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영의 연작소설 『대도시의 사랑법』의 중심인물, ‘영’이라 불리는 ‘나’는 “술을 사주기만 하면 해달라는 건 다 해주는 술버릇이 있”1으며 “하루가 멀다 하고 술에 취해 새로운 남자와”(25p) 입 맞추고 잠을 자는, 이태원 게이클럽의 네온사인과 전자 음악, 테킬라, 섹스를 즐기는 한편 진지한 연애는 피하는 인물이다. 대학 동기들이 자신을 두고 “아무리 봐도 게이 같다느니 이태원 어딜 가서 뭘 하고 논다느니”(13p) 하고 떠들어대도 무시하고 지나칠 뿐 분노하지 않는다. “항상 아무것도 모르는 편을 택하는 데 익숙한 나니까”(148p). 영에게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은 특별히 자랑스러운 것도 아니고, 싸워서 지켜내야 할 권리도 아니고 당연한 일상이자 삶의 한 부분이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퀴어 서사다. 누구나 자기 자신으로 태어났으므로 나로서 살아가야 하듯, 소설은 단지 영의 삶을 다룸으로써 퀴어 서사로 쓰였다. 비非퀴어를 포함해 모든 독자는 타자로서 퀴어를 관찰하는 것이 아닌 영이라는 사람의 로맨스 일대기를 함께하는 방식으로 이야기에 참여한다.
지난 10월 개봉한 이언희 감독의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은 소설 『대도시의 사랑법』 수록작 중 첫 번째 단편인 「재희」를 각색해 만들어졌다.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의 일부 내용, 영이 게이임을 부정하고 고쳐야 하는 병이라고 믿는 엄마와의 갈등이 주요한 에피소드로 삽입되었고, ‘영’은 ‘흥수’라는 인물로 각색되었다. 소설의 영은 게이라는 소문이 돌아도 어쩔 수 없다고 여기는데, 흥수에게는 정체성이 주변에 알려지는 것이 가장 큰 두려움이자 고민거리다. 흥수가 연인과 다투고 이별하는 이유 역시 커밍아웃과 관련되어 있다. 소설에서 ‘K3’라는 별명으로 칭해지는 영의 연인은 영화에서 ‘수호’라는 이름을 얻는다. 대학교 퀴어 인권 동아리에서 활동하고 퀴어 인권 단체에서 일하는 수호의 등장은 혐오에 직접적으로 저항하는 퀴어 인물을 스크린에 비추고자 하는 연출자의 의도로 해석된다.
영/흥수의 친구 재희는 외부의 규칙과 판단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 내면의 욕망에 충실한 인물이다. 자신의 끌림과 충동을 무시하지 않는,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결국에는 저지르는 사람. 그래서 재희는 가슴을 까고 포궁 모형을 훔치고 상처받을 것을 예감하지 못한 채 사랑하는 상대에게 온 마음을 바친다. 자신감 있는 여성을 미워하는 군중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재희의 강인함과 계산하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사랑하는 태도는 상처받기 두려워 관계 맺기를 꺼리는 영/흥수와 대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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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영, 『대도시의 사랑법』, 창비(2019), 10p. 이후 페이지만 표기.
영화는 소설에는 없는 재희의 절망하는 순간을 담는다. 낙태 수술을 앞두고 산부인과 의사에게 모욕당해도 무신경하고 발랄하던 재희가 비 오는 날 길거리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린다.
