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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하는 집: 대안적 삶을 위한 건축〉 전경 ©손미현

원하는 것에 다가가는 방법들 1
《연결하는 집: 대안적 삶을 위한 건축》

건축은 기둥과 벽으로 고정되어 한없이 땅에 달라붙은 작업이어서, 건축가들은 그 한계들을 변곡점 삼아 새로운 함수를 그려내도록 요구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축은 비단 물질들을 쌓아내는 일이 아니라 물질 사이에 수놓아질 빛들과 그 사이를 에울 행위들을 짓는 일일 것이다. 건축은 물질을 통하여 비물질을 짓고, 비물질은 다시금 물질들을 낳는다. 물질과 비물질의 끝없는 환원 관계를 설정하는 일을 우리는 건축이라 부를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열리는 《연결하는 집: 대안적 삶을 위한 건축》은 동시대 한국 건축가들의 다양한 집들을 선보인다. 전시는 [선언하는 집], [가족을 재정의하는 집], [관계 맺는 집], [펼쳐진 집], [작은 집과 고친 집], [잠시 머무는 집]의 6개 소주제로 소개된다. 집이라는 전제는 (도시적으로) 넓고도 (개인마다) 좁은 것이어서 그 광대하면서도 비좁은 틈을 건축가들이 어떻게 채워 넣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이 전시의 주요한 지점이 된다. 아파트나 빌라와 같은 여타의 복제품 같은 주택 양식을 거부하고 새로운 삶의 모양을 찾아 지어진 집들은 존재 자체로 한국 건축에서 예외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집이라는 것의 본질이 선명하게 노출되는 지점들이다.

전시장 내부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집이라는 단어를 마주한다. 슬며시 틈을 만든 입술이 마침내 닫히며 만들어내는 소리, 집. 안식처이며 피난처, 업무공간이자 유희의 공간. 집이라는 이름 아래 모이는 수많은 행위를 상상해 본다. 그러다 보면 너무도 가능한 것이 많아져서, 집이라는 집합 아래로 행위들이 모이기보다는 그 수많은 행위가 하나의 형태를 만들며 어떤 특정한 한 삶을 지칭하게 된다. 그러므로 집을 짓는 일은 부엌과 거실과 안방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삶을 지시하는 행위들이 공간을 불러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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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목천문화재단과 영화감독 정재은이 협업한 목천건축아카이브 다큐멘터리 〈원하는 것에 다가가는 방법들〉의 제목에서 인용.

조병수, 땅집, 2009 ©황우섭

이처럼, 삶을 공간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건축가들은 식사하는 시간이나 오후에 드는 햇살과 같이 질량 없는 것들을 철근과 콘크리트로 구현하게 된다. 정신적인 것들을 수호하기 위해 지켜져야 할 물리적이고 법적인 한계점들을 딛고 일어선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포기와 타협이 이루어진다. 지켜내고자 하는 것에 다가가기 위한 저울질은 개인마다 다른 것이어서 각각의 집들은 하나같이 다른 표정들을 하고 있다.

이 지점은 전시의 여섯 부분 중 하나인 [선언하는 집]에서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선언하는 집]은 건축가의 매니페스토가 되는 집들을 소개하는 부분이다. 조병수 건축가의 〈땅 집〉을 보자. 말 그대로 땅을 파고 들어간 하나의 작은 집이다. 하늘로 열린 작은 마당과 6칸의 작은 방들은 삶을 위한 최소한의 공간을 규정하는 듯하다. 이 집의 모든 문은 좁고 낮아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하며, 콘크리트에 끼워진 나무들은 썩어질 것을 가정하고 설계되었다. 건축안에 담길 삶의 모양은 침착하고 조용하다.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지켜내야 할 묵상의 삶이 여기 담겨있다.

동시에, 이 집은 건축이 언제나 시간을 꿰뚫는 작업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하나의 건물을 지을 때 우리는 수십 년을 상상해야 하며, 그 사이에 낄 이끼와 곰팡이들, 빗물 자국을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건축을 경험하는 것은 단시간에 이뤄지지 않는다. 공간을 경험하는 일은 언제나 시간과 맞닿아있어 건축의 공간은 경험자가 살아가는 선형적 시간성 위에 가지런히 해체된다. 〈땅 집〉의 마당에 있는 다짐흙벽은 그 땅을 파서 나온 흙으로 만들어졌으며, 이후 허물어지더라도 그 흙은 다시 원래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 집은 단순하고 확실한 방법으로 수십 년의 세월을 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집은 건축가의 선언으로 여겨진다.

〈연결하는 집: 대안적 삶을 위한 건축〉 전경 ©손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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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한 도면이나 모형, 추상적인 스케치에서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전시는 집을 상징적으로 담아낸 개념모형을 전시하거나, 1:2 스케일(실제 집 크기의 절반이 되는 크기)의 평면도를 전시장 바닥에 구현하는 등, 새로운 접근법을 시도한다. 전시의 한 쪽에서 도면과 스케치, 모형으로 다양한 집들을 소개하는 동안, 다른 한쪽에는 전시 기간에 열릴 워크숍과 단편영화 상영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있다.

