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2024 WINTER52
사진 김경수

이론과 실기의 이분법을 넘어
이성곤

비평가와 마주 앉아 작품이 아닌, 이론적 베이스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그 사람 자체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는 흔치 않다. 주로 인터뷰어로서 창작자에게 질문을 던지던 연극학과 이성곤 교수가 이번에는 반대편에 앉아 질문에 응답했다. 연극원 4기 출신이자 예술사, 전문사 과정을 모두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밟은 그에게 연극원 30주년은 특별하게 다가올 터, 이곳에서 그가 꿈을 키우고 실천해 온 시간에 관해 들었다.

연극학도 시절

1990년대 중반, 이성곤 교수는 한 권의 책 혹은 한 명의 사람이 과연 내 인생을 바꿀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회의적인 청년이었다. 하지만 독일의 극작가이자 연출가였던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만난 후 그의 삶은 완전히 바뀌고 만다. 빼어난 창작자이자 이론가였던 브레히트의 『서사극 이론』을 접한 뒤 연극을 통해 조금 더 나은 세상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삶을 내던지고 그는 연극 이론을 공부하기 위해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입학 당시에는 ‘연극학과’라는 독립된 학과조차 존재하지 않을 때였다.

“저는 석관동이라는 이 동네가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 자그마한 학교가 석관동이라고 하는 작은 공동체를 조금씩 변화시켜 나가는 모습을 직접 봤거든요. 신축 교사가 지어지기 전, 지금은 허물어진 구 안기부 건물이 정문 가까이에 있었을 때는 솔밭을 중심으로 다양한 예술 활동이 펼쳐졌고, 동네 주민들도 거리낌 없이 학교에 와서 같이 어울리고 즐기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이런 활동은 주민들에게 학교에 대한 이해와 동시에 예술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일깨웠고, 그 속에서 우리도 바뀌어 가는 모습을 체험했습니다.”

연극학과는 극작과 내 이론전공으로 출발하여 1998년 극작과로부터 독립하였고, 2000년도에 연극학과라는 명칭을 갖추며 지금의 모양새가 되었다. 연극학, 연극 비평, 드라마터지 총 3개의 전공으로 구성된 연극학과는 순수 학문으로서 연극사를 연구하거나 현장과 이론을 연결하는 실천적 학문을 공부하는 곳이다. 이성곤 교수는 학교 과정을 통해 많은 실기와 훈련을 경험하는 한편, 연극사에도 관심을 두고 공부했다. 전문사 이후 일본 유학을 하며 연구를 이어간 계기를 물었다.

“전문사 시절 논문 주제로 잡았던 1990년대 이후 북한 연극을 연구하며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남북의 연극사 서술이 극명하게 갈리는 점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왜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역사마저도 재편집되고 확증 편향적으로 연극사가 서술되는지 궁금했죠. 이데올로기와 전쟁이 당대 연극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희곡에는 전쟁의 내면화 양상이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자연스럽게 일본 연극으로 관심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어요. 1945년 일본은 패전을 경험했고, 이후 한국전쟁에 간접적으로 관여하면서 경제성장을 이룩하기도 했죠. 패전 이후의 일본 연극이 궁금했습니다.”

일본 연극에 관하여

흔히들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말하는 일본의 연극계는 어떤 지형을 그리고 있을까. 이성곤 교수에 따르면, 일본의 근현대 연극이 형성, 구축되어 오는 과정에서 일방적으로 서구 연극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일본식 연극에 대한 욕구가 강했고, 이를 고수하며 자기만의 연극적 시스템을 만들어 나간 역사가 100년 이상 되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연극적 토대가 탄탄하고 무엇보다 연극을 관람하는 문화가 많이 개발되어 있다고 한다. 한국 연극의 관객은 대다수가 지인 혹은 연극 관계자인 반면, 일본의 경우 평일 낮 2시 공연도 매진될 정도로 관객 동원이 활발하고, 중장년 이상의 관객층이 두껍다는 특징을 지닌다. 일본 연극계의 또 다른 특징은 문화예술에 대한 국가 지원금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대개 자비로 창작하고 티켓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경향이 연극계 시스템에 반영되어 공연의 형식적 특징으로 드러난다. “관객들의 요구에 맞는 작품을 많이 만들게 돼요. 저는 장단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 무대를 제작하지 않고 미니멀한 배경에서 배우의 신체를 중심으로 피지컬한 공연을 꾸리는 경향이 많습니다.”

