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2024 AUTUMN51

유령 등장, 유령 퇴장, 유령 재등장

“역사/이야기의 증인들은 어떤 복귀를 두려워하고 희망하며, 그 다음에도 계속해서 유령의 오고감을 두려워하고 희망한다.” 호레이쇼: 어! 그게 오늘밤에도 다시 나타났어? (그 다음) 유령 등장, 유령 퇴장, 유령 재등장
─햄릿을 인용하는 데리다를 인용

손가락이 액정을 간단히 쓸어 올리면, 숏폼과 릴스를 (이론적으로는) 무한히 볼 수 있다. 최대 90초짜리 세로형 영상은 유행하는 음원 사비의 훅과 함께 그마저도 두 배속으로 조정된 내레이션 요약과 가장 ‘결정적인’ 이미지 파편을 연이어 보여준다. 그러나 하나의 릴스 콘텐츠의 평균 시청 시간은 8초다. 우리가 숏폼 영상을 보며 할애하는 시간은 일평균 60분 내외다. 대체 우리는 무엇을 보는 것일까? 우리는 오로지, 하나의 지나감이 또 다른 도래로 영원히 이어지는 것을 본다. 어떤 공백도 없이 다시, 다시 시작되는 것을 본다. 매혹적인 사실은 내가 멈추지 않는 한, 이것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reels’가 필름이나 전선을 감는 얼레를 의미하기 때문에 내가 여기서 ‘포르트-다’ 놀이를 떠올린 것이 무리한 비약은 아닐 것이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두 살짜리 손자가 끈 달린 실패를 멀리 던지며 “fort(사라졌다)”, 다시 자신에게로 당겨 가져오며 “da(여기에 있다)”라고 외치는 것을 본다. 그리고 아이가 엄마의 부재에서 기인한 불안을 놀이의 능동성으로 견뎌내는 것이라 분석한다. 이러한 불안을 해소하려는 강박적 반복은 반복 자체를 제외하고는 어떤 목적도 내용도 없다.

우리는 종종 너무 바쁜데,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이 하루를 끝낼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도 몇 시간 동안 릴스를 볼 수 있다. 이미 임계점을 넘겨버린 수면시간을 미루고 또 미루면서, 대중교통에 실려 서울에 성호를 그리듯 이동할 때 그 부서진 시간 틈새 사이사이로. 무언가 계속되어야 한다. 시간의 근원적인 비어있음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90초가 지나기 전에 하나의 영상을 끝장내고, 곧장 다음 영상을 호출할 때, 우리는 간단한 손짓으로 ‘포르트-다’ 놀이를 한다. 시간의 틈새를 재빨리 접어 치운다.

예술의 사명 중 하나는 시대를 사유하는 것이다. 그 노력 덕분에 시대는 항상 내용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시대는 ‘내용 없음’의 불길함을 감지한다. 섬광처럼 빛났던 밀레니엄의 젊음과 기술 낙관주의 그리고 미래주의는 이미 지나간 유행이 되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동시대성’이라는 관념도 세기말의 종말론이 그랬듯, 특정 시대의 조건 아래서만 가능했던 하나의 ‘독특한 허구’로 느껴지기도 한다. 과거주의가 문제가 된 지도 이미 오래다. 안일하지만 끈질기게 잔존하는 듯 보였던 복고주의도, 노스탤지어에 대한 비판도 지나갔다. 소진의 징후마저 소진된 후, 지금주의와 영원주의의 닫힌 림보에서 우리는 유보되고 고여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곳에도 분명 무엇인가 있다. 그것이 텅 빈 우리의 시대로 재림하는, 최초에 지나갔던 우리의 ‘미래’다.

어긋남에서, 비동시성으로부터 시대에 대한 진정한 사유를 시도한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공산당 선언」과 함께 햄릿을 인용한다. 극의 무대 위에 선왕의 유령이 최초로 등장할 때, 이것은 언제나 이미 재등장인데, 유령은 죽음으로 퇴장한 존재가 다시 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령성은 그 자체로 현존과 부재, 현행적 실재성과 가상적 허상의 경계를, 시대의 임의적 분할을 불가능하게 한다. 그런데 이 되돌아온 것이 한낱 과거의 망령에 불과한지, 혹은 시대착오적이기에 순전히 현재적일 수 있는 재-탄생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데리다의 엄밀한 말장난은 이렇게 대답한다. ‘알 수 없음’이야말로 미래의 진정한 예고라고.

우리가 엄지로 “포르트”하지 않으면, 릴스는 하나의 숏폼 영상을 영원히 반복재생한다. 나는 우연히 한 여자가 성난 야크에게 뒤쫓기고 있는 영상을 본 적 있다. 여자가 달려가면, 잠시 후 야크가 지나간다. 그러나 반복이 반복될수록 쫓고 쫓기는 것이 누구인지 알 수 없어진다. 배터리가 소진되면 릴스는 비로소 중단된다. 꺼져버린 검은 액정 화면 위에 우리의 얼굴이 비친다. 유령은 우리의 얼굴을 닮았다. 출몰하는 유령은 익숙하고 섬뜩하며 동시에 감각적이다.

계간지인 우리 매거진은 원고를 청탁하는 시점과 발행되는 시점이 각기 다른 계절에 머문다. 활자는 매 순간 시차를 디디고 서 있다. 교정할 때면 수많은 유령과 함께 한다. 그들은 주석을 통해 호명되고 오래된 문헌들의 인용구들에 깃들어 다르게, 새로이 읽힌다. 언제나 재귀인, 그러므로 언제나 미래인 유령과 함께 사유한다면, 미래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과 마찬가지로 과거를 두려워할 필요도, 현재를 파산의 유예라 비관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알수 없음’을 계속하기 때문이다.

“비어있는 곳 빼고 모든 것이 지워져서. 세상엔 공터만이 남았다. 주머니 속에서 어떤 손을 잡았다.”1

그것이 언제나 미래의 손이다.

1
차도하, 「미래의 손」, 『미래의 손』, 봄날의 책(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