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2024 AUTUMN51
『미래의 손』

천국을 구걸하지 않겠다 『미래의 손』

✽ 비평에서 으레 남용되는 ‘영혼’이라는 표현을 경계하면서도 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디 이것이 손에 잡히는 것으로, 한 개인이 고유하게 갖는 역사와 신념이 접합된 정신성(mentality)으로 감각되길 바란다.

그건 벗겨지지 않는다는 걸 매번 깨닫고

문학은 당신이 사건과 얼마나 거리감을 두느냐에 따라 다르게 완결된다. 많은 경우 당신은 사건의 느슨한 목격자이고, 간혹 은밀한 내통자이며, 때론 위증을 찾아내는 형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건을 엄밀하게 옭아매는 형사의 태도도, 차도하의 시에서는 미끄러지고 만다. 차도하는 “인간은 체계에 포획당하는 순간 인간이 된다”1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늑대소년의 비유와도 같다. 늑대무리에서 자란 소년은 야성을 잃지 않지만, 문명에 길든 인간은 날카로운 이빨과 손톱을 갈아내고 체계에 순응한다. 그리고 차도하는 인간을 순응시키는 체계를 분해한다. 차도하는 인간을 구성하는 조건, 무엇보다 ‘영혼’의 존재를, ‘지금’ 가지고 있는지를 계속 되묻고 시험한다. 인간으로서 인간을 벗어나기, 인간되어짐의 체계를 의심하기. 그것이 차도하가 형형하게 천착하는 것 중 하나다. 차도하는 이빨과 손톱을 잃은 실존을, 체계에 익숙해진 무수한 당신들을, 뒤흔들고 부수어서 이전과 다른 사람으로 만든다. 기성의 체계 속에서 길 잃은 미아들을 자신의 공모자로 만든다. 차도하에게 시 쓰기는 시의 자유로운 물성으로 체계를 실험하는 일이고, 그리하여 다르게 구축될 수 있는 세계를 마음껏 지어보는 일이다. 그는 다정한 아나키스트다.

1
차도하, 『일기에도 거짓말을 쓰는 사람』, 위즈덤하우스(2021), 251p.

드디어 피크닉을 했다.

피크닉을 갔다, 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피크닉에 대해 아는 바가 없거나
운이 좋은 사람들이다.
때로 갑자기

손에 도끼가 들려 있던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도시락 바구니를 열었을 때 갓 태어난 아이가 있었던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번엔 다행히 빵과 과일과 주먹밥이 들어 있었고
나는 피크닉을 했다.

- 「피크닉」에서

이 시는 박탈의 경험을 실토한다. ‘나’가 피크닉을 원할 땐 손에 도끼가 들리고, 음식 바구니에선 갓 태어난 아기가 튀어나온다. 피크닉은 금기이며 이것을 탐한 결과는 응징으로 돌아온다. 피크닉은 ‘드디어’ 그리고 ‘다행히’ 이루어지는 것이지 ‘당연히’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어서, 피크닉에 성공했을 때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 시간이 멈추면 피크닉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체계에서, 시간은 멈출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며 중단되어야 하는 것은 피크닉이기 때문이다. 피크닉은 주어진 세계와 그 속에 사는 인간 사이의, 불공정 교환을 함축한다. 한정된 빵과 제한된 시간 가운데서, 도끼에 찍히지 않고 빠져나와야 한다. 그것은 종속이고, 꼬리가 잡히고 마는 폐쇄된 게임이다. 인간이 주어진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간신히’ 출구를 찾지만, 다시금 큰 길가로 진입하는 일이다.

지구에 나의 고향이 없다는 것

복숭아를 좋아하는 죽은 친구를 둔 사람과
딸기 디저트를 좋아하는 죽은 친구를 둔 사람이
어느 날 거리에서 마주치게 되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중략)
두 사람이
한 사람씩의 영혼을 더 업고 있었다 해도,
(중략)
시공간은 그들을 잘 소화해 낼 수 있다.
교차로의 신호등처럼
사물을 규칙적으로 어긋나게 하는 게 시공간의 몫.
(중략)
두 사람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지나쳐 가는
거리의 복잡성이
영혼에 대한 믿음을 부드러운 방식으로 앗아간 것이다.

- 「기억하지 않을 만한 지나침」에서

현실은 가혹하며 때론 가학적이다. 차도하는 거리에서 ‘영혼’이 묵살되는 장면을 목격한다. 교차로는 일률적인 규칙 아래 인간의 영혼을 어긋나게 함으로써 교통을 지키고, 우리의 영혼이 서로를 알아보지 못함으로써 우리는 생활한다. 우리는 그렇게 도시에 “소화”되어 왔다. 체계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꼭꼭 씹어 삼켜졌다. 우리는 “부드러운 방식으로” 영혼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찾아야 한다. 차도하에게 영혼은 실존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혼의 실체를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은 다음과 같다.