2017 항저우 베세토페스티벌 심포지엄, 이성곤 제공

이성곤 교수는 작년부터 한일연극교류협의회 회장을 맡으며, 20년 동안 이어진 양국의 교류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 한일연극 교류를 활성화하자는 취지로 2002년 발족한 한일연극교류협의회는 지난 20여 년간 격년으로 진행되었던 낭독 공연의 형태로 교류를 이어왔다. 한국에서는 일본 극작가들의 희곡을 검토, 번역, 출판, 소개하였고, 일한연극교류협의회는 한국 희곡을 일본에 소개하였다. 이성곤 교수는 하나의 특정 사업을 통해서만 교류한다는 것이 오늘날의 욕구와 요구를 반영하지 못하는 면이 있다고 여겨, 이를 유지하면서 작은 사업들을 함께 추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것의 일환으로 올해 ‘극작 공방’이라는 프로그램이 처음 시도되었다. 극작가 이와이 히데토(岩井秀人)를 초청하여 워크숍을 진행했고, 한국의 젊은 극작가 5인이 15분 내외의 단막극을 창작했다. 이와이 히데토가 선정한 극작 주제는 ‘내가 경험했던 가장 끔찍했던 기억’이었다.

“이와이 히데토는 자기가 경험했던 트라우마를 작품으로 만드는 대표적인 작가입니다. 2012년 초연한 〈히키코모리 밖으로 나왔어ヒッキー・ソトニデテミターノ〉라는 작품이 있었죠. 본인이 히키코모리였습니다. 2008년에 처음 제작한 〈손て〉이라는 작품은 아버지로부터 가정폭력을 당했던 기억을 다루고요. 일본 작가들의 특징은 극단적일 만큼 주관적인 경험을 자기 객관화 하는 데 능숙하다는 것입니다. 자기 몰입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주제가 흥미로웠고, 자기 객관화가 비교적 잘 되어 있는 작가의 지도로 한국 작가들에게서 어떤 새로운 작품이 나올지 기대됐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굉장히 재미있는 작품이 나왔고, 나중에 희곡집으로 출간할 계획도 가지고 있습니다.”

비평의 역할

연극학도 시절부터 비평에 관심을 두고 훈련을 거쳐온 이성곤 교수는 비평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비평은 대화이고 소통이기 때문에 반드시 어떤 주제가 있어야 합니다. 특정 주제를 가지고 말을 걸어보고 싶고, 자그마한 문제의식 혹은 결론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을 품게 하는 공연이 있습니다. 그런 공연을 중심으로 글을 쓰게 됩니다.” 리뷰란 말 그대로 ‘다시-본다’라는 의미로서 공연을 나만의 관점에서 재구성하여 주관적인 감상과 판단을 담아내는 종류의 글쓰기라면, 비평은 때론 공연과 맞서기도 하고 창작자와 논쟁을 벌이기도 하는 등 치열한 과정을 통해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담론이나 맥락을 제기하는 글쓰기라고 이성곤 교수는 말한다.

평론을 쓸 때 독자를 누구로 상정하고 쓰는지 물었다. 이성곤 교수는 어떤 면에서는 연극 비평의 가장 진지한 독자는 창작자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창작한 작품에 대한 리뷰나 비평을 가장 갈망하고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비평가가 창작자를 향해 비평문을 쓰는 건 아니다. 이성곤 교수는 넓은 의미에서 창작자 또한 한 명의 관객이고, 예술학교의 목표 또한 일차적으로는 훌륭한 관객을 키워내는 것이라 설명한다. 훌륭한 안목을 지닌 관객이 되는 일은 쉽지 않으며, 관객으로서의 안목을 키울 때 창작자로서 갖춰야 할 소양 또한 자연히 습득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창작자나 관객을 특별히 구분하여 비평문을 쓰기보다는 창작자를 포함한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관객을 대상으로 글을 쓴다고 한다.

