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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에 거슬러 역사를 솔질하는 미술관 아카이브를 위하여

“과거 왕의 궁전이었던 루브르는 이제 만인에게 무료로 개방되는, 대중을 위한 박물관으로 재조직”1된다. 미술이론가 캐롤 던컨이 근대적 박물관·미술관2이 탄생하는 순간을 묘사한 말이다. “1793년에 프랑스의 혁명정부는 새로운 공화제 국가의 탄생을 극적으로 선보일 수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국왕의 미술 컬렉션을 국유화하고 루브르를 공공기관으로 선포”3했다. 던컨에 따르면, 근대적 미술관은 대중이 근대적 시민으로서 정치에 참여하며 탄생했다. 루브르 개관 이래 예술, 나아가 지식과 문화는 시민을 위한 공공재여야 한다는 합의가 지식인들 사이에서 강화되었다.

이러한 배경과 얽힌 미술관의 특성은 대한민국의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법에 따르면, 현재 미술관은 “문화·예술의 발전과 일반 공중의 문화향유 및 평생교육 증진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박물관 중에서 특히 서화·조각·공예·건축·사진 등 미술에 관한 자료를 수집·관리·보존·조사·연구·전시·교육하는 시설을 말한다.”4 위 정의에서 ‘일반 공중’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듯, 미술관과 박물관은 ‘대중을 위한 곳’으로 천명된다. 그런데 1991년에 제정된 최초의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을 보면, 당시 미술관의 정의가 현재의 정의와 약간 다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미술관”이라 함은 박물관으로서 (중략) 문화·예술의 발전과 일반공중의 문화교육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하는 것을 말한다.” ‘문화향유’는 없고, ‘문화교육’이라는 단어만이 ‘일반 공중’을 위하여 할당되어 있다. 미술관이 무엇을 교육한다는 것일까?

잠시 한국 최초의 근대적 박물관을 찾아가자. 대한제국기다. 1909년 창경궁에는 순종의 위락을 위하여 박물관, 식물원, 동물원이 개관했다. 이 박물관은 처음에는 순종 개인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되었으나 점차 궁내 사람들에게, 그리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일반 공중에게 관람이 허락된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선 이후 이 박물관은 이씨 왕조를 따 ‘이왕가박물관’이라는 이름을 부여받고, 본격적으로 문화, 문명, 예술 경험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의 식민주의,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대중에게 납득시키는 역할을 맡는다. 전시장에서는 조선의 ‘구예술’이 일본의 ‘신예술’과 대비되었고, 뒤떨어진 ‘원시적’ 조선 문명과 다른 일본의 근대적인 문명이 눈부시게 조명되었다.5 이때의 이왕가박물관이 불러들이는 ‘일반 공중’은 지배 계급의 배타적 소유물을 공적 자산으로 전유하는 주체라기보다는 지배 계층이 주입하고 싶어 하는 이데올로기를 교육받는 객체에 가깝다.

이왕가박물관이 대중을 통제할 필요성이 있는 국가 제도 및 지배 계급과 밀접하게 결탁했다는 점은 다른 모든 박물관과의 공통점 중 하나다. 시민혁명에서 시작한 루브르박물관도 한 국가의 ‘우수한’ 문화예술의 첨단을 수호해 왔고, 무엇이 훌륭한 예술인지에 대해 대중을 교육할 의무를 부여 받아왔다. 루브르박물관은 지하 1층에서 지상 3층까지, (엄격하게는 아니지만) 주로 시간적 흐름에 따라 소장품을 나열해 전시한다. 지하 1층에는 그리스 고예술품, 이슬람 예술품 등이 있고, 지상 1층에는 이집트/아시아/아프리카/근동/오세아니아/아메리카 대륙의 유물들, 고대 로마와 그리스, 중세 유럽의 예술품 등이 있다. 2층에서는 그리스, 이집트, 고대 로마의 유물과 함께 르네상스와 근대기 유럽 예술품이 등장한다. 3층에는 오로지 유럽의 르네상스~근대기 회화 작품만이 전시되어 있다. 이러한 루브르 박물관의 전시 배치는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 서술이다. 루브르박물관은 갈수록 발전하는 역사관을 따르며, 그 진보의 정점에 유럽, 그 중 프랑스를 위치시키면서 미술사를 적어 내려간다.

