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에게 이별을 고한 후 나는 한동안 나라를 잊고 살았다. 나라에게서 최대한 먼 곳으로 이사를 했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다. 나라가 사무치게 그리울 때도 있었는데, 나라가 나오는 영상을 찾아보면 또 금방 괜찮아졌다. 오랜 기간 거의 무명에 가까웠던 나라가 글로벌 스타 반열에 올랐다는 소식을 가끔 접했지만, 뜬소문이겠거니 했었다. 그런데 나라를 아는 사람이 이곳에도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에 적지 않게 놀랐다. 나는 내색하지 않으려 몸을 낮췄다. 아무리 나라와 한평생 동고동락하는 사이였다고 해도 그게 교만함이 될까 두려웠다. 게다가 내가 아는 나라는 변덕도 심한 사람이었다. 명백히 글로벌 스타가 나라 한 명뿐인 것도 아니었다. 수없이 많은 스타 중 하나가 나와 관련이 있다고 더 대단해 보이는 건 나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이기심이다. 나는 이렇게 되뇌며 진정하려 했지만, 별수 없었다. 내 한 몸 멀어져도 나라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나는, 기억을 곱씹어 보기로 한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고,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말이다. 애국은 나도 모르게 스며들어 품고 있는 마음이었다.
국민학교 시절 교실에서 칠판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면 가장 높은 곳에 태극기가 걸려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전교생이 운동장으로 나가 국민체조를 하고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 제창을 했다. 줄 맞춰 선 모두가 내려다보이는 단상에 올라 이 시간을 이끌었던 학생 대표는 모범의 표본이었다. 일제히 가슴에 손을 얹고 하나가 되는 시간에 우리는 경건하고 숭고한 사랑을 느껴야 했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마다 사랑하는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 전 국민이 합심했다. 선조들이 피땀 흘려 지켜낸 나라를 위해서 국민의 일원으로 나의 몫을 나누는 건 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나라가 살아야 내가 산다. 나는 나라가 있기에 존재한다. 나라는 한민족의 근원이자 높으신 아버지다. 신념은 위에서 내려왔다. 온 나라는 조직적으로 ‘국가대표’를 응원하며 사랑의 광기는 달아올랐고, 다 함께 눈물을 흘리고 환희를 맛보았다. 한 마음으로 뭉친 군중이 공유한 기쁨과 슬픔은 개개인에게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져다주었고, 여기에 또 다른 여지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대중문화를 중심으로 유독 ‘국민 OO’와 같은 호칭이 많았던 시기다.
내가 의심 없이 가지고 있던 나라라는 단일한 관념은 2006년에 미국 오클라호마로 이주하여 미국인 가족과 살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해는 북한의 핵실험으로 정세가 시끄럽던 시기여서 텔레비전에 관련 보도가 시도 때도 없이 나왔다. 그 당시엔 남한과 북한이 같은 나라인지, 다른 나라인지, 남북한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North Korea’라는 단어가 뉴스에 자주 등장하자, 어쨌든 ‘Korean’이었던 나는 학교에서 심한 욕을 많이 들었다. 한국에 계신 부모님은 한국을 상징하는 물건들을 틈틈이 국제 배송으로 보내주었다. 그러나 비닐로 겹겹이 쌓여 온 김치는 냉장고에서 나는 냄새를 도저히 못 참겠다는 호스트 맘이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렸고, 하회탈 액세서리를 건네받은 호스트 시스터는 소스라치는 비명과 함께 악귀에 씐 공포물을 왜 주냐며 울면서 달아났다. 나의 자랑스러운 나라는 한순간에 야만, 저속, 부끄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이 감정은 제주도에 살다가 서울 학교로 전학 왔을 때 느꼈던 모멸감과 비슷했다. 절대적이라고 여겼던 가치 체계가 무너지면서 수치심이 반복되자 생존을 위해 전략을 짰다. 서울 사람처럼, 미국인처럼, 그들과 비슷한 부분을 찾아 스스로를 동일시하고 거부감이 덜한 측면을 나만의 개성으로 삼았다. 예를 들면 ‘귀여움’, ‘아기자기함’, ‘정교함’, ‘순진함’, ‘순박함’, ‘고유함’ ‘유머러스함’과 같은 것들이 통했다.
