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그림 한 장에서 시작하자. 기산 김준근은 19세기 후반, 개항 도시였던 인천, 원산,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한 풍속화가다. 공방 제작 방식을 통해 대량 생산 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김준근의 그림은 풍속화면서 수출화(export painting)다. 이 그림의 좌측에는 “조선원산항김준근”이라는 글자가 한자로 씌어있다. 조선의 원산항에서 김준근이 제작했다는 뜻이다. 여기서 조선을 명기한 이유는 화첩을 내수용이 아니라 외수용으로 판매하기 위해 생산했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이 그림은 화풍과 그림 속 인물들이 보여주는 특유의 풍습 및 의복을 통해 이미 ‘조선’임을 보여주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한술 더 떠 이것은 조선이요, 하고 강조한다.
그의 그림에서 우리는 ‘조선’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분열된 채 등장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에 대한 조선의 기입은 타자 앞에서 타자화된 스스로를 인식할 때 강고해졌다. 김준근은 외국인이 많이 오가던 개항장에서, 주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수많은 그림을 팔았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인 조선 회화의 주제나 소재가 되지 못한 장례식이나 매질, 아이들의 새 사냥 같은 다양한 일들이 재현의 대상으로 선택됐다. 그가 그려낸 풍경은 타민족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식민주의적 인류학의 시선에 가깝다. 김준근이 오늘날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을 내재화했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다. 실제로 당대 서구의 인류학자들이 김준근의 그림을 연구 자료로 활용했다. ‘조선’ 출처를 달고 외국인에게 팔려나갔던 김준근의 그림은 오늘날 세계 각지의 뮤지엄에서, 많게는 수백 장씩 발견된다. 이제 한국의 뮤지엄은 외국으로부터 김준근의 그림을 구입해 모으고 있다. 조선 후기 평민들의 일상적 삶을 연구하고, 역사화하기 위해서 말이다. 분열된 조선은 다시 온전한 조선을 복원하기 위해 활용된다.
그림 속에 적힌 조선이라는 글자를 보다 보면, 몇 년 전부터 부쩍 여기저기에 붙어온 “K-”가 떠오른다. ‘K-’ 또한, K의 바깥을 상정한 결과로 도출된 자의식 과잉의 용어로, 분열을 포함하고 있다. 이렇게 성장한(성장할) 한국, 뭐든지 해낼 수 있는 ‘우리 민족’을 강조하는 세계관은 박정희부터 윤석열 정권까지, 오랫동안 존속해 왔다. 민족주의, 반공주의, 탈식민주의, 자유시장 자본주의, ‘선진국’에 대한 콤플렉스와 ‘후진국’에 대한 우월감이 뒤섞여가면서 말이다. 민족주의의 맥락에서 보면, K-로 많은 것을 명명하는 것은 민족을 기준으로 ‘우리’라는 공동체를 만들어내고 서로를 동질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만드는 메커니즘이다. 그렇기에 한국 바깥에서 혹은 한국인이 아닌 사람들에게서 향유되는 음식이나 게임, 영화 등이라고 해도 뭔가 한국적이라고 판단되면, 부리나케 달려가 ‘우리’의 것이라는 라벨을 붙일 수 있는 것이다. K-는 동질성과 이질성의 이분법에 바탕을 두고, 세상 속에서 자신과 동질적인 부분을 끊임없이 발견해 낸다.
이는 이미 몇 년 전부터 ‘두유노(Do you know?)’라는 밈으로 자조 되어왔다. 한국인이 외국인을 만나면 늘 ‘두 유 노 김치? BTS? 손흥민?’을 묻는다는 것이다. 두유노 밈이 조롱하는 대상은 외국인(주로 백인으로 상정되는)이 한국의 명물을 알고 있다는 답을 듣고 뿌듯해하며 돌아서는 한국인의 상이다. 한국(인)은 국제적이고 글로벌한 한국을 강조하다가 지나치게 사대주의적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K-는 한국의 부끄럽거나 우스꽝스러움을 조롱하는 데에 갖다 붙여진다. K-정치판, K-오지랖, K-집값 등.
이렇게 몇 년 사이 부쩍 ‘K-’라는 수식어가 여기저기에 붙는 현상은 과시나 조롱의 수사 이상으로 좀 더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충대충 갖다 붙여지는 것 같은 K-는 까다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한국의 문화예술계를 지칭하는 ‘K-Arts’의 영역에서 이 문제를 파헤쳐 보자. 문화체육관광부는 1990년대 이래로 ‘한류’에 매진해왔다. 세계 각국을 대상으로 한국의 인식 조사를 실시하고, 한국 하면 떠오르는 키워드가 긍정적 이미지로 채워지기를 노려왔다.1 6.25 전쟁이나 분단 상황 같은 부정적 이미지는 닦아내고 그 위를 화려한 케이팝과 케이푸드, 한류 드라마나 우수한 한글로 덮고 싶어 했다. 국가가 주도하는 인터내셔널 K-는 반짝반짝하고 우월하다.