미술관은 많은 것을 교육한다. 무엇이 가치 있는 예술 작품인지, 무엇이 우월한 문명인지, 예술품을 향유하고 감상할 줄 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소양인지, 미술관에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누가 미술관에 들어올 만한 사람인지, 기준을 세우는 것을 통해서 말이다. 미술관의 교육적 권력은 가치 있다/없다고 여겨지는 예술을 선별된 대중이 직접 경험하게 만드는 데에서 나온다. 이때, ‘문화 교육’이 의도되는 한편, ‘문화향유’가 일어난다. 즉, 비록 계급적, 젠더적, 연령적으로 미술관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나눠왔지만, 미술관의 교육은 대중과 예술품을 접촉시키는 것을 통해 이뤄진다.

1
캐롤 던컨, 『미술관이라는 환상』, 김용규 옮김, 경성대학교출판부(2015), 60p.
2
영미권은 미술관에 대한 제도학과 박물관에 대한 제도학 모두 Museology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관례적으로 미술관을 다루는 Museology도 미술관학이 아니라 박물관학으로 번역되기 때문에, 아래부터는 미술관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도 박물관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임을 일러 둔다.
3
1번 각주와 같은 책, 같은 부분.
4
모든 강조는 인용자.
5
목수현, 「일제하 이왕가박물관의 식민지적 성격」, 『미술사학연구』 9호(2000), 81~104p.

여기서 미술관의 반동성과 급진성이 동시에 발견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미술관은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지를 위에서 아래로 가르치고 주입하는 한편, 그렇게 하기 위해서 가치 있다고 판단한 것을 끊임없이 사유재에서 공유재로 변화시켜야 한다. 최소한 전시가 열리는 동안만이라도 말이다. 전자와 후자의 두 경향성이 상호작용을 하는 사이, 미술관의 권위주의적이고 계급적인 성격은 20세기 중후반을 지나며 피에르 부르디외를 비롯한 사회학자와 예술 사회학자, 제도 비판 예술가들에 의해 고발당한다. 이에 1980년대 영국에서는 전시장에 다양한 관람자를 받아들일 것을 강조한 신박물관학New Museology이 태동한다. 박물관학계는 특히 탈식민주의와 페미니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며, 어떻게 미술관이 저질러온 폭력과 오판들을 수습하면서도 미술관의 진보성을 발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심화한다. 이후 ‘전문가’나 운영자에게 결정을 전부 맡기지 않고 시민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민주적인 미술관을 역설하는 비판적 박물관학Critical Museology이 2010년대에 등장했다.

이렇듯 근대적 미술관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위에서 아래로’의 힘과 ‘아래에서 위로’의 힘을 동시에 목격한다. 미술관에서는 “상징적 문턱”을 높이 쌓으려는 힘과 허물어 버리려는 힘 사이의 게임이 벌어진다.6 국제박물관협회 (ICOM: International Council of Museums)의 박물관 정의는 박물관학계에서 후자가 헤게모니를 잡아 가고 있는 현상의 반영일 것이다.

“박물관은 유무형 유산을 연구·수집·보존·해석·전시하여 사회에 봉사하는 비영리, 영구기관이다.

박물관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어 이용하기 쉽고 포용적이어서 다양성과 지속 가능성을 촉진한다.

박물관은 공동체의 참여로 윤리적, 전문적으로 운영하고 소통하며, 교육·향유·성찰·지식 공유를 위한 다양한 경험을 제공한다.”