아시아인이 소수인 사회에서 겪는 무시는 대륙을 옮겨가도 있었다. 2011년 스웨덴 말뫼에 살면서 여행한 유럽에서 나는 ‘나’가 삭제된 ‘아시안 여성’이었다. 길을 가다 생김새 때문에 날계란을 맞았고, “너 영어 못하지? 말은 할 수 있어?”라며 웃음거리가 되었으며, 은행에서는 자산을 확인하기도 전에 외국인 노동자로 보인다며 신용을 줄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공격 받지 않기 위해, 단정 받지 않기 위해, ‘전형적인 동양 여자’로 보이지 않도록 최대한 나를 가리고, 꾸미고, 연기했다. 밤길을 걸을 때면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오히려 튀는 전략, 남자인 척할 수 있는 매무새, 미친 사람인 척하는 흉내에는 달인이 되었다. 우스꽝스러움을 자초해야 살 수 있었다.
서울로 돌아와 대학을 졸업할 때쯤에 한국에서는 나라를 향한 일편단심 사랑과 믿음에 커다란 균열과 반발이 대거 빗발치고 있었다. 빈부격차를 둘러싼 수저론과 함께 88만 원 세대, N포 세대와 같은 세대론이 맞물렸고, 세월호 참사를 기점으로 ‘이게 나라냐’라는 비판과 비난의 목소리가 불거졌다. 연이어 근대적 가치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터져 나왔고, 실망감, 절망감, 회의감에 쓴 웃음만 나오던 때였다. ‘이 지옥 같은 나라를 탈출하자’를 버릇처럼 되뇌며 꿈꿨다. ‘나’와 강력하게 붙어있던 ‘나라’를 떼어내려 애썼지만, 그 불능함에 스스로를 비웃는 사회적 분위기가 팽배했다. 애착은 애증이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기류는 정권이 바뀌자 최소한 표면적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내일이라도 당장 일어날 것 같았던 전쟁은 평화의 코드로 뒤집어졌고, 어느샌가 증오보다 찬양이 대두되었다. 서구의 저명하고 권위 있는 자리에서 ‘한국인’이 만든 작품이 상을 받고, 한국에서 기인한 대중문화가 소셜미디어의 확산을 동력 삼아 큰 인기를 끌자, 벅찬 감격과 함께 너도나도 ‘국뽕에 취했다’. 단숨에 중독되고 심취되는 국뽕에는 누군가 이룬 성취감이 방구석의 개인에게 투영되고 전이되는 보상 심리가 작동했다. 과거의 사랑과는 달랐다. 사랑을 이룬 건 희생이 아닌 쾌감이었다. 여기에 팬데믹으로 국경이 강화되면서 국가의 역할이 대두되고, 성숙한 시민 의식이 요구되면서 국적의 힘이 가시화되었다. 기존에 ‘선진국’으로 여겼던 나라들이 전염성 관리에 힘을 쓰지 못하자 전복된 위상에 집단적 자신감이 발동했다.
동시에 내게는 동아시아인을 향한 차별이 극심했던 2020년 뉴욕에서 길거리 폭행을 당해 경찰을 부르는 일이 있었다. 나는 밖으로 나가면 언제든 병균을 퍼트리는 바이러스가 되었다.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했다. 또다시 나의 나라는 아시아가 된다. 백인 사회에서 비백인의 실제 국적은 유효하지 않았다. 오직 인상착의를 통해 아프리카인, 아랍인, 아시아인과 같은 거대 분류로 취급하는 오류가 눈에 띄게 전염되고 있었다. 나와 같은 ‘자국’과 나와 다른 ‘이국’을 철저하게 나누며 배제하는 일이 어디에서든 빗발쳤다.1 황인종의 몸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순식간에 강인해지기도 취약해지기도 했다. 뉴욕과 한국을 오갔던 나는 강인함을 당연시할 것이 아니라 취약함과 연대하기를 배웠다.
