Libertalia)’라는 근대 초 마다가스카르의 해적 공동체로 대표되는데, ‘자유’를 의미하는 그 이름과 같이 이곳은 모든 구성원의 자유와 평등을 추구한 민주적이고 유연한 공동체였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엄격한 계층 구조 내에서 소외된 이들, 선원과 탈출 노예 및 자유를 추구하는 개인들이었고, 이들은 기성 질서의 변두리에서 억압적인 시스템에 가장 직접적으로 맞섰다. 리버탈리아 해적들의 주 표적은 유럽 제국이 식민지에서 탈취한 막대한 부로, 이를 약탈하여 재분배하는 과정에서 해적들은 착취를 통해 얻은 부의 축적의 정당성에 도전했다. 리버탈리아의 해적질은 그저 단순한 범죄 행위로 치부될 수 없는, 지배적 질서에 저항하는 하나의 복잡한 사회 현상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레이버에게 해적은 무법자이기보다는 복잡한 사회-정치적 실험에 참여한 주체들에 가깝다. 해적질로 얻은 전리품은 모든 구성원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었고 이 모든 과정이 민주적이고 집단적인 절차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때 그레이버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리버탈리아가 사적 경계 없이, 그 어떤 울타리도 장벽도 없이 모든 것이 평등하게 공유되었던 사회라는 점이다. 그레이버는 바로 이러한 환경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탄생했다고 주장하며, 계몽주의가 유럽의 유산이라는 기존의 역사관에 제동을 건다. 늘 유럽 중심적이고 지나치게 장황한 기존의 역사 서술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그레이버가 해적 사회에 주목한 것은 사건 기반의 역사가 아닌 인간의 삶, 그 꿈틀거리는 생명력을 기반으로 한 역사의 가능성과 그 가능성 속에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포착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기존 역사가 비추는 가시적 스펙트럼 너머의 세계인 마다가스카르에서 민주성이라는 새로운 의식이 태동할 수 있었던 근간에는 “인간의 자유와 창의성은 항상 권력의 무관심과 방치 속에서, 기성 질서의 구석에서 가장 번성해 왔다”9는 배경이 있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제도 저 바깥에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상속하는 동시대 해적의 디지털 아카이브에서 우리는 어쩌면 우리가 존재하는 새로운 방식-새로운 역사의식을 모색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레이버가 서술하는 주인을 두지 않고 타자의 영토를 가로지르고 탈취하는 해적들의 행위는 곧 새로운 가능성을 도모하는 몸짓들이다.
한편, 리버탈리아가 정말 실재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존재를 뒷받침하는 역사적 증거는 그리 많지 않으며 리버탈리아를 수 세기 동안 살아있는 장소로서 기능하도록 한 건 다름 아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리버탈리아는 ‘해적 유토피아’ 라는 일종의 신화로 취급되고는 한다. 그레이버는 해적 유토피아를 다시금 검토할 필요성을 제기하는데, 이는 리버탈리아의 허구적 차원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왜’ 신화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 분석하며, 신화를 향한 사람들의 갈망이 지시하는 바를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즉, 그레이버에게 해적 유토피아의 의의는 그것의 역사적 사실성이 아니라, 자유를 향한 인간의 열망이 시스템에 대항하여 대안적 미래를 상상하도록 한다는 것에 있다. 해적들의 위험천만한 모험은 우리 스스로를 다시 정의하며 우리의 발 아래를 재영토화할 수 있는 구조를 상상하고 재건할 수 있는 잠재력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들(과 그 행위들은)은 언제나 평등하며 또 언제나 재미있다. 그러므로 “배신할 수도, 화해할 수도 없을 때” 우리는 유쾌하고 즐거운 해적이 되어 가능성의 대양을 마음껏 누벼야 할 것이다. 미래를 발명10하기 위해서.
8
데이비드 그레이버, 『해적 계몽주의Pirate Enlightenment, or the Real Libertalia』, New York: Farrar, Strauss and Giroux(2023), 국내 미출간
서적으로, 본문에서 직접 인용한 문장은 이안 비콕(Ian Beacock)이
《뉴리퍼블릭》에 기고한 서평 「해적과 민주주의」(2023)에서 인용한
것이며, 국제시사 문예 매거진 《PADO》에 게시된 김동규 편집장의
번역문이 그 출처임을 밝혀둔다.
9
8번 각주와 같은 글, 그레이버를 인용하는 비콕을 재인용.
10
마크 피셔, 『K-펑크』, 리시올(2024), 23p에서 재인용.
글 김희재
예술사에서 미술이론을 공부하고 있다. 요즘은 가까운 나라들의 역사에
관심이 간다.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해야만 할지 찾는 겨울을 보낼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