풀어 설명하면, 미술관은 자리를 지키며 문화예술을 보존한다. 다양한 문화예술을 시민에게 공유할 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문화예술을 받아들인다. 이를 통해 지역의 문화와 예술의 역사에 기여할 공적 책무를 수행한다. 이것이 미술관의 이상이 되었다.

이러한 흐름에 힘입어, 한국의 미술관은 2010년대 후반부터 최대한 많은 것들을 개방하려는 움직임을 더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비공개였던 수장고를 개방해 시민이 언제든 작품을 향유할 수 있도록 소장품의 진정한 공유재화를 시도했다.7 점점 더 많은 미술관이 소장품의 이미지와 정보를 디지털화해 홈페이지에 공개한 것은 물론이다. 더 다양한 사람들의 접근성을 보장하기 위해 비전공자와 어린이가 이해하기 편한 ‘쉬운 해설’을 전시에 도입8했다. 휠체어 및 유아차 이용자, 노약자, 임산부 등을 위한 엘리베이터 이용 안내를 눈에 띄게 표시하고 접근성을 보완했다. 그리고 미술관이 그동안 모으고 생산해 낸 연구와 비평들, 책, 예술가 포트폴리오, 행정 자료 등 각종 기록물을 공유했다. 미술관 아카이브가 확장된 것이다. 아카이브Archive(s)란 “영구적 보존 가치가 있는 기록”, 그리고 그러한 기록을 선별, 수집, 보관, 공유하는 시설이나 기관, 조직을 복합적으로 뜻하는 단어다.9 미술관이 모으고 만들어 낸 자료 중 대중에 개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비치하기 위해 만든 장소가 아카이브실로 통칭된다. 그 예로,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 등을 비롯한 여러 미술관에는 아카이브실이나 라이브러리 등으로 이름 붙여지곤 하는 자료실이 존재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도서관도 아카이브의 일종이다.

미술관과 박물관은 2010년대 후반 이래 점차 많은 아카이브실을 적극적으로 구축하고 일반 시민의 방문을 장려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 시기부터, 미술관 아카이브는 전문가들만 이용하던 자료와 소장물을 미술관에 찾아오는 누구에게나 개방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연구자나 내부 학예사들만이 이용하던 국립중앙박물관 도서관은 2018년, 더 많은 시민이 자유롭게 편안하게 찾을 수 있도록 휴게 공간으로 재단장해 개방감 있는 탁자와 의자를 다수 구비했다. 소마미술관은 드로잉아카이브를 2019년에 개관했고,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은 해외 미술 자료 전문 도서관인 apLAP을 2018년에 개관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아카이브만을 집중적으로 수행하는 분관인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를 2023년에 개관했고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도 2023년에 아카이브실을 정비해 확대했다.


6
우베 레비츠키, 『모두를 위한 예술?』, 최현주 옮김, 두성북스(2013), 166p.
7
국립현대미술관 청주(2018년 개관)와 하트원(2022년 개관) 등을 예시로 들 수 있다.
8
서울시립미술관은 2022년부터 전시장 안에 ‘쉬운 해설’을 도입했다.
9
서울시립미술관, 『오픈 아카이브』, 2022, 4p.

이렇듯 ‘문턱을 낮추기’, ‘관람객을 내쫓으려 하지 않기’는 공공기관으로서의 박물관이 긴 시간을 들이며 점차 지향해온 금과옥조다. 그리고 그 실천 속에 아카이브가 있었기에 우리는 아카이브의 양적 성장 뿐 아니라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얼마나 자유롭게 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지, 아카이브의 구성과 운영에 참여할 수 있는지 또한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미술관 아카이브가 최근 몇 년간 그 역사를 역행해 폐쇄화되어가는 양상을 보인다.