그러나 전시가 이러한 노력들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건축을 보여주는 가장 주된 방식으로 도면과 글, 모형을 선택했다는 것이 첫 번째로 아쉬운 부분이다. 건축을 보여주는 가장 일반적이고 전통적인 방식이지만, 그만큼 가장 수동적인 방식의 전달 방법이기 때문이다. 또한 소개되고 있는 집의 수가 다소 많다는 것이 단점이기도 하다. 각각의 집들이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부족한 듯 보였다. 건축가들이 하나의 집을 만들며 펼쳐 내려간 이야기를 조금 더 새로운 방식으로, 합당한 분량으로 다루었다면 어땠을까.

이러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이 전시가 건축가들을 미술관으로 불러옴에 있어 가장 실용적인 건축이기도 한 ‘집’을 선택했다는 것은 유의미하다. 이번 전시 외에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은 여러 전시와 프로젝트에 걸쳐 건축을 계속해서 예술의 영역으로 불러오는 행보를 보였다. 건축이 예술인지 기술인지에 대한 논쟁은 전통적이며 끊임없는 주제이다.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예시를 도서관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도서관에서 건축 책은 예술 영역과 기술 영역 모두에서 찾을 수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건축은 땅에 붙어있는 작업인지라 기술 없이는 설명될 수 없는 동시에 정신적이고 비물질적인 것을 창조해 낸다는 점에서 분명 예술이기도 하다. 미술관은 이처럼 건축이 위치한 그 독특한 자리, 예술과 기술이라는 집합을 따로 떼어내지 않고, 건축의 본질을 부정하지 않은 채 그 교집합을 새로운 형태로 선보인다.

전시는 건축을 단순히 건물을 짓는 일이라 단언하지 않고, 물질 가운데서 피어날 식물과 동물, 사람들의 이야기, 대안적인 삶에 대해 말하기를 시도한다. 건축가의 드로잉이 미술관을 찾아왔을 때, 그것은 기술적인 측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재들 사이에서 생겨날 공백과 피어날 식물을 담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건축가의 드로잉은 언제나 건축가의 유토피아이며 그것은 기술적인 정보 값만으로는 표현되지 않는다. 전시된 드로잉에서 우리는 작은 나무와 사람들의 모습, 거친 선과 얇고 정밀한 선을 만난다. 이 각각의 표현이 모여 그 안에 담길 삶의 모습을 그려낸다.

드로잉뿐 아니라 건축 모형 또한 그러하다. 단순히 뭉뚱그렸을 때 모형은 집의 축소판이 되는 공작물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시멘트를 사용해서 정적이고 무게감 있게 표현할 것인지 정밀하게 재단된 종이를 사용할 것인지 박스를 사용해서 투박하게 표현할 것인지 등등 모형일지라도 어떠한 재료가 이 건축의 핵심을 잘 드러낼 수 있을까, 건축가들은 고민한다. 모형의 스케일을 정하는 과정도 중요하다. 1:100 이상의 스케일로 만들어 건축과 주변의 풍경, 또는 도시를 함께 담을 것인지, 내부 공간의 자세한 설정을 보여주기 위해 1:50 내지는 1:20으로 만들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수반된다. 각각의 모형은 건축가가 자신의 건축물을 가장 잘 표현해내고자 한 고민의 산물이다. 건축 드로잉과 모형은 단순히 구조나 기술을 표현하기 위한 것을 넘어서 건축의 말투나 성격, 이상적인 삶의 모양을 담는다. 이 전시를 읽어내는 또 하나의 축이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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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명의 건축가, 58채의 집, 6개의 소주제로 펼쳐지는 《연결하는 집: 대안적 삶을 위한 건축》은 여러 모양의 집을 살펴보며 2000년대 이후 한국의 주택 건축을 살펴본다. 이 전시는 일반적이고 비슷한 평면을 공유하는 우리 대부분의 집과 다른, 대안적인 삶을 담는 집의 형태를 살펴본다. 나아가 집이라는 건축을 모델하우스나 부동산이 아닌 미술관으로 불러오며 새로운 삶의 형식과 건축 언어들이 가진 힘들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수많은 도면과 스케치, 모형과 글들의 공백 사이로 자라나고 있는 건축가들의 새로운 유토피아를 읽어보는 과정에서 이 전시는 당신의 삶은 어떤 형태인지 묻는다. 속절없이 땅에 달라붙어 있더라도 반드시 지켜내고자 하는 가치들을 찾아 나간 이 집들을, 크고 작은 기둥과 보, 철근과 콘크리트 사이에 비칠 한 조각의 빛을 찾아 나간 여정들을 본다.

글 이한결
건축을 공부하며, 건축을 망치고 싶은 불온함을 품고 있습니다.