자신을 멸시하는 주위의 평가에 괴로워하며 “다들 왜 그렇게 쉽게 단정하는데. 정작 나는 나를 잘, 나도 날 잘 모르겠는데.”라고 외치는 재희의 대사는 영화의 결말에서 흥수가 재희의 결혼식 축가로 부르는 노래 가사 ‘You don’t know me 나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한심한 여자로 보는 네 시선이 웃겨’로 변주된다. 소설에서 영이 선곡한 핑클의 〈영원한 사랑〉이 재희와의 영원할 줄 알았던 우정에 안녕을 고하는 송별 무대라면, 미쓰에이의 〈Bad Girl Good Girl〉은 재희를 모함하던 이들을 향한 일침이자 마침내 엄마에게 커밍아웃한 뒤 자유로워진 흥수의 성장을 의미하는 선곡이다. 함께 춤추는 두 사람, 핸드폰 플래시를 켜서 호응하는 하객들, 흩날리는 콘페티 종이 등 콘서트 무대를 연상시키는 연출은 이 결혼식의 진정한 주인공이 재희와 흥수라는 점을 강조한다.
인물의 성격적 특징보다는 그들의 사회적 위치와 약자성으로 인해 겪게 되는 문제들에 집중한 영화의 각색 방향은 원작 소설과 비교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단일하고 직접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누군가에게 자기 존재를 인정해달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그저 말하고 싶어서 말해지는 이야기라는 소설의 덤덤함이 영화에 옮겨지지는 않았지만,영화의 목표는 그것을 옮기는 데 있지 않고 재희와 흥수의 삶을 더 많은 관객에게 보여주는 일이었던 것 같다.
“그 시절 우리는 서로를 통해 삶의 여러 이면들을 배웠다. 이를테면 재희는 나를 통해서 게이로 사는 건 때론 참으로 좆같다는 것을 배웠고, 나는 재희를 통해 여자로 사는 것도 만만찮게 거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45p)
재희와 영/흥수는 상대를 긍정하고 아끼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아웃사이더 정체성을 이해하고 돌본다. 그러나 여성의 약자성과 퀴어의 약자성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재희와 영/흥수는 서로에게 마냥 ‘무해’한 존재가 아니다. 재희가 룸메이트의 정체를 의심하는 남자 친구에게 “얘 게이야.”라고 아웃팅한 사건은 영/흥수에게 자신의 성 지향성이 원치 않게 밝혀진 상황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보다도 한순간에 자신을 ‘게이 친구’로 압축해 버린 재희, 나의 존엄 대신 남자 친구와의 관계 유지를 선택한 재희를 향한 배신감을 일으킨다. 영/흥수에게 재희는 남들이 말하듯 ‘미친년’도 아니고, ‘헤테로 여성 친구’도 아닌 ‘재희’이기에.
가장 큰 상처를 줄 만큼 서로를 가장 잘 알았던 재희와 영/흥수의 이십 대는 내내 겹친 채 흐른다. 그러나 재희의 결혼을 기점으로 이제 두 사람의 삶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에서 누군가가 고유한 존재로 인식되는 것, 그와 함께 겪은 한 시절을 그의 이름으로 기억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한다면, (성애적 끌림과 별개로) 영/흥수는 재희를 사랑했다. 재희의 결혼은 영/흥수에게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로 다가온다. 언제나 둘이 나누어 먹던 냉동 블루베리 봉지를 뒤집었을 때, 밥공기에 툭 하고 떨어진 보라색 얼음 조각을 바라보며 영이 느낀 감정은 재희와 헤어져 혼자됨에 대한 아쉬움, 불안, 슬픈 예감 그리고 앞으로는 사랑하는 대상을 거쳐서가 아닌 스스로 나를 알고 견뎌야 한다는 사실에 느끼는 막막함이었을 것이다. 물론 지나가 버린 이십 대도 우정도 덧없지는 않다. “긴 미래를 상상”(55p)하는 관계를 믿게 된 영이 있고 나로서 살기로 결심한 흥수가 있고 재희가 준 용기가 그들에게 있다.