간단히 세 사례를 살펴보자. 우선, 아르코미술관의 아르코아카이브는 “고객 우선순위”에서 전문가를 가장 앞에, 일반인을 가장 뒤에 두기로 했다. 원래는 일반인이 가장 앞에 있었다. 2021년부터 ‘전문성’과 개성이 서재에서 강화되는 한편, 운영 일수는 주 5일에서 주 3일로 줄었다. 아르코아카이브는 총방문객 수가 줄어드는 대신, 아카이브를 진지하게 이용하는 전문가의 비중을 늘릴 수 있었다. 그러나 ‘전문가’에게서만 아카이브의 진지한 이용을 기대하는 것이 적절할까?

소마미술관의 드로잉아카이브는 2019년 개관 이래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지만, 2024년부터 전시 입장권을 구매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아카이브실을 개인적인 휴게 목적으로 사용하는 소수의 지역민을 제재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막상 소마미술관이 설정한 이상적인 방문자일 ‘진지한 열람자’는 전시 관람과 별개로 아카이브를 이용한다. 공부를 위해 아카이브를 찾아간 사람들은 이제 반복적으로 자료를 열람하고 참조하려면 매번 전시 입장권을 사야만 하는 입장에 처했다. 사실상 유료화 된 것이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의 apLAP은 펜데믹 시기부터 지금까지, “코로나19로 인해 잠정 휴관합니다”라는 안내판을 굳게 닫힌 문 너머에 세워둔 상태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apLAP은 휴관 중이라는 사실을 공지하지 않고 오히려 기획전 연계 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거짓 공지를 올렸다. apLAP은 아카이브가 아니라 쇼윈도가 되어서 아모레퍼시픽의 사회 환원을 홍보하는 용도로만 활용되고 있다.

위의 세 사례에선 미술관 아카이브의 원래 목적이 ‘전문성’이나 ‘선별성’, ‘효용성’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전도되거나 변형되고 있다. 그렇게 아카이브가 ‘대중성’, ‘접근성’, ‘개방성’과는 대립되는 영역에 놓인다. 여기에서, 미술관 아카이브의 방향성을 설정하고 관리하는 결정권은 시민과 분리된 미술관 측에만 맡겨져 있다. 그러나, 아카이브의 가능성과 이상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

미술관 아카이브는 예술계의 지식을 특권화하기보다는 시민에게 개방하는 공유지commons다. 중요한 것은, 아카이브가 그 공유의 과정을 통해 크고 작은 역사들을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곽건홍은 『아카이브와 민주주의』에서 아카이브가 민주주의의 진전에 기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아카이브는 기록을 보존할 뿐만 아니라 왜 그 기록이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정했는지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미술관과 아카이브에는 설명책임성accountability이 있다. 설명책임성이란 한 기관이나 단체 등이 내린 결정과 정책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려는 노력, 그리고 만일 이에 대해 시민의 질문이 제기될 경우 충실하게 답변할 의무를 의미한다. 즉, 설명책임을 지킨다는 것은 처음부터 시민을, 주권을 가지고 기관과 함께 하는 주체로 바라보는 태도다. 따라서 설명책임성은 커뮤니케이션의 맥락 속에 놓여있다. 설명책임은 공적 논쟁, 민주적 협치, 시민적 토론에 대한 책임이기도 한 것이다.

설명책임성이 준비된 아카이브는 시민이 직접 기록을 열람하며 왜 이러한 자료가 보존되고 있는지 파악하고, 과연 그것이 적합한지 판단하고, 어떤 새로운 자료를 더하면 좋을지 건의해 해당 기관의 의사 결정에 참여하게 만드는 협치governance의 도구다. 아카이브는 좋은 시민을 만드는 데에 기여한다. 따라서 아카이브는 미술관의 역사에서 오랫동안 상호작용 해온 두 길항적 힘인 반동성과 급진성 사이에서 후자에 무게추를 달아주는 기관이다. 즉, 미술관 아카이브가 중요한 이유는 그저 누구나 고급 지식을 얻을 수 있게 한다는 점에만 있지 않다. 다양한 지역에 위치한 수많은 미술관은 아카이브를 통해 지역민의 문화예술 역사를 개성적으로 보존하고 의미화할 수 있다.10 설명책임을 다하는 아카이브가 운영될 때, 시민은 위에서 아래로 강제되는 역사(기록)의 보존(파괴)에 순응하지 않을 수 있다. 그들 자신이 겪은 지역사회의 역사와 기록을 이용해 아카이브를 다양하게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발터 벤야민을 잠시 빌려올 수 있을 것 같다.