팬데믹 이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거점으로 한 3년간의 생활에서 마주친 한국에 대한 인식은 10년 전 유럽과 너무나 달랐다. 한국에서 생산된 여러 문화 콘텐츠의 영향으로 한국을 아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나라에 대한 관심과 인식이 월등히 높아졌다. 여기저기서 K가 보였다. K의 종전은 2000년대의 국가적인 문화 산업 진출 계획이 아시아권을 중심으로 만들어낸 한류일 것이다. 그 한류는 동아시아에서 ‘세계’로 건너가면서 ‘K-OO’으로 불렸다. 나는 1990년대부터 한국 대중문화의 변천을 지켜보고 겪었지만, 2020년대 한국 밖에서 마주친 K는 전혀 다른 무엇이었다. 마치 ‘한국’이 ‘Korea’로 번역되고 ‘Korea’가 ‘K’로 단축된 것처럼 ‘K’는 변이와 분열을 거듭하여 ‘한국’과 거리가 생겼다. 한국 땅을 떠나 어떤 땅에 자리 잡고 어떤 문화와 사람들을 만나느냐에 따라 수만 가지 k가 생겼음을 알 수 있었다. K는 알아서 나에게서 떨어져 나가, 나만의 것이 아닌 누구의 것이든 될 수 있었다. 수단에서 온 친구는 자신의 고향에 한국 드라마만 방영하는 텔레비전 채널이 있다며, 자신의 이모들은 종일 그 채널을 틀어놓고 일을 한다고 했다. 사촌 동생 때문에 ‘아미’가 된 수리남에서 온 친구는 BTS 멤버들이 얼마나 대단히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열변을 토했다. 네덜란드의 소도시에 있었던 레지던시에서 작가들은 밤을 새우며 한국의 예능 프로그램 〈솔로지옥〉과 드라마 〈호텔 델루나〉를 연달아 보고, 자신이 좋아하는 역할에 이입하며 울고 웃었다. 특히 한국 사극만 찾아보던 이란에서 온 친구는 나는 들어본 적도 없는 한국 영화 이야기를 했다. 바야흐로 생산자와 소비자의 현재 위치와 국적이 일치하지 않는 향유가 편재했다. K는 원산지를 떠나 여러 지역에 정착하면서 고단한 삶에 유희와 활력을 선사하기도, 연약한 존재에 낭만과 로망을 심어주기도, 무료한 이들이 팬덤과 덕질에 열광하게 하기도, 이 모두를 교묘하고 수려한 자본의 수법에 빠져들게 하기도 했다. 나는 한국인이었지만 ‘아미’가 아니었고, 〈솔로지옥〉을 챙겨보지 않았고, 모든 한국 영화를 알지 않으며, 드라마채널을 종일 틀어놓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그 향유 공동체의 일원이 아니었다.2 내가 그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그 콘텐츠를 더 잘 안다거나 K-공동체 프리패스권을 갖는다는 상상은 오산이었다. 가끔 나는 ‘진짜 한국은 저렇지 않아’라고 짚고 넘어가려 애썼지만, 현실과 환상의 방점이 모호함을 깨닫고는 더 이상 아는 체하지 않았다. 내가 아는 것이 ‘진짜 한국’인지, 그 진위를 판가름하는 권한이 나에게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그 누구도 어떤 나라를 온전히 대표할 수는 없었다.
1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의 상대적 약자와 이방인에 대한
차별은 한두 줄로 요약할 수가 없다.
2
K는 수출용 이름이다. 소비가 전제되어 있다. 한국의 가요, 드라마,
영화가 특정 취향과 특성을 반영한 소비층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서유럽에 살면서 더 넓은 소비층이 있다고 체감한 것은 음식이었다.
