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개의 은색 벽으로 이루어진 엘리베이터를 탄다. 버튼을 누른다. 문이 닫힌다. 직육면체 모양의 엘리베이터는 육중한 기계음을 내며 위나 아래를 향해 수직으로 움직인다(고 추측된다). 머리 위 전광판의 작은 디지털 숫자가 바뀐다. 엘리베이터라는 상자 안에 담긴 우리들은 디지털 디바이스의 액정을 들여다보거나 거울을 보며 매무새를 다듬거나 하릴없이 따분한 시간을 보내지만, 우리의 몸은 몇 겹의 공간을 통과하고 있다. 다시 문이 열린다. 풍경은 바뀌고, 시간은 단축되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새로운 시공간으로 뛰어든다. 열린 문 앞으로 복도가 이어진다.
이제는 복도를 상상해 보자. 복도는 엘리베이터가 수평적으로 길어진 모양의 긴 직사각형 입방체다. 복도는 건물을 관통하는 파이프다. 복도는 4개의 긴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양쪽 끝은 뻥 뚫려있다. 용도에 따라 재-건축되고 리-모델링 되는 공간들과 달리 복도는 꾸준히 살풍경하다. 우리는 복도를 걸으며 곧장 복도를 잊어버린다. 그저 떠나온 곳과 가야 할 곳만을 생각하며 앞으로, 뒤로 움직일 뿐이다. 복도에서 오고 감은 유의미하지만, 서성거림은 무의미해진다. 복도에서 시공간은 평평하게 펼쳐진다. 그러나 목적을 잃은 이들은 복도라는 직선 위를 기약 없이 떠도는데, 이때의 복도는 막막한 장애물이 된다. 가야 할 곳을 잃은 자에게 복도는 지날 수도, 머물 수도 없는 복잡한 미로다.
조르주 페렉은 책 『공간의 종류들』에서 페이지부터 우주에 이르기까지
본인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공간에 대해 썼다. 이 집요한 기록에서
페렉은 무용한 공간들에 대해 이미 이야기했다.
“옛 저택에서는 계단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없었다. 오늘날의
건물들에서는 그보다 더 더럽고, 더 춥고, 더 적대적이고, 더 인색한
것이 없다. 우리는 계단에서 더 많이 생활하는 법을 배웠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1 복도 또한 페렉이 본 계단과
마찬가지다. 복도에 들어선 순간 우리는 방에서 방으로, 목적에서
목적으로 움직이지 결코 그 공간을 음미하거나 그곳에 머물지 않는다. 더
빨리, 더 많이 과잉생산을 해내야 하는 현대사회에서 추방된 사람들만이
복도를 기웃거린다. 부랑아, 방랑자, 이상한 사람들, 새로운 시공간에
녹아들지 못하고 부적응 중인 떠돌이들. 이런 사람들은 어느 날 무심코
지나치던 공간의 이상함을 감각한다. 원래 복도가 이렇게 생겼나, 복도는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로 이어지는가? 의문을 가진 순간부터 우리는 그
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어떤 것에 익숙해진다는 것 이상으로 위험한
일은 없다. 익숙함은 대상의 필요를 잊게 하고, 그 대상을 필요로 하는
자신을 잊게 하고, 결국은 나의 존재를 잃어버리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1
조르주 페렉, 『공간의 종류들』, 김호영 옮김, 문학동네(2019), 65p.
강조는 인용자.
“나는 벽에 그림 하나를 건다. 그런 다음 벽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 벽은 더 이상 내가 살고 있는 장소를 규정하고 경계 짓는 것이 아니며, 나의 장소와 타인들이 살고 있는 다른 장소를 분리해 주는 것도 아니고, 단지 그림을 위한 하나의 받침대일 뿐이다.”2
그러나 떠돌이들의 방황을, 목적 잃음을 긍정한 소설가 W. G. 제발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기억의 유령』에 실린 팀 파크스의 글에 따르면
제발트는
“첫 문장에 날짜와 장소, 목적 있는 행동의 칵테일을 우리에게
선사하기를 좋아한다”.3 파크스의 주장처럼 제발트의 『토성의
고리』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된다.