“문화유산의 현존재는 그것을 창조한 위대한 천재들의 노고뿐만 아니라, 이름도 없는 동시대의 부역자들의 노고에도 힘입고 있는 것이다. 야만의 기록이 없는 문화란 있을 수 없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한 번도 없다. 문화의 기록 자체가 야만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이 사람 손에서 저 사람 손으로 넘어가는 부승의 과정 또한 이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유물론자는 가능한 한도 내에서 이러한 전승으로부터 비켜난다. 그는 결에 거슬러서gegen de Strich 역사를 솔질하는 것을 그의 과제로 삼는다.”11

벤야민은 표면에 뭔가가 빽빽이 자라난 결을 거슬러서 역사를 솔질한다고 말했다. 결을 거슬러 문화유산의 역사를 빗는다는 것은 다양한 사람들, “패배자, 배제된 자, 천민의 관점에서 [역사를] 고찰한다는 뜻이다.”12 또, 이들을 역사를 전승하고 기록을 남기는 주체로 바라볼 때, 아카이브는 다양한 역사들을 모을 수 있다.

나아가, 아카이브는 역사적으로 ‘보존 가치’를 인정받은 문화예술에 대한 자료를 상아탑 바깥에서 생산할 때에서야, 미술관에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한다. 미카엘 뢰비는 이렇게 지적했다. “벤야민은 “고급 문화”의 작품들을 반동적인 것으로 간주해 거부하기는커녕, 그것들 상당수가 공공연하게 혹은 은밀하게 자본주의에 적대적이라고 확신한다. 문화 “유산”(E.T.A. 호프만의 환상적인 콩트가 됐든, 보들레르의 시가 됐든, 레스코프의 이야기들이 됐든)의 유토피아적이거나 전복적인 순간을 재발견하는 것이 관건이다. (중략) 이는 ‘보존’이 파괴적 계기와 변증법적으로 연결되는 한 참이다. 억압받은 자들은 공식 문화의 물화된 껍질을 깨야만 이 비판적/유토피아적 씨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13


10
이를 나름대로 시도한 예시는 시민들과 함께 부산 영도의 공공미술을 전수조사해 기록한 ‘프로젝트영도’다. 2020~2022년의 세 해 동안 진행된 프로젝트영도는 특히 2022년에는 시민들과 함께 재개발 사업이나 흉물 논란 등과 관련된 영도 공공미술의 지역사를 모았다. 프로젝트 영도가 그간 모아온 기록은 다음 홈페이지( https://ydct.works/2022/)에서 확인할 수 있다.
11
발터 벤야민, 「역사철학테제(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중 테제 7번,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1992), 347p. 강조는 인용자.
12
미카엘 뢰비, 『발터 벤야민: 화재경보』, 양창렬 옮김, 난장(2017), 110p.
13
12번 각주와 같은 책, 같은 부분.

때때로 잊히지만, 미술관은 공유지다. 공유지는 공유자를 위해 존재한다. 미술관 아카이브는 미술관이 지식과 역사에 힘을 부여하는 통로다. 그리고 시민이 그 통로에 개입할 때 미술관은 다양한 역사들과 포옹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역사를 다루는 미술관 아카이브의 ‘전문성’이다. 미술관 아카이브가 하나의 거대한 방향 밑에 깔려 엉켜 있던, 제각기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작은 역사들을 시민들이 솔질할 수 있게 하길, 그래서 마침내 역사들을 파괴하며 보존하는 공유지가 되길 바란다.

글 김선진
글이 잘 안 써지는 시점에 도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