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2024 WINTER52
©안소정

네덜란드에서 보낸 105일

이동한다. 머문다. 이동한다. 머문다. 어디에도 완전히 소속되지 않은 채 보내는 시간들. 네덜란드에 교환학생으로 온 지 세 달이 넘어간다. 한국에서 비행기로 14시간이 걸리는 곳. 8,600km 떨어져 있는 곳.

사진첩을 보다가, 네덜란드에 온 이후로는 더 이상 남의 사진을 저장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에 있을 때는 너무 남이 되고 싶었다. 더 이상 나 자신이고 싶지 않은 날들이 많았다. 추구미와 도달가능미 사이를 오가며 괴로워하는 마음들이 존재했다. 멍청함, 못생김, 무능함, 뚱뚱함, 찌질함, 궁상맞음, 이런 단어들을 무서워했다. 네덜란드에 오고 나서는 스스로가 궁금해졌다. 더 이상 한국에서의 멍청함의 기준, 못생김의 기준, 무능함의 기준이 적용되지 않을 때, 나에 대해 고정된 정보 값이 0에 수렴되는 곳에 있을 때, 무얼 해도 ‘동양인 여성’이라는 미지의 영역에 속하는 이가 되어있을 때의 자유는 낯설었지만 좋았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서 어느 때보다 더 모국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나’라고 생각했던 것을 해체해 본다. 내게 배어 있던 모국의 자취들을 알아간다. 그것은 때로 버거웠다는 것을 이곳, 네덜란드에 와서야 깨닫는다. 내가 이제까지 무엇과 연결되어 있었는지, 이제는 무엇과 더 연결되기를 선택할지 고민한다. 한국에서 산다는 건 무슨 의미였을까. 이제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 그렇게 내게 붙어 있던 온갖 기준들을 떼어내 보며, 모국어를 조금씩 잃어가며, 적극적으로 한국과 거리를 둬본다.

방송영상과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공부하던 과정 중에, 네덜란드 윌렘 드 쿠닝 아카데미의 오디오비주얼 디자인(audiovisual design) 전공을 배워보겠다고 결정한 까닭은 무엇보다도 내가 가진 이야기가 빈곤하고 지루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법을 알고 싶었다. 그건 다른 위치에 서 보고 싶다는 마음이기도 했다. 윌렘 드 쿠닝 아카데미에서 학과 커리큘럼이 구성되는 방식은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수강 신청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학기별로 들어야 하는 수업이 모두 짜여져 나왔다. 내가 다니는 2-1학기의 경우, 에세이의 성찰적 특징과 영화의 시각적 표현을 결합한 ‘에세이 필름’ 제작, 네덜란드 영화제의 ‘티저’ 제작, 이렇게 총 두 개의 커다란 과제가 있었다. 학기 초에는 에세이 필름을 위한 이론 수업을 3주가량 듣고, 그 이후에는 4주가량 기술적인 수업과 조별 피드백 수업이 진행되는 식이다. 학기 중반에는 예술창작이 필요한 이유나 일상과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지 이야기하는 수업, 영화제 및 피칭에 대해 논하는 수업도 열렸다. 학과의 선생님들이 협력하여, 학생의 창작 과정에 맞춰 그때그때 필요한 이론과 기술, 피드백을 순차적으로 제공해 준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학과 전공 바깥의 것을 배우고 싶다면, 스테이션(station)이라고 해서, 기술을 배우는 수업들을 신청할 수 있다. 목공, 뜨개질, 사운드 채집, 쓰레기로 창작하기, 버섯 탐구하기 등 다양한 스테이션들이 열린다.

에세이 필름 제작은 방송영상과의 다큐멘터리 워크샵 수업과 유사하고, 영화제 티저 제작 같은 경우 모션 그래픽, 애프터 이펙트, 일러스트레이션 등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에서 멀티미디어영상과의 수업과 유사하다고 느꼈다. 오디오비주얼 디자인 전공 내에서 배우는 영상의 스펙트럼이 기존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구분되어 있던 영상 장르와는(다큐멘터리 영화, 극영화, 멀티미디어 등) 달랐기 때문에, 장르적 특성보다도 오디오와 비주얼을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배움의 태도도 한국에서와는 사뭇 달랐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질문이 있는지,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이 각자에게 유용한지, 온전히 전달되었는지 자주 묻는다. 친구들은 시답잖은 이야기를 종종 했는데, 그 이야기들은 자주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로 변화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자세를 고쳐 앉게 되었다. 바보 같다고 생각했던 의견과 반짝이는 의견은 사실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그건 어떤 말하기든 수용되는 분위기에서 빚어지는 것이라는 걸 배웠다.

학기 초에 자신이 하고 싶은 작업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여전히 자신이 무얼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다고 이야기하는 학생이 있었다. 선생님은 비슷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더 있는지 물었고, 여섯 명 정도가 손을 들었다. 자신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수업 시간에 드러내고, 도움을 청하는 것을 지켜보는 건 퍽 낯선 일이었다. 이곳에서 미지의 상태, 막막함의 상태에 있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그런 학생의 존재는 어떤 방식으로든 수업의 흐름에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일주일 후에 소크라틱 세션을 수업에서 열어보기로 했다. 각자의 작업 혹은 삶에 있어서 핵심 질문 한 개씩 가져오기로 했다. 그 핵심 질문을 듣고 난 후에는, 나머지 학생들이 각자 열려 있는 형태의 질문을 만들어서 발표자에게 전해주자고 했다.