“한여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던 1992년 8월, 다소 방대한 작업을
끝낸 뒤 나는 내 안에 번져가던 공허감에서 벗어나고자 영국 동부의
써퍽 카운티로 도보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파크스의 주장에 의하면 이 구체적이고 독자를 기대하게 만드는
시작은 제발트의 작품에서 가장 효과적인 코미디 요소인데, 그 구체성은
곧장 흩어져버리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시간, 장소, 명확한 목적과
의도를 밝힌 뒤 제발트의 문장들은 갈 길을 잃어버리고 제각기 흩어진다.
문장들은 입에서 입으로, 서술자의 증언과 진위를 확인할 수 없는 자료를
오가며 시공간을 뛰어넘어 방황한다. 정처 없이 두 발로 길 위를 떠도는
화자가 유일하게 주목하는 것은 인간의 손이 닿은 뒤 스러지는 황무지로,
그 폐허들만이 인간들이 여기 있다가-이미 지나갔음을 증명한다.
『토성의 고리』와 『이민자들』에서 그렇듯 제발트의 글들은 거의 언제나 이민이라는 단어 위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여기서 이민은 강제로 이동당하는 수동태, 외부 요인으로 인해서 재좌표화되었다는 성질을 부여한다. 『이민자들』에 등장하는 네 명의 인물들은 모두 이민 후 우울, 목적상실 등을 이유로 길을 잃고 방황한다. 그러나 제발트에게 있어 인물들의 목적없는 방황은 세상을 알기 위해서, 뿌리뽑힌 ‘나’를 알기 위해서, 결국은 나의 의미와 존재의 목적을 알기 위해서 거쳐야하는 관문이다.
『토성의 고리』의 제목은 “로슈한계(토성의 고리는 적도 둘레를 원형궤도에 따라 공전하는 얼음결정과, 짐작건대 유성체의 작은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아마도 과거에는 토성의 달이었던 것이 행성에 너무 가까이 위치하여 그 기조력으로 파괴된 결과 남게 된 파편들인 것으로 짐작된다.4)”의 사전적 정의를 내포하고 있는데, 제발트는 여기서 지나치게 강한 하나의 힘-여기서는 토성의 중력-, 그러니까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거세게 흐르는 힘에 필요 이상으로 가까이 가는 경우 거기에 빨려들어가 다른 중력에 의해 궤도를 떠돌고, 종국에는 ‘내’가 산산이 파괴된다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다.
“공간은 시간보다 더 길들여진 듯, 혹은 덜 위험한 듯 보인다. 도처에서 손목시계를 찬 사람들은 마주쳐도, 나침반을 지닌 사람들을 마주치는 일은 매우 드물다. 우리는 언제나 시간을 알고자 하지만(이제 누가 태양의 위치를 보고 시간을 추측할 수 있겠는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는 결코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것을 알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집에 있거나, 사무실에 있거나, 지하철 안에 있거나, 거리에 있다. 이것은 물론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분명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때때로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자문해 봐야 할 것이다. 즉 현재 위치를 파악하기. 단지 자신의 정신상태, 자신의 소소한 건강, 자신의 신앙, 자신의 야망,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단 하나뿐인 자신의 지형적 위치에 대해서.”5
스마트폰 화면에 떠오른 내 위치를 본다. 좌표화된 ‘나’는 파란색 동그라미로 표현되고, 얼굴이 향하는 방향은 뾰족한 화살표 모양으로 길 위에 떠 있다. 우리는 마치 유체이탈을 하고 있는 것처럼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시점에서 스스로를 내려다본다. 버즈 아이 뷰(bird’s eye view)로 보이는 화면은 사실 내가 아닌 새의 시선이고 신의 시선으로, 실제 내가 보는 풍경이 아님에도 언제나 나의 시각과 동일시된다는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이 점이 진짜 나의 위치이고 이 쪽이 내가 가야 할 방향인가? 혹은 인공지능이 반영한 신호이고 RGB 색점이 구현해 낸 일종의 유령일 뿐인가? 소설가 정지돈은 단편소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를 인공신경망과 공동 집필했다. 여기서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는 “끝없이” 증식하는 0과 1의 가능성을 비유한다. 끝없이 증식하는 복도는 계속해서 선택을 강요하면서 미래와 과거를 상실한 상태인 ‘나’를 악몽에 빠트린다. 왼쪽으로 갈지, 오른쪽으로 갈지 무한히 반복되는 두 갈래 길은 ‘나’를 미쳐버리게 하고 종국에는 시공간을 어그러뜨린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질문을 던져야 한다. 복도는 이쪽으로, 혹은 저쪽으로 밖에 갈 수 없는 제약이자 통제인가?