“창작자를 의식하고 비평문을 쓰다 보면 가치 판단보다는 처방을 하게 돼요. 왜 저 장면에서 차를 마시지, 저기는 와인을 마셔야 불길한 미래에 대한 복선이 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비평가가 창작자에게 처방을 내리고 충고하는 글쓰기를 하게 될 가능성이 크거든요. 지양해야 하는 거죠. 비평가는 작품의 스태프나 창작자가 아니에요. 창작자 입장에서 작품을 따라가며 분석하는 게 아니라 공연이 나에게 말을 걸었던 부분에 대해 내 나름의 방식으로 응답하는 것이 비평적 글쓰기라고 생각합니다.”

평론가의 역할에 관해 이야기하며 그는 ‘엄격함’이라는 덕목을 강조했다. 특히 창작자를 직접 초청하는 ‘공이모’(공연과이론을위한모임)의 월례 비평 같은 경우에는 평론가가 자기 엄격성을 스스로 증명하며 대화하지 않으면, 창작자 입장에서 비평의 행위를 개인적인 공격이나 폄하로 받아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평가가 그토록 많은 공연을 보는 이유는 바로 비평 행위의 자격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비평가는 비평 행위를 위한 자격을 갖추기 위해 노력을 들여야만 하고 이를 바탕으로 설득의 논리를 구축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그때에야 창작자 또한 귀 기울여 비평가의 말을 들을 수 있고 진정한 대화가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18 아시아연극학컨퍼런스, 상해희극학원 참가시 학생들과, 이성곤 제공

드라마투르그로서의 활동

연극 이론을 공부한 사람들이 다수 진출하는 분야 중 하나인 드라마투르그(Dramaturg)는 용어가 제대로 통일되지 않은 상황이지만 현장에서 중요성은 점차 높아지고 있다. 이성곤 교수는 드라마투르그, 드라마터지, 혹은 드라마터그라 지칭되는 과업의 역사적 유래부터 설명하였다.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이 1766년 건립된 독일의 국민극장에서 예술감독 및 상근 드라마투르그로 활동하면서 드라마투르그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레싱은 연습을 지켜보며 느낀 점과 자신의 연극론을 소식지로 발간했는데 이는 『함부르크 드라마투르기』라는 책으로 출판되었고, 상대적으로 낙후했던 독일연극이 이론적으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된다. 한편, 1920년대에 극장의 드라마투르그로 활동한 브레히트는 실천적으로 드라마투르그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작품을 쓰고 연출하거나 제작하는 과정에 영향을 끼치며 레싱과는 다른 입지를 만들어 낸다. 이 두 가지 전통이 현재 한국에도 모두 수용된 상황이라고 한다.

“드라마투르그의 역할은 현재 다양하게 구축되어 있습니다. 이론적 근거나 맥락을 만들어 내는 데 기여하는 드라마투르그가 있는 한편, 실제로 프로덕션의 제반 과정에 참여하며 창작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는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부 비평가의 역할도 있습니다. 공연에서 최초로 설정했던 방향성에 맞게 제작이 이뤄지고 있는지 냉철한 시선으로 관찰해 줄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공연 이후 관객의 피드백을 종합하여 향후 창작을 위한 밑거름을 마련하는 일을 하기도 하는데 결국 이 모두를 할 수는 없기에 점차 역할이 분화되는 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성곤 교수는 드라마터그로서 작업에 참여하는 경우,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작품의 창작 과정에 관여하는 편이라고 한다. 창작극의 경우, 초고에 대한 최초의 독자가 되어 작가와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작가가 연출을 겸할 시 연출 콘셉트를 함께 의논하기도 한다. 프로덕션이 꾸려지고 연습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는 일정한 텀을 두고 연습 현장을 방문해, 매일 집중하며 연습하는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발견하고 연출과 소통하는 역할을 주로 맡았다.