흰 백숙을 먹을 때 상상력을 어디에 쓸까
불쌍한 동물들을 위로할까 생생한 살을 떠올릴까
(중략)
무덤에 절을 하던 사람들이 그것이 텅 비었다는 걸 모른체할 때
외로운 늙은 유령이 우리집 벽을 드나들 때
내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을 도둑질할 때

나는 내 심장을 인정할까 인정하지 않을까

내가 내 심장을 인정할 때
나는 비로소 살까 죽을까

- 「언덕을 뛰놀던 아이들이 그것이 무덤이었음을 눈치챌 때」에서

‘내 심장을 인정하는’ 일은 생(生) 혹은 죽음을 결정짓는다. ‘내 심장을 인정하는 일’은 육식, 도둑질, 거짓이지만 선의인 믿음, 경미한 폭력 앞에서 어떻게 행동할지 선택하기와 연결된다. 가혹한 것은 ‘내 심장을 인정하는 일’이 나의 구원을 담보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불확정성 가운데, 시인은 결과를 알 수 없을지언정 끊임없이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화자를 밀어 넣는다. 차도하에게는 이것이 영혼을 가진 자의 의무이며, 실존에 가까운 형태인 듯하다. 차도하는 생(生)의 천부성을 매도하고 삶을 로터리로 던진다. 생존은 실존의 충분조건이 아니며, 삶은 결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오른쪽에 있다
(중략)
도서관에서 나올 때 칼을 들고 대기하고 있던 사람을 막을 순 없었다.
(중략)
그런 범죄는 막을 수 없다고,
오른쪽의 사람이 입을 모아 말했다.

왼쪽에서 일어난 일은 왼쪽의 일로 두기로 한다.
나는 지금 오른쪽에 있나?
칼이 배에 꽂혀 있는데 뺄 수가 없다.

- 「왼쪽의 일」에서

차도하는 계속해서 선택이 불가능한 상황에서조차 선택지를 고른다. 여기 “칼을 들고 대기하고 있”는 사람이 있기에, 누군가는 희생자가 될 것이다. 세계는 왼쪽의 일을 오른쪽의 일과 분리함으로써 평화롭게 교통 되고, ‘나’는 ‘희생자’와 개념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분리됨으로써 살아남는다. 시계 속 부품들이 각자의 업무를 분담함으로써 작동하듯, 세계는 개인과 개인 간 분리의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이 외면은 눈 맞춤을 앗아가 서로의 영혼을 보지 못하게 하며, “왼쪽의 일을 왼쪽에 두는” 모면과 면피로 이어진 생의 방법론이다. 차도하에게 그것은 실존이 아닌 생존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시인은 스스로를 겨냥하고 다음의 대답을 종용한다. 내가 주체인 이 세계에 불가항력을 허락할 것인가? 시인은 제압할 수 없는 칼의 방향을 기어이 자신에게로 향하고, 랜덤의 희생자를 자신으로 지정함으로써, 대답을 토한다. 나는 그것을 허락할 수 없어. 그래서 차도하는 자신이 실존할 수 없는 세계를 버리고 다른 세계를 세우기로 한다.

온 세상을 돌아다녔어요

삶이 내 손을 놓고
그만 가라고
타이르다가
소리치다가
그냥 내 손을 놓고
인파 속으로 사라졌을 때

나는 멍하니 서 있다가
가기로 했다
(중략)
나와 닮은 아이가 그려진 실종 전단을 들고

다시 인파 속을 가로질렀다
(중략)
나는 전단을 놓고

삶이 하라고 시킨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바로
달렸다

나와 부딪힌 사람들이
쟤 뭐야, 애엄만 뭐하는 거야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 「미아」에서

“삶이 내 손을 놓”은 데서 새로운 세계 짓기는 시작된다. “삶이 내 손을 놓”았는데 “삶이 하라고 시킨 일”을 하기 위해 달린다. 엄마에게 버려질 바에 엄마를 버리겠다. ‘나’는 인파 속에서 기꺼이 미아가 된다. “실종 전단” 속 아이와 내가 동일 인물이어야 손을 잡아주는 어른은 필요 없다.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어도 상관없다. 원본과의 대조나 유비 따위는 벗어난다. 이전 세계와의 결별이 몰아친다. 다시 한번, 시인은 무수한 시들로, 불가항력 따위에서도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는 선택을 해가며, 새로운 세계의 구축을 시도한다. “나는 소설이 더는 궁금하지 않은데 / 그래도 읽는다 / 끝이 있는 이야기가 필요해서.”(「카운트」) 차도하에게 시를 쓰는 행위는 세계의 크기를 이해하는 일이고 단어와 이야기는 세계를 절단하는 최소 단위이자 가늠자다. 차도하는 단독자로서 시를 쓴다. “그에게 편지를 몇 통 받았으나 읽히지 않는 글자는 읽히지 않는 대로 놔두었다 사랑이어도 말이 되고 사람이어도 말이 되는 비겁한 방식으로 그가 썼으므로 / 나는 원래의 내 글씨체보다 또박또박 답장을 썼다.”(「단어가 사라진 자리」) 시 쓰기와 유비 되는 그의 천지창조는 비굴이나 우회, 모방은 취하지 않는다. 차도하는 “또박또박” 씀으로써 세계를 창안하는 단독자로 부상한다.