“오늘날에는 온갖 크기와 온갖 종류의 공간이 존재하고, 갖가지 용도와 갖가지 기능을 가진 공간이 존재한다. 산다는 것, 그것은 최대한 부딪치지 않으려 애쓰면서 하나의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이다.”6 일반적으로 삶은 탄생부터 죽기까지의 시간을 이르는 의미로 단어 자체에 시간성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조르주 페렉에게 삶은 시간적 의미가 아니었다. 페렉에게 삶은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상태다. 이 사실을 깨달은 자만이 복도라는 공간의 의미를, 복도 위의 “무언가 계속 사라지긴 하지만 어느 정도 농도를 가지고 나타나는 것”,7 일종의 유령처럼 떠도는 존재들의 흔적, 혼재된 시간이라는 카오스를 느낄 수 있다. 선형적 이동을 포기하고 유령처럼 어른거리는 방랑자들에게 현실은 유연하고 불규칙적이며 주관적이다. 이것을 인식한 이에게 내비게이션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 이런 점에서 복도는 하나의 단일한 파이프라기보다 여러 시공간을 줄줄이 꿰고 있는 입체적 거미줄의 일부에 가깝다. 복도 위 하나의 점으로 귀결되는 ‘나’ 위치는 사실 평면이 아니다. 우리는 수 갈래로 갈라지는 입체적 시공간에 서 있는 것이다. 앞에 놓인 한 잔의 칵테일이 술과 시럽과 유기물과 연기가 혼합된 과정이자 결과인 것처럼.
2
1번과 같은 책, 65p.
3
팀 파크스, 「사냥꾼」, 『기억의 유령 - W.G 제발트
인터뷰&에세이』, 린 섀런 슈워츠 엮음, 공진호 옮김, 아티초크(2023),
36p.
4
『브로크하우스 백과사전』, “로슈한계”
5
1번과 같은 책, 139p.
6
1번 각주와 같은 책, 17p
7
엘리너 웍텔, 「유령 사냥꾼」, 『기억의 유령』, 린 섀런
슈워츠 엮음, 아티초크(2023), 81p.
최초의 시작점은 이미 지나갔다(물론 언제 어디서 반투명하게 불쑥 솟아오를지 알 수 없지만). 어디로 향할 것인가? 어떤 것을 등지고 어떤 것은 마주하며 나아갈 것인가? 돌아간다면 언제, 어디서 되돌아가기를 결정할 것인가? 다수가 그렇게 한다고 해서 앞이나 뒤, 두 개의 방향 중 양자택일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수없이 뻗은 가능성 중 어떤 것을 등지고 어떤 것은 마주하며 나아갈지, 언제 되돌아가고 다시 시도할지는 우리에게 달렸다. 당신이 결정을 내릴 때까지 복도는 기다릴 것이다. 언제까지나 그랬듯이 서늘하게.
글 김수림
이 글은 매일 의식하지 않고 오가던 복도라는 공간에 ‘낯섦’을 느끼는
순간 시작되었다. 공간에 집중하자 지면도 하나의 공간으로 보였고, 그
위를 자유롭게 유영하고 싶었다. 예술사에서 영화와 미술이론을
공부했고, 전문사 과정으로 미술이론을 공부하며 전시와 교육을 기획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