그가 최근 참여했던 작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은 하수민이 쓰고 연출한 〈새들의 무덤〉이다. 올해 제45회 서울연극제 대상을 받은 이 작품은 초연, 재연을 거쳐 올해가 세 번째 무대였다. 2010년대 중반, 하수민 연출이 올린 연극 〈2017애국가-함께함에 대한 하나의 공식〉에 관한 이성곤 교수의 짧은 평론을 계기로 두 사람은 함께 작업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새들의 무덤〉 작업은 재연, 3연을 하는 과정에서 텍스트 자체가 바뀌기도 하고, 극장에 따라 연출 콘셉트와 무대를 새롭게 시도하는 등 초연을 조금 발전시키는 것을 넘어 새로운 창작으로서의 재공연이 되었다. 첫 공연 때의 콘셉트나 방향성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새롭게 시도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임에도 하수민 연출은 드라마터그의 제안을 적극 수용하며 좋은 결과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성곤 교수는 이를 통해 한 예술가와 오랜 시간 고민과 경험을 공유하며 프로덕션에 기여할 수 있는 드라마터그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공연 〈새들의 무덤〉 공연 후 관객과의 대화

재일코리안 극단 연구

이성곤 교수는 평생의 연구 주제로 재일코리안 극단 연구를 꼽았다. 유미리, 정의신 등 재일코리안 극작가의 희곡은 종종 한국에 번역, 소개되고 공연으로 올라가기도 했던 반면, 재일코리안 극단에 관한 연구는 거의 없는 점을 그는 의아하게 여겼다. “제가 유학했던 오사카가 있는 간사이 지역은 특히 재일코리안이 다수 모여있는 곳이고, 극단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극단 달오름, 극단 돌, 재작년에 해산한 극단 메이, 그리고 김만리 선생님이 이끄는 극단 타이헨이 있습니다. 김만리 선생님은 1급 중증 장애인이지만 직접 무대에 올라 공연하는 입지전적 인물이죠. 극단 중심의 활동을 연구할 때는 그 경험을 함께 공유하지 않으면 연구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어요. 저는 환경상 자연스럽게 그들과 만나 작업을 돕기도 하고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기에 자연스레 극단 연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극단 활동을 하는 재일코리안의 국적은 다양하다. 1945년 해방 이후 일본에 거주하던 약 200만 명의 한국인에게 조선 국적이 부여되었지만, 남북에 각각의 정부가 들어선 이후 그들은 한국과 조선 중 하나의 국적을 선택해야 했다. 일본 내 재일교포 사회에서도 이념 대립이 발생해 갈등이 극심했고, 일본 사회의 차별과 냉대에 시달리는 등 재일코리안이 겪은 부침은 다난하고 특수했다. 재일코리안 극단의 작품 역시 복잡한 역사 정치적 상황 속에서 민족, 국적으로 인한 차별과 갈등을 겪은 재일코리안으로서의 정체성을 다루는 작품이 많다고 한다. 재일코리안 극단 연구는 이제 시작 단계이지만, 그는 극단 연구에 있어 가장 적합한 위치에 있기에 앞으로의 연구를 기대해 볼만하다.

비평가, 드라마투르그, 연구자, 교수 등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이성곤 교수는 예술이론과 실기는 처음부터 동떨어져 있던 것이 아님에도 이를 이분법적인 체계로 분리하는 상황 속에서, 이론과 출신으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 책임감을 느낀다고 한다. 무엇보다 이론과 실기의 구분을 뛰어넘어 다양한 활동을 함으로써 경험을 쌓고 배우고 싶은 욕심이 많았다고 한다. 다양한 위치와 역할의 사람들이 모여 공연을 만든다는 연극의 특수성으로 인해 특히 연극 이론은 현장에서 기여하고 참여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이성곤 교수가 밟아온 여정을 보아도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곳곳을 누볐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는 여전히 연극을 통해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 그 믿음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양새일지 직접 묻고 듣지는 못했지만, 그의 지난 여정을 통해 어렴풋이 짐작해 본다. 그가 앞으로 만나게 될 수많은 인연과 활동이 그의 믿음을 계속해서 유지해 주기를 희망한다.

글 황지성
‘이곳과저곳’이라는 극단명을 내걸고 연극을 만든다. 이름의 의미를 찾아가고 있다.

영상 이산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