가족도 친구도 애인도 선생도 신도 아닌

차도하의 시에 따르면 “천국은 외국”이며, 필요한 것은 신이 아닌 “입국 심사”다. 그리고 천국은 철저히 발을 붙여 이동하는 곳, 모친과 모국과 모국어를 버려야 하는 곳, 무엇을 버려야만 통행이 허용되는 곳이다. 버릴 것이 있어야 입국이 가능하다는 조건에서, 차도하는 시를 버리고 천국에 가기로 한다. 왜냐하면 첫 번째로 그는 시를 많이 쓸 것이고, 두 번째로 그가 가진 것 중 가장 ‘버릴 만한’, 즉 ‘가치 있는’ 것이 시이기 때문에. 차도하는 적절한 등가로 천국에 입국하기로 한다. 차도하는 신에게 천국을 승인받지 않는다. 그는 선택한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신은 불완전한 존재거나 불합리하거나 소유할 수 없는 것들 중 마구잡이로 나열되는 하나에 불과하다. 신이 자비를 베풀라치면 시인은 일갈한다. “저만 사랑하는 거 아니시잖아요 아닌데 왜 이러세요”(「침착하게 사랑하기」). 신의 일을 수행하는 천사는, 진실을 모르기 때문에 책장 사이에 끼여 죽는 불상사를 피한다(「카운트」). 나약한 신적 존재들은 진실을 덮어둠으로써 살아남고, 차도하는 단독자로서 그것을 들춘다. 그리하여 시인은 불타 버린 자신의 시신을 발견하는 연구자(「추모」)의 잠든 모습에서, 더러운 곳으로 쏟아져 내리는 구토(「구현되지 않은 슬픔」)가 향하는 곳을 끝까지 쳐다보며, 도서관이 철거되는 날에도 같은 자리에 앉아서(「독서 유예」), 그 남아있는 것들에서 세계를 쓰기로 한다. 차도하라는 단독자가 떠난 후에도 세계가 끝장나지 않도록. 그는 세계를 지속시키는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나는 질문을 쥐고
장례식장 입구를 서성였다.

왜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지
왜 죽은 사람은 죽어야 했는지

질문이 손에 쥘 수 없을 만큼 커졌을 때

그것은 바닥으로 떨어졌고
폭발했다.
(중략)
영원을 믿지 않는 한 사람이
내 시신을 발견했다.
(중략)
내 손을 오래 바라보다
이런 기록을 남겼다
: 그는 무척 뜨거운 것을 쥐고 있었다

일지를 쓰다 엎드려 잠든
그의 꿈속으로부터

도시가 재건되고 있었다.

- 「추모」에서

세상은 그렇게 재건된다. 손에 쥔 것의 뜨거움에서, 이전 세계가 앗아간 것을 응시하는 데서, 내 심장을 의심하는 데서, 언젠가 자신과 같은 단어를 먹게 될 사람들을 위해서 짧은 시를 남기는 데서(「배급」). 그는 너무나 뚜렷해서 유령이 될 수도 없다. 그의 실존에 반투명이나 선택적 은닉이 깃들지 못한다. 태양이 진 한밤의 시간에만 인간사에 개입하는, 한낮엔 관이나 무덤에서 휴식하는, 그런 얍삽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 시간이 멈추지 않는 피크닉(「피크닉」), 둘이 써도 어깨가 젖지 않는 우산(「대화」), 이국적인 문양의 접시가 담긴 유리장(「세련」), 비겁하게 쓰기(「단어가 사라진 자리」), 그런 수행할 수 없는 것들. 시인은 그런 것들과 기꺼이 결별한다. 그것이 그와 그의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유일 테고. 우리는 지금 당장 “괜찮다”는 말을 소유하지 못해서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다 해도(「배급」) 괜찮다. 내일은 다를 테니까. 우리는 시인이 남긴 시를 나눠 먹고, 읽고, 쓰기 시작한다. 지금의 나와 당신처럼. 부서지고 불완전한 우리는 서로를 본다. 나와 당신은 같다.

P.S. 각 문단의 소제목은 『미래의 손』에 수록된 문장들을 불규칙적으로 빌려왔다. “그건 벗겨지지 않는다는 걸 매번 깨닫고”(「옷 입기 싫은 아이」), “지구에 나의 고향이 없다는 것”(「처치 곤란한 인간」), “온 세상을 돌아다녔어요”(「동반자」), “가족도 친구도 애인도 선생도 신도 아닌”(「미래의 손」).

글 박솔빈
시인의 생생한 시를 분절해다가 여기 두는 것이 못내 부족하게 느껴집니다. 차도하 시인의 『미래의 손』 전문을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