기숙사 앞 호수 풍경 ©안소정

네덜란드에서 나고 자란 남성 수강생이 말했다.

“나는 백인 남성이야. 이 사회에서 기득권층이지. 이런 내가 대체 어떤 예술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가리는 것은 아닐까? 내가 어떤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지 의문이 들어.”

아시아인처럼 보였던 여성 수강생이 말했다.

“나는 중국에서 태어나서 네덜란드로 입양됐어. 나는 내 입양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데, 내가 다른 입양된 이들을 대표하게 될까 봐 걱정돼. 누군가를 대표하지 않으면서 이야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터키인 부모님 아래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나고 자란 여성 수강생이 말했다.

“나는 이 세계가 거대한 시뮬레이션 같아. 뉴스에서는 전쟁이 터지고, 사람들은 죽어가고, 그런데 나는 커피를 마시고 매일 할 일을 해. 이 간극을 보면서 무기력함을 느껴. 진짜 전쟁이 터지고 있는 게 맞을까? 그렇다면 나는 왜 이렇게 평범한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걸까?”

어떤 질문들은 한국에서 내 동료들이 하고 있는 고민들과 닮아 있기도 했고, 어떤 것들은 아주 생각해 본 적 없는 것들이기도 했다. 나는 내가 너무도 한정적인 국가적, 인종적, 문화적 맥락에서 살아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수강생들은 ‘백인 남성’이라는 권력이 불편했던 적이 있는지, 입양된 누군가를 대표하게 됐을 때 우려되는 점이 무엇인지, ‘나’라는 존재가 애초에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는 있는 것인지, 각자가 가진 질문이 어떤 권력 기반 위에 세워져 있는 것인지 물었다. 쏟아지는 질문들 속에서 나는 내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있다고 느꼈다.

다큐멘터리를 공부하던 와중, 암스테르담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IDFA)가 열렸다. 한국의 EBS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EIDF)와 네덜란드 IDFA의 협력 피칭을 통해, 방송영상과 안팎에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오던 이들을 암스테르담에서 만날 수 있었다. 김일란 선생님의 〈에디와 앨리스〉, 남아름 감독의 〈애국소녀〉 상영과 김수민 감독의 〈블랙박스〉, 마민지 선생님의 〈가족의 증명〉, 박소현 감독의 〈수국〉, 여인서 감독의 〈음파음파〉의 피칭 혹은 작업 고민들을 엿볼 수 있었다. 각 영화들이 네덜란드에서 상영됐을 때 생기는 맥락들이 궁금했다. 내가 유럽인들을 궁금해하며 자라왔던 것만큼 유럽인들은 아시아인들을 궁금해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더 많은 아시아의 이야기가 유럽에 울려 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IDFA 상영에 선정된 영화들은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봐오던 작품들과 크게 다르진 않았다. 다만 전쟁, 난민, 이주와 관련된 영화가 훨씬 자주 보였다. 또한 암스테르담 도시 곳곳에 있는 크고 작은 18개가량의 영화관을 활용한다는 점이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덕분에 영화제 기간동안 각 영화마다 상영 기회가 7~9회 정도 있었고, 많은 GV 회차가 열릴 수 있었다. 작년에는 3~4개의 영화관과만 계약했었다는 것을 알고 난 이후에는, 영화제가 지역사회와 더 깊게 연관되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안소정

영화제 기간동안 트램으로 암스테르담 전역을 오가며 하루에 3~4편씩 영화를 봤다. 네덜란드에서만 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더 많은 존재들과 연결되고자 했다. 그러다 집으로 가는 기차에서 “니하오.” 무시하고 내리는 동안에도 한 번 더 “니하오.” 그 이후로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와 내 친구들은 허공에 소리를 지르며 길을 걸었다. 그런 우리에게 유럽인 두 사람이 다가와 “저 애들 대신 내가 사과할게. 쟤네는 무시해. 너희에게 오늘 하루가 좋은 날이 됐으면 좋겠어.”라고 했다. 우리는 사과해 줘서 고맙다고 했다. ‘니하오’는 더 이상 내 하루를 망칠 수 없지만, 어떤 날들에는 내가 동양인 여성이라는 사실을 너무 잊고 싶어질 것이라는 걸 안다. 비행기를 타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삶은 변한다. 어떤 곳에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이 어떤 곳에서는 무척 손쉬운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어떤 기반 위에 세워져 있는지는 잊지 않고 싶다. 나는 계속해서 이동한다.

글 안소정
최근에 카자흐스탄과 한국을 오가며 만든 영화 〈K-ALMA-Q〉를 마무리했다. 지금은 네덜란드에서 공부하며, 다음 영화를 만들기 위해 이곳저곳 기웃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