암스테르담에서 만난 친구들은 매년 김치를 담가 먹는다며 그때까지 한
번도 김치를 담가본 적 없는 나에게 자신이 담근 김치를 나눠주었다.
많은 선술집(Pub)이나 카페에는 김치, 불고기 소스, 고추장을 활용한
퓨전 메뉴가 자연스럽고 태연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내 주변에서
김치를 직접 담가 먹는 유럽 사람들이 내가 아는 한국인들보다 많을
지경이었다. 더럽고 고약하다고 쓰레기통에 버려진 우리의 김치는,
건강하고 신선한 모두의 김치가 된 것이다. 각자만의 레시피로 담근
누구누구 표 김치가 여기저기 존재한다. 이 김치에 K를 붙일 수
있을까? 한편, 그렇다면 K-미술이란 가능한가? K를 만드는 것이 한국인
작가인지, 한국에서 난 재료인지,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다룬
작품인지를 따지기에 앞서 ‘미술이 소비문화인가?’, ‘미술이 보편적
파급력을 가질 수 있나?’와 같은 질문들을 통해, K의 조건에 미술이
부합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그러나 K가 출신을 불문하고 이를 향유하는 사람들의 문화라고 해도3, 국적과 인종은 여전히 나의 몸이자 나의 일부였다. 그 사실은 외국에 살면서 비자 문제와 같은 행정적인 일을 처리할 때 확연히 드러났지만, 일상에서 반응하는 나의 감정4 또한 심상치 않았다. 그중 대표적인 경우는 한국이나 아시아에 대한 지나친 예찬, 비하, 또는 비약을 마주할 때였다. 논리적 사고와 관계없이 내 감정은 내가 속해 있는 인종 공동체의 처지에 따라 급격하게 요동쳤다. 때로는 이로 인한 심적 타격이 물리적 타격과는 다른 종류의 후유증을 주었다. 나는 이러한 의문을 반복적인 차별의 경험과 변화한 시대의 상식으로 더 깊이 생각할 수 있었다. 한국의 인지도가 높아졌다고 차별이 없어진 것은 절대 아니었다. 길거리와 공공장소에서 아시안에 대한 조롱과 눈초리, 무지와 실수는 여전히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 나라에 기반한 과시나 굴욕은 떠났다. 내게는 내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는 선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있었다. “너 어느 나라에서 왔어?”, “너 영어 잘한다”와 같은 질문도 질문자의 의도와 상황에 따라 차별적 발언이 될 수 있음을 인지했고, 그 질문이 왜 문제가 있는지 설명했다. 그런데 생활에서 제일 흔하게 듣는 말 중 하나인 “니하오”에서 나는 혼란을 느끼곤 했다. 내가 “니하오”를 들었을 때의 기분 나쁨, “곤니치와”를 들었을 때의 기분 나쁨, “안녕하세요”를 들었을 때의 기분 나쁨을 느낄 때, 그 간극이 어디서 오는지 직시해보려 했다. 상대방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태도도 세심하게 간파하고 대처해야 했다. 내가 중국인이었다면 그 말이 어떤 심적 영향의 차이를 줬을까? 내가 “안녕하세요”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정말 좋아야 하나, 또 나빠야 하나? “니하오”라는 말에 “난 중국인이 아니야”라는 말로 화답하기에는 나 자신도 중국이라는 나라에 잣대를 대고 있었다. ‘난 중국인일 수도 있다’라는 생각이 중요했다. 나에겐 가족과 같은 동료들이 있었다. 중국인 혐오에 맞서 중국에서 온 친구에게 힘을 보탤 때 나는 중국인이 될 수 있었다. 러시아인 부모님을 두어, 전쟁을 일으킨 나라와 가족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는 친구 옆에서 그 죄책감을 논할 때 나는 러시아인이 될 수 있었다. 팔레스타인인 친구와 역사의 참상을 알릴 때 나는 팔레스타인인이 될 수 있었다.