헌데 그와 동시에 ‘한국적’이라는 말은 한 번에 엄청나게 많은 것을 지칭하게 되었다. 여기저기에 남발되는 K-의 주변에는 늘 ‘한국’과 ‘한국성’에 대한 예민한 판단이 있다. 매끈하고 강인한 ’한국‘을 강타한 최근의 가장 강력했던 단어는 ‘한남’이리라. 이 단어는 그저 ‘한국 남자’라는 일반적인 명사를 줄인 것인데도, 그 자체로 한국의 가부장제와 여성혐오를 일순간에 폭로하는 기표가 되었다. 또 한편으로 한국은 ‘서울 공화국’이라고도 지칭되고, ‘입시 공화국’과 동의어가 되곤 한다. 먹고살기 힘든 ‘한국’은 K-에서 ‘헬조선’으로 급락한다. 해결책은 ‘탈조선’으로 제시된다. 각종 눈부신 K-를 두르고 있는 한국은, 바로 그 한국을 뜨는 것만이 한국인의 살길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포함한다. 늘 어디선가, 누군가는 “한국에 들어가지 마라, 한국이 제일 나쁜 데야.”2라고 말한다. 한 교수는 언론 인터뷰에서 한국의 뿌리 깊은 인종차별을 ‘K-인종주의’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느끼듯, K-에는 분명 의심되는 구석이 있다. 이때의 한국, 조선, 서울, K-는 한국 안에서 터져 나오는 파열음을 포착하는 단어로 사용된다. K-는 하나가 아닌 다수로서의 한국을 펼쳐내는 데에도 가 붙을 수 있다.
그러니, 우수한 K-문화예술을 위해 홍보되는 작품도 그 안에 비참하고 더러운 K-를 포함하기도 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성난 사람들(비프)〉(2023)는 미국의 주류 사회에 온전히 편입하지 못한 존재들을 그린다. 〈성난 사람들〉은 꾸물꾸물한 콤플렉스와 분노, 그리고 실패를 안고 살아가는 미국계 한국인 혹은 한국계 미국인을 다룸으로써 K-가 됐다. 미셸 자우너의 『H마트에서 울다』(문학동네, 2022)는 오해와 사랑으로 끈적끈적한, 잔뜩 엉킨 한국인 어머니와 그 친척들과의 관계를 풀어놓은 에세이다. 『H마트에서 울다』는 아마존 베스트셀러, 세계를 울린 한국계 미국인의 이야기라며 감동적인 K-가 됐다. 그러나 자우너는 한국인 어머니와 자신이 서로에게 겨누었던 몰이해 속으로 파고든다. 대장암 투병을 하는 어머니가 영어를 유창하게 말하기 어려워졌을 정도로 쇠약해지자 한국어의 장벽 앞에서 고통받는다. 어머니가 그나마 넘기는 한식을 직접 만들지 못해서 어머니와 딸 사이에 끼어든 이주 한인 아주머니에게 의존해야 하는 그는 반쪽짜리 K-의 파편이다. 자우너의 에세이는 미국에서는 다양한 이주민들의 문화가 서로 갈등하고 조화하는 ‘미국적’인 서사로, 한국에서는 한국 특유의 정과 애틋함, 모성과 효녀성이 드러난 한국적인 서사로 인식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H마트에서 울다』는 K-인가, A-(아메리카)인가?
미국에 이주한 한국인 부모 밑에서 자라난 캐시 박 홍은 자신의 책 『마이너 필링스』(마티, 2021)에서 이렇게 쓴다.
아버지가 내 룸메이트의 아버지에게 악수를 청하자 그가 우리 아버지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아버지가 한국이라고 하자, 룸메이트 아버지가 재빨리 자기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고 응답했다.
아버지는 경직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중략)
“왜 그렇게 무례하세요?” 내가 물었다. “왜 그 사람 말에 아무 반응도 안 하셨어요?”
(중략)
“네 룸메이트 아버지가 그 전쟁에 나갔다고 내가 고맙다고 해야 돼?” 아버지가 마침내 불끈 화를 냈다. “너는 내가 그러기를 바란 거냐?” (48p)
한국은 너무나 많다. 6.25전쟁 참전의 역사를 인삿말로 건넬 수 있는 한국이 있고, 거기에 결코 반갑다거나 고맙다고 말할 수 없는 한국이 있다. 어느 날 캐시는 한국계 미국인이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줄 것이라고 생각해 한국 성을 가진 심리 치료사를 찾아가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치료사 앞에서 펑펑 울고 난 후, 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치유된 기분을 느끼고 다음 상담 예약을 끈질기게 시도한다. 그러나 치료사로부터 이유를 알 수 없이 모욕적으로 거절당한다. 양육자, 그리고 한국계 미국인 심리 치료사를 통해, 캐시는 자신과 유사한 혹은 ‘동일한 정체성’이라고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단절을 마주한다. 자우너와 캐시의 문학 속에서, 한국은 내셔널national한 것이 아니라 인터내셔널inter-national, 즉 민족, 혹은 국가nation들 사이inter에서 부유하고 끼이는 것으로 드러난다.
1
최광식, 『한류로드』, 나남(2013), 34~35p. 이 책은 전
문화체육관광부장관 (2011~2013년 재임)이 쓴 대중서로, 국가주도적
한류 홍보의 입장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저자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대한민국의 이미지 설문조사에서, 북한과 6.25 전쟁을 떠올리는 답변이
일부 도출되자 이에 대해 “국가 브랜드 제고에…북한과 한국전쟁 같은
부정적 요소의 영향도 만만치 않”다며 우려를 표했다.
2
임흥순, 〈비념〉(2013) 중에서. 제주 4.3 속에서 일본으로 도망쳐
간신히 살아남은 생존자가 다큐멘터리 속에서 한 말이다.
이런 작품들은 ‘인터내셔널 코리아’를 향한 국가의 내셔널리즘적 집착과 묘하게 조응한다. K-의 바운더리 안에 속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동시에 K- 안에 균열을 가하고 틈을 만든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들은 K-라는 범주가 포착하지 못하는 다수the multiple를 펼친다. 알랭 바디우는 『존재와 사건』(새물결, 2013)에서, 존재가 언제나 개별적이고 비일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진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세상은 존재들을 라벨링해 일관화하고 거대한 분류 체계 안에 집어넣는다. 이를 바디우는 일자화(一者化)라고 부른다.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정확히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는 파악할 수 없는 유적 다수(The multiple)가 존재다. 그러한 존재는 ‘하나로-셈하기’ 작용을 통해 일자(The one)가 되어야만 재현된다. 즉 존재가 재현될 때, 존재는 진정한 의미에서는 몰이해 속에 비가시화되는 것이다. 재현이란 존재의 ‘알 수 없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 존재를 섣불리 명명해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이라는 단어가 표상하는 일상적인 의미를 떠올려 보자. 한국에서 익숙한 신체와 사고방식, 언어, 혈통이나 한반도라는 지역 등을 공유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 단어는 모든 한국인이 본질적으로 동일한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다고 일갈할 뿐, 그 속의 개개인 사이에 놓인 차이와 역동을 포착하지 않는다. 게다가 ‘한국인’은 ‘한국’의 모든 것으로 인식되면서, 그 범주 바깥의 존재를 비가시화한다. ‘한국인’은 한반도에 살며 한국의 경제 체제 속에서 활동하고 한국말을 구사하는 결혼 이주민을 포함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디우가 말하는 일자화의 예시다. 대상을 집단으로 분류하고, 그 집단 안에 들어맞지 않는 이들은 보이지 않게 만들거나 그 외부의 다른 집단(‘외국인’)으로 전부 밀어 넣어 버리는 작용 말이다. 일자화는 존재의 다수성을 억압함으로써, 세상이 결코 환원되지 않는 다수로 이루어져있다는 진리에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허나 우리가 K-라는 기표에 비웃음을 더하듯, 일자화의 통제가 늘 완전한 것은 아니다. 바디우는 ‘사건’이 일어나면 일시적으로 진리가 드러나며, 세상의 구조가 의심받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바디우에게 ‘사건’은 말끔하게 마감된 듯 보이는 분류 체계 내부의 틈을 비집고 발생하는 것이다. 즉, 사건은 분류되거나 명명될 수 없는 존재가 그 자체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순간을 만든다. 홍석천이 실천한 한국 연예계 최초의 커밍아웃이나 2012년 이자스민의 국회의원 비례대표 당선, 조남주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베스트셀러에 등극한 순간, 2017년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폭력 폭로에서 시작된 미투 운동이 바로 사건의 예시다. 이 사건들은 모두 ‘단일민족’으로 이루어진 건강하고 안전한 한국이라는 이념을 파괴한다. 더불어 그간 한국 사회의 분류 체계 밑에서 자신의 존재를 깨달을 수 없었거나, 자신을 변형해야 했거나, 억압당했던 존재들(한국 사회의 성소수자, 인종적 소수자, 여성혐오의 산증인, 성폭력 피해자)을 가시화한다. 이전의 체계에서는 식별되지 않던 존재들을 드러내는 이러한 사건들은 그 사건에 충실하게 임하여 직접 실천하는 주체들을 탄생시킨다. 뒤이어 커밍아웃하는 다른 사람이 등장하고, 투표권이 없는 이주민도 정치적 목소리를 내고, 페미니스트가 등장하며, 이후로도 더 많은 증언이 이어진다.
그 실천을 이어가는 주체들 중 하나가 예술품이다. 위에서 소개한 작업들이 재현과 상상을 통해 K- 뒤편의 다수를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작품 속에서는 멋지고 강한, 성장하는 한국(인)이 아니라 한국으로 인해 깨진 한국인. 한국을 그리워하는 동시에 열등한 것으로 보면서 스스로 갈등하는 존재. 그러니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한국’이라는 단어 앞에서 떠올리지 않는 존재들. 떠오르지 않는다는 점에서만 그것이 억압받는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는, 알 수 없는 무언가. 그것들이 진리로서 기존의 체계를 흩뜨리며 나타난다. 가령, 『작별하지 않는다』와 『소년이 온다』를 통해 제주 4.3과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이야기한 한강은 최근 노벨문학상을 수상해 한국 문학의 수준을 보여주는 기표처럼 취급되었지만, 사실 그의 작품들은 ‘멋진 한국’을 해체한다. 한국(국가폭력)과 한국인을 동일하게 간주하지 않고, 그 폭력 속에 놓인 한국인과 한국인을 분리한다. 이 안에 똑같은 ‘한민족’은 없다. 오로지 그러한 한에서만 그것은 한국적이다. 아니, 그의 작품은 결국 한국의 외연을 넘어선다. 한강은 2019년부터 이어져 온 홍콩 민주화 운동이나 2021년의 미얀마 군부 쿠데타를 끌어들인다.
캐시는 스스로를 한국인으로도, 미국인으로도, 아시안으로도 동일시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챈다. “작가 제프 창은 ‘나는 우리를 사랑하고 싶다’라고 적으면서, 하지만 ‘우리’가 누구인지 몰라서 그러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나도 그 불확실함에 동의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무엇인가?”(50p) 자신이 불확실한 다수라는 인식 속에서, 그는 자신의 정체를 단언하지 않는다. ‘마이너 필링스minor feelings’ 즉 소수자 감정이라는 표현을 통해 자신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다른 소수자들과 자신을 연결할 뿐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작품들은 한국 작가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혹은 한국에 대한 작품이라는 이유로 동질성의 범주인 K-로 계속해서 편입될지 모르지만, 이것들은 K-라는 범주로 들어갈 때 그것을 파열시킨다. 한국을 무어라 지칭할 수 없게 만드는 작용, 한국을 파괴하는 것으로서의 한국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들은 인터-내셔널하다.
그러나 이 글이 소개한 작품들이 그렇듯, 아직 K-라는 수사는 서구권이나 일본에서 지내는 한국(계)인에 한정되는 경향이 있다. 한국 안의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 앞에선 이 흔한 수식어가 머뭇거린다. 소위 불법 체류자, 결혼 이주민, 이주 노동자, 난민, 그리고 남한이 아닌 다른 ‘K’ 등의 다수를 K-는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K-가 분열을 품고 있다면, 한국이라 불리는 곳에서 ‘한국이 아닌 것’들이 겪는 분열은 그들 각각의 분열이기도 하지만 또한 언제나 K-의 분열이다.
파리 코뮌 시기에 쓰인 프랑스 인터내셔널가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Nous ne sommes rien, soyons tout
아무것도 아니었던 우리가 전부가 되리라
“아무것도 아니었던 우리”는 역사적으로 보면 착취에 신음했던 19세기 노동자다. 그런데 바디우를 빌리면, 이 가사가 예견하는 것은 기존의 구조에서 아무것도 아닌 무언가가 다른 모든 아무것도 아닌 것들로 연쇄되는 진리의 열림이다. 진리는 그 틈으로 ‘다수 속의 다수’를 계속해서 받아들이며 무한히 지속된다. 나는 그런 것을 ‘K-’에 기대하고, 요구하게 된다
글 김선진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사에서 미술이론과 방송영상을 공부하고 있다.
예술사회학과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사를 가지고 『K-Arts』에 글을
쓰고 있다. 12월 3일 밤, 국회 앞에서 나는 입김을 뿜어내는 어떤
한국들을 목격했다. 이 글을 완고한 후였다. 역사를 외면한 듯한 글이
나와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