“모든 아름다움이라고 명명되는 시절이 찰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르쳐준 재희는, 이제 이곳에 없다.”(68p)
혼자 남은 방에서 영/흥수는 소설을 쓴다. 냉동실에 빨간색 말보로 상자와 파란색 블루베리 봉지가 나란히 채워져 있던 지난 시절을, 냉동 블루베리를 먹느라 손끝이 보랏빛으로 물들듯이 서로에게 묻어나던 일상을 이야기로 적는다. 이 자전적 글쓰기는 영/흥수가 재희와의 선명한 기억을 흐릿한 추억이 되도록 천천히 지워가는 일이자 그 시간을 지나 현재에 다다른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행위다. 블루베리를 집어 먹은 흔적이 남은 자신의 지문을 핥는 것처럼.
“내가 나인 채로 충분하다는 것을 알려준” 재희가 해주었던 “네가 너인 게 어떻게 네 약점이 돼.”라는 말은 분명 흥수에게 힘이 되었다. 내가 나인 건 나의 약점이 될 수 없어야 한다. 하지만 『대도시의 사랑법』 중 「재희」의 뒤에 수록된 나머지 단편들에서 영에게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은 원치 않는 정신병동 입원을 당하는 이유가 되고(「우럭 한 점 우주의 맛」), 나의 ‘카일리’2는 내가 사랑하는 연인과 이별하는 원인이 된다(「대도시의 사랑법」). 그리고 나의 진심 어린 사랑은 상대와의 관계에서 나를 을의 입장으로 만든다. 더 많이 사랑할수록 더 많이 상처받는다고 느끼면서도 사랑하고 있다는 자각은 내가 사랑 없이는 못 사는 사람인 것을 부정하고 싶은 기분, 내가 나인 것을 견디기 어려운 기분으로 이어진다. 그렇지만 게이라는 정체성도 HIV도 다른 가치나 자존심보다 사랑하는 상대를 우선순위로 여기는 성향도 내가 가진 것이자 나의 일부, 곧 나이기 때문에 내가 나인 것은 어쩔 수 없이 나의 가장 크고 분명한 약점이다. 나는 사랑 앞에서 약해진다.
하고 싶은 건 다 해볼 거라서 하고 싶은 많은 것 중 한 가지인 사랑에도 성실했던 재희와 달리, 영에게 사랑하고 사랑받는 일은 유일하게 하고 싶은 단 한 가지, 더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할 수 있는 게 사랑뿐이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작가라는 직업조차 “잠이 잘 오지 않아 뭐라도 할 일이 필요했고, 밤새 떠들고 놀던 사람이 없어져 버려” 소설을 써서 “별 기대도 없이” 공모전에 냈다가 “덜컥 당선되”어 얻었고, “대단한 만족감이나 성취감을 느끼지는 못했다”(54p)고 말하는 영은 다른 취미나 학업 및 직업적 성취에는 관심이 없다. 영의 모든 사건 사고와 감정 기복은 오로지 사랑으로 인해 발생한다.
『대도시의 사랑법』에 수록된 네 편의 로맨스 소설에서 사랑이라는 주제가 낭만적으로만 다뤄지는 것은 아니다. 화자인 영과 작가 박상영은 모든 단편에서 “사랑은 정말 아름다운 것인가.”(159p) 고민한다. 유쾌한 분위기로 전개되는 로맨스 코미디 「재희」에서 영의 연인이던 K3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집착이 사랑이 아니라면 난 한 번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55p)라는 그의 마지막 문자는 사랑의 허무하고 찜찜하고 파괴적인 속성을 암시한다. 『대도시의 사랑법』 마지막 장까지 ‘사랑은 아름답다’라는 확신에 찬 문장은 한 줄도 쓰이지 않는다. 다만 영은 매 단편에서 자신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재차 확인한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더 적극적으로 사랑을 원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사랑을 한다. 아름답지 않더라도, 영원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사랑은 나를 취약하게 하지만, 내가 이곳 대도시에서 살아남는 방법이자 살아갈 용기를 내는 이유 또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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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의 사랑법」에서 영은 HIV(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를 자신이
즐겨듣던 가수의 이름에서 따온 별칭인 ‘카일리’라고 칭한다.
글 양준우
예술사 서사창작과. 절대로 거짓말을 못 하게 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