‘나’와 ‘나라’는 동일시될 수도, 완전히 분리될 수도 없다. 이 둘은 순수하지 않다. ‘나라’는 출생지뿐만 아니라 가족, 친구, 공동체, 공감대, 문화, 성장배경, 거주지역, 활동 지역 등 수만 가지의 과거, 현재, 미래에서 오는 요인에 따라 변화하는 복합체로, ‘나’와 마찬가지로 공동의 이름에 종속될 수 없다. 마침내 ‘우리나라’에 이별을 고한 ‘나’는 ‘나의 나라’, ‘너의 나라’, 그리고 ‘우리’를 마음껏 사랑할 수 있다. 혈통을 잇는 ‘부의 나라’에 포괄되지 않고, 유대를 잇는 ‘모의 나라’에서 살 수 있다. 나는 풍토(風土)라는 말을 좋아한다. ‘바람 풍’에 ‘땅 토’인 풍토는 어떤 지역의 기후와 토지 상태를 뜻하는 지리학적 의미와, 규범, 분위기, 전통과 같은 사회학적 의미를 모두 지닌다. ‘고향 향’의 향토(鄕土)와 비교하여 바람의 운동성이 들어가서 좋다. 향토가 독자적인 본연의 민족성을 강조한다면, 풍토는 가변적이고 다층적인 혼종성을 아우른다. 모든 나라는 혼종의 생물체다. 나라는 지구의 순환하는 대지와 대기를 바탕으로 지역과 역사에 따라 조금씩 다른 기력과 체질을 가진 혼종으로 삶을 이어간다. 2024년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제 나라를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이 나라의 ‘땅’과 ‘바람’을 생각하자. 한국과 외국의 ‘차이’를 비교하는 습관을 버리고, 그 ‘사이’를 논하자. 경계를 ‘장벽’이 아닌 ‘구멍’으로 바라보자. ‘겉’보다 ‘넋’을 위로하고, ‘껍데기’보다 ‘배설물’에 신경 쓰자. 한국이 문장의 ‘머리’가 아니라 ‘꼬리’가 되도록 하자. 우리는 얼룩이다. 안팎의 시선과 평가에서 해방되자. 무수한 나는 사방을 떠돈다. 서방 중심보다 동방의 방향성을 장착하자. 진짜는 없다. 오염된 전통에 대해 곧잘 말하자. 화해가 대수가 아니다. 깨진 언어를 두려워하지 말자. 돌연히 흐리다. 어머니의 눈물과 한숨을 몸짓으로 채우자.5
3
이들은 소비자에 그치지 않고 생산자가 되기도 한다. 나이지리아의
하이틴 로맨스 영화 〈My Sunshine〉(2024)은 K-드라마의 구조와
특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주로 나이지리아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출연 배우들은 한국어, 영어, 요루바어를 혼용하여 사용한다.
4
국가와 나라의 맥락적 차이를 짚고 넘어가고 싶다. K가 국가 홍보를
목표로 하는 국제적 맥락의 시장 용어이자 국가 브랜드 강화를 위한
마케팅 전략의 도구라고 한다면, 국가는 정치적, 법률적, 제도적
개념을 강조하는 말이다. 이에 비에 나라는 공동체적 소속감과
문화적이고 정서적인 연결을 부르는 말이다.
5
드라마 〈정년이〉에 나온 다음의 대화를 인용하였다. “어머니라면 빈
소리를 무엇으로 채울 거야?” “나라면, 눈물로 채우고 한숨으로
채우지.” “너는 무엇으로 채울래?” “나는 빈 소리를 몸짓으로 채울
거야.”
글 최윤
미술 작가. 사회적 풍토를 포착하고 엮어 여러 매체로 보여준다.
올해에 열린 전시 《드림 스크린》(리움 미술관)과 《어둠에서
보기》(부산근현대역사관)에서 각각 〈까마득한 얼룩〉(2024)과
〈3성TV은하46”〉(2024)를 선보였다. 깜깜한 미래에도 